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92

[기협 칼럼] 취약한 사회

저녁 약속이 있었는데 전화가 불통이다. IPTV로 즐겨 보던 중국드라마를 못 보게 된 것 정도는 별일 아니지만, 인터넷만 끊긴 게 아니고 전화가 아예 먹통이 된 건 처음이었다. 우리집 인터넷이 문제가 아니라 뭔가 사고가 났구나 하면서 동네를 서성이다가 3G 연결망이 이어진 곳을 찾아 뉴스를 확인했다. KT 아현지사에 화재가 났다고 했다. 인명피해가 없었던 것은 다행이지만, 정보기술(IT) 사회의 약점이 그대로 드러났다. 가족 중 한 명이 어느 통신사의 협력업체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다. 이날 먹통 사태에 대해 대뜸 꺼낸 말은 “KT가 금융사업에 치중하면서 엔지니어들을 많이 잘라냈다”는 것이었다. 일요일, 우리 부서의 이혜인 기자가 취재를 해보니 그동안 KT가 구조조정을 참 많이도 했던 모양이었다. 그 회사만..

[구정은의 세상] 맘들의 분노, 맘들을 향한 분노

사립유치원 원장들이 아이들에게 써야 할 돈을 멋대로 빼내 물건을 사고, 월급도 수당도 마음대로 정해 보너스를 챙기고 아들딸에게까지 줬단다. 엄마들이 충분히 분노할만한 일이다. 경기 김포에선 아이 엄마들이 모인 커뮤니티에서 어린이집 보육교사가 아동학대를 했다는 소문이 돌아 학대교사로 지목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생각 없는 젊은 엄마들, 제 아이만 귀한 줄 알고 헛소문에 휘둘려 ‘신상털기’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에 대한 분노가 쏟아졌다. ‘맘카페’는 온라인 적폐로 지목됐다. 엄마들의 분노, 엄마들을 향한 분노. 비난과 손가락질의 강도를 보면 후자가 훨씬 더 센 것같다. 근래 여론의 바로미터처럼 돼버린 청와대 청원을 보면 사립유치원 비리를 뿌리 뽑고 처벌을 강화하라는 청원에는 8000여명, 아동..

[구정은의 세상] 난민이 싫으면 석유를 끊어라

예멘인들의 엑소더스가 시작된 건 2015년 초의 일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공습을 시작한 뒤 인구 2800만명 중 2200만명이 외부 도움에 끼니를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이 됐고, 19만명이 나라를 떠나 밖으로 나갔다. 사실 그전까지 예멘은 난민을 내보내는 나라가 아니라 밖에서 온 난민을 끌어안고 사는 나라였다. 소말리아에서 도망쳐 예멘으로 간 사람이 28만명이니, 지금도 예멘에서 나온 난민보다 예멘이 받아들인 난민 숫자가 훨씬 더 많은 셈이다. ‘예멘 난민 사태’는 사우디가 일으킨 일이다. 2011년 ‘예멘판 아랍의 봄’으로 장기집권 독재자를 몰아낸 뒤 집권한 압두라부 하디라는 인물이 당초 정치세력들 간 권력을 나눠갖기로 한 약속을 어겼다가 자기 정당에서까지 축출되고 결국 쫓겨날 판이 됐는데, 사우디가 하..

[기협 칼럼]가난은 날씨가 되어 온다

태풍이 지나가고 비가 오니 무더위가 그래도 좀 수그러들었다. ‘기상 관측 이래 최고기온’을 경신하던 8월 초의 그날, 스포츠 중계하듯 기상청의 공식 측정치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던 여름. 서울역 근처 쪽방촌을 취재하고 온 기자의 기사엔 찜통 더위 속에 방안에 누워 선풍기 한 대 틀어 놓고 하루를 보내는 어떤 이의 코멘트가 들어 있었다. “그래야 하루가 가니까 억지로 잠을 청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거죠.” 잠을 자야만 시간이 가니까 잔다는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그 더운날 오체투지를 하던 쌍용자동차 사람들, 그 옆에서 태극기를 들고 ‘박정희 대통령 말씀’을 외치던 사람들, 이 여름 한국의 풍경이었다. 태풍이 온다고 며칠 전부터 예보가 흘러나오고, 더위를 식혀줄까 가뭄을 해갈해줄까 은..

[구정은의 세상]대통령이 할 일, 민주노총이 할 일  

한낮의 기온은 40도 가까이 치솟고. 남쪽 바다는 아열대로 바뀌어가고. 추위도 더위도 불평등해서, 힘든 사람은 이 폭염을 더 힘들게 견뎌내야 하고. 여전히 거리엔 천막 하나 펼쳐 놓고 농성 중인 사람들이 남아 있고. 기록적인 무더위라는 이 여름의 풍경들. 그래도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과 KTX 해고 승무원들 문제처럼 오래도록 끌어온 이슈들이 해결되는 걸 보면서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실감한다. 누군가에게는 성에 차지 않을 것이고, 피해 당사자들에게는 미완의 승리이자 부족한 타협책일 터다. 그래도 그 고통에 사회가 공감했고, 지난한 세월의 마무리를 짓게 됐다는 건 말 못할 아픔 속에 거둬낸 성과다. 그 힘든 싸움을 해낸, 이겨낸 분들을 ‘피해자’라는 말로 표현하는 건 어쩐지 죄송스럽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쌍..

[기협 칼럼]가짜난민

제주도에 들어온 500여명의 예멘인들을 비난하며 반대 시위를 하고, 이들을 받아서는 안 된다며 청와대 청원을 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은 상상했던 대로인 동시에 상상 이상이다. 이미 난민 유입문제로 사회적 논쟁이 벌어졌던 구미 국가들도 한국의 이런 노골적인 모습에는 좀 놀란 것 같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섬으로 도망쳐온 예멘 난민 500명에 한국인들이 분노했다”고 적었고, 독일 도이체벨레는 “한국인들은 예멘 난민신청자들이 들어오자 저항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공영라디오방송(NPR)은 “한국의 반 난민 백래시가 전쟁을 피해 망명지를 찾아온 예멘인들에게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말 그대로 백래시(Backlash)인지는 다소 의문스럽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그 역작용으로 거센 반발이 일어나는 걸 백래시라..

[구정은의 세상] 밥값과 평화

대학시절의 어느 겨울, 한 달 동안 ‘알바’를 했던 회사가 있었다. 종일 서서 일하느라 힘들었지만 기억에 남아 있기로는 좋은 회사였다. 4대보험에 가입시켜줬고, 점심을 먹고 난 오후에는 야쿠르트와 초코파이를 줬다. 가끔씩 그 회사를 떠올릴 때면 생각나는 것은 두 가지다. 눈이 많이 내린 날 출근하기 너무나 싫어 회사를 그만둘까 했던 기억, 그리고 국. 밥과 함께 나오는 그 국 말이다. 끼니 때마다 국물을 싹싹 퍼먹는 내게, 1cm 깊이로 퍼주는 국은 언제나 모자랐다. 낯선 분위기에서 쭈뼛거리느라고 밥 퍼주는 분에게 ‘국 더 달라’는 말도 못한 채 한 달 동안 점심을 먹었다. 기숙사는 공짜였다. 앉은뱅이 탁자 하나에 텔레비전을 놓아둔 동료 방에 놀러가기도 했다. 지방에서 온 친구들은 대개들 지하철 요금을 ..

[기협 칼럼] 청와대와의 경쟁

26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두 번째 정상회담이 열리고 만 하루 동안 청와대 페이스북에 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26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통일각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두 번째 정상회담을 개최했습니다”라며 회담 사실을 공개한 글로 시작해 두 사람이 만나는 사진, “회담 결과는 27일 오전 10시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밝힐 예정”이라고 예고한 글, 현장의 영상, 회담 결과를 전하는 문 대통령의 동영상, 발표문 전문, 기자회견 문답, NSC 상임위원회 회의결과 브리핑이 뒤를 이었다. 청와대 웹사이트와 트위터에도 비슷한 내용들이 그대로 올라왔다. 영상 제작 뒷이야기같은 ‘팬서비스’도 빠지지 않는다. 언론들은 남북 정상의 ‘번개’를 재빨리 속보로 전했고, 시민들 관심은 높았고, ..

[구정은의 세상]남북의 시간은 같이 흐른다

문재인 대통령의 말은 담담하면서도 논리적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의 말에서는 민족, 혈통, 핏줄이 훨씬 더 강조된 느낌이었다. 남북 정상의 산책과 회담과 만찬의 순간순간들을 담은 동영상들이 이렇게 인기를 끌다니. ‘정상회담 덕후’들이 곳곳에 생겨난 모양이다. “누군가 방명록에 사인하는 걸 실시간 생방으로 지켜볼게 될 줄이야”라는 어떤 이의 말처럼, 정상회담은 국가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인 동시에 지켜보는 모든 이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준 아주 특별한 이벤트였다. 민족의 운명, 공동번영, 자주통일. ‘민족’은 얼마나 무거운 말인가. 핏줄이나 혈통, 이런 것들이 강조하는 무언가를 생각하면 중압감이 든다. 나 개인을 넘어선, 내가 존재하기 전부터 있어왔던 무언가를 전제로 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 앞에서 개인은 ..

[기협 칼럼] 여자들은 집에 가지 않는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이란의 여성 인권변호사 시린 에바디는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는 투사다. 하지만 그 자신이 1970년대에는 지금의 이란 체제를 만든 이슬람혁명에 동조했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이지만,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한 대부분의 사회가 그랬듯 가부장적이었던 이란에서 에바디는 테헤란국립대학을 졸업하고 법관이 됐다. 회고록에 당시를 회상하는 내용이 나온다. 샤를 비판하는 공개성명에 이름을 올린 그에게, 이슬람주의자인 남성 법관이 묻는다. 혁명 뒤의 국가에서는 당신같은 ‘여성’들의 자리가 없을텐데 왜 이 혁명에 동참하느냐고. 에바디도 이를 몰랐을 리 없지만, 그럼에도 당시의 거대한 불의에 맞서는 길을 선택한다. 예상대로 혁명은 여성 판사 에바디를 법정에서 내몰았다. 혁명은 어떻게 사람을 배반하는가, 그 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