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198

35. 19세기말~20세기, 마케도니아를 노린 동유럽 민족국가들의 분쟁

35. '마케도니아 문제' 1878년 회의와 1912-13년의 발칸 전쟁 사이에 발칸의 민족주의자들의 관심은 이른바 ‘마케도니아 문제 Macedonian Question’에 쏠려 있었습니다. 이는 베를린 회의에서 열강의 결정, 특히 마케도니아를 오스만 영토로 다시 내어준 데에 불만을 품은 불가리아, 그리스, 세르비아 세 나라 간 분쟁을 가리킵니다. 베를린에서 러시아는 산스테파노 조약에 따라 정해졌던 불가리아의 국경을 다시 그리도록 용인하고 마케도니아를 다시 오스만에 넘겼습니다. 불가리아는 자신들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땅을 내어주고 영토가 크게 줄어드는 걸 봐야 했고, 세르비아인들은 1877-78년 러시아와 오스만의 전쟁 와중에 얻어낸 땅의 일부를 돌려주어야 했지요. '마케도니아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

34. 1878-1885년 발칸, 반 오스만 봉기와 열강들의 횡포

34. 1878-1885년의 발칸 1875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반 오스만 투르크 봉기가 일어나자 세르비아는 오스만의 종속에서 완전히 벗어나 영토를 늘릴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반 오스만 봉기는 또한 유럽의 열강들이 이른바 ‘동유럽 문제 Eastern Question’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역사란 무엇인지... 지금까지도 '서유럽'은 '동유럽 문제'를 놓고 씨름하고 있는 형국이니. 최근 벌어진 우크라이나 시위 사태가 그런 예이지요. '유로마이단(유럽) 시위'라 이름붙은 이번 시위는 동유럽의 우크라이나를 서유럽(정확히 말하면 옛 동구권도 포함된 유럽연합)이 끌어당기고, 반대편에서 러시아가 붙잡으면서 벌어진 사달이거든요. 아무튼 오늘날의 유로마이단 시위에서, 140여년을 거슬..

33. 저물어가는 합스부르크, 헝가리와 '대타협'을 하다

33.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대타협(Austro-Hungarian Ausgleich) 유럽 민족주의의 부상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봉건적인 합스부르크 치하의 오스트리아 제국에는 암운이 드리워졌습니다. 오스트리아는 1848-49년의 격변을 간신히 헤치고 나오기는 했지만 이 성공은 합스부르크가 민족주의자 그룹들을 이간하고 내분을 일으켜 간신히 얻어냈던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돼 있어, 반 제국 세력들이 단합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에 가서 봉건적인 제국을 밑바닥에서부터 흔든 것은 합스부르크 왕조 내 비 독일계 가신들의 반발이 아니라, 독일계의 민족주의였습니다. 19세기, '민족주의의 시대' 동유럽의 변화 1848-1849년 오스트리아 제국을 휩쓰는 혁명의 물결 자유주의-민족..

32. 1848-1849년 오스트리아 제국을 휩쓰는 혁명의 물결

32. 1848-1849년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일어난 혁명들 1848-49년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연달아 혁명이 일어납니다. 그 씨앗을 뿌린 것은 요제프2세 Joseph II (1780-90년 재위)였습니다. 요제프는 다른 유럽의 왕실들처럼 지리적으로 통일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비엔나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는 조치들을 취했습니다. 그 중에는 독일어를 제국의 행정에 쓰이는 공식 언어로 만드는 것도 들어있었습니다. 이것이 제국 내 비독일계 국민들의 반작용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민족'의 시대... 민족을 구성하는 핵심 중의 하나가 바로 '언어'죠. 귀족들과 지식인들은 지방분권과 전통문화를 강조하며 반발했습니다. 요제프가 죽자마자 그가 취했던 조치들은 다시 무효로 돌아갔습니다. 오히려..

31. 1830년, 발칸 반도의 '검은 조르제'

31. 1830년 세르비아·그리스 혁명 뒤의 발칸 반도 어느새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고... 제국의 갈라진 틈을 거대한 균열로 만드는 것은 '봉기', 수탈당하던 사람들의 저항이겠지요. 1804년 베오그라드에서 투르크 주지사의 혹정에 시달리던 세르비아인들이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1차 세르비아 봉기라고 불리는 봉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스만 중앙정부의 대응이 참 희한합니다. 주지사 측과 민중들이 싸우는데, 일단 베오그라드의 혼란을 무마해야 하니 반란군에게 오히려 무기를 줘서 이기게 만듭니다. 주지사는 내팽개치더라도 일단 질서회복부터.... 라는 걸까요. 힘 빠진 제국은 변경의 소란에 이렇게 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지요. 세르비아 반란군을 이끈 것은 돼지를 사고파는 일을 하던 조르제 페트..

30. 나폴레옹 이후, 1815년의 동유럽

30. 1815년의 동유럽, 신성동맹과 구시대의 종말 나폴레옹의 러시아 공격(1812년)은 재앙으로 끝났습니다. 그 후 2년도 못 가 프랑스 제국은 러시아, 프로이센,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의 연합군, 그리고 그들을 지원한 영국 등에 밀려 무너졌습니다. 연합 세력이 프랑스를 침공한데 이어 나폴레옹은 1814년 황제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승리한 열강들은 비엔나에 모여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을 재편했습니다. 승자들의 이익나누기에서 동유럽은 중요한 몫을 차지했습니다. 1815년 비엔나 회의에서 승전국 연합은 유럽 지도를 자기들 이해관계에 따라 다시 그렸습니다. 또 자신들의 통치 하에 있는 모든 영토에 경찰국가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낡은 왕정 질서에 향후 어떤 위협도 가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

29. 19세기, '민족주의의 시대' 동유럽의 변화

4부 19세기-1918년 민족주의의 시대 PERIOD OF NATIONALISM 29. 1809년의 동유럽 어느새 시간은 흘러~ 흘러~ 19세기로 넘어옵니다. 2차, 3차 폴란드 분할이 이뤄지던 시기는 이미 프랑스 혁명 전쟁이 일어나 서유럽의 정치문화에 격변이 오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념과 함께 혁명군을 통해 확산된 자유민주 ‘국가(nation)’라는 개념은 사뭇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폴란드인들의 ‘국가’는 이제 갈기갈기 찢겨나갔지만 국가와 국경이라는 망할놈의 개념은 신성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이 신성화는 국가라는 개념이 갖는 본질적인 성격인 동시에 ‘계몽’을 통해 퍼져나간 것이었습니다. 동유럽에서도 서유럽과 비슷한 양상의 정치적 자각이 일어났습니다. 밖에서..

사람들이 떠나고 난 놀이공원은

버려지고 남겨진 것들... 이번에는 어떤 것들일까요. 철지난 휴양지, 사람들이 떠나고 간 놀이공원... 을씨년스럽고 서글픈 곳들이죠. 그러니 '버려진 놀이공원'은 얼마나 더 쓸쓸할까요. 위 사진에 있는 곳은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물에 잠긴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의 식스플랙스(Six Flags New Orleans) 공원입니다. 2000년 개장됐는데 몇년 지나지 않아 저 지경이 됐습니다. 여러 주 동안 물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시설을 복구해 쓸 수도 없게 됐고, 뉴올리언스 전체의 경제가 엉망이 되면서 폐허로 방치돼 있다는군요. 원래 뉴올리언스는 '재즈의 고향'으로 유명하다죠. 이 공원도 개장할 당시에는 이름이 '재즈랜드'였답니다. 귀신 영화나 범죄 영화를 찍으면 딱 적당할 것처럼 보이죠? 이..

28. 왕위를 내놓은 왕가, 찢겨나간 폴란드

28. 1772-1795년 폴란드 분할 폴란드가 정점에서 밀려나 쇠락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국가를 떠받쳐줄 통합된 사회정치적 시스템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17세기 중반까지 폴란드는 내부적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폴란드 귀족들은 너무 힘이 강해져 왕실의 권위에 맞먹으려 했기 때문에,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귀족 집단들을 서로 통합할만한 실질적인 단일한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평가랍니다. 저야 뭐 잘 모르지만서도... 귀족들의 회의체인 '세임 Sejm'은 ‘자유거부권(Liberum Veto)’이라는 이름으로 정부의 정책을 무산시켜 행정을 마비시키기 일쑤였습니다. 이 자유거부권은 귀족들이 나약한 왕실을 윽박질러 얻어낸 것으로, 세임에서 단 한 명의 귀족이 반대해도 정책이나 법안..

27. 주정뱅이 술탄과 오스만 제국의 몰락

27. 17-18세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쇠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정점에 올려놓은 술레이만 대제가 1566년 죽고 그의 아들 셀림2세가 즉위했습니다. 그런데 셀림2세의 별명은 '주정뱅이'였습니다. 영어로는 Selim the Sot 혹은 Selim the Drunkard... 아버지의 영어식 호칭이 Suleiman the Magnificent 인 것과 비교하면 참 얼굴 팔리는 별명입니다. 덕망 있는 군주의 치세가 끝나면 꼭 이렇게 쇠퇴를 재촉하는 인물들이 등장하지요. 그것이 어디 개인의 문제이겠습니까마는. 술레이만 대제가 사망한 뒤, 오스만 제국은 점차 안팎에서 쇠락의 길로 빠져들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안으로부터의 쇠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창 융성하던 시기의 오스만 정부가 갖고 있던 독특한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