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구정은의 세계] 망령의 시대

딸기21 2017. 3. 2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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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작가 마루야마 겐지의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는 오토바이의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소설이다. 뿌리 뽑힌 채 질주본능으로만 존재하는 오토바이는 거대 도시를 꽉꽉 메운 인간들을 향해 이렇게 일갈한다. “뒈져라, 형법 불소급의 원칙.” 문명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저급함, 죄를 짓고도 뉘우치지 않으며 스스로가 더럽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인간들, 늙고 병들고 타락한 나라를 향한 이단아의 처절한 외침이다.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언술이 곳곳에서 판을 친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연방 하원의원이 백인들의 문명, 백인들의 문화를 거론했다. 미국이 스페인에게서 필리핀을 빼앗던 시절에 나오던 케케묵은 말들이 21세기에 소셜미디어를 타고 울려퍼졌다. 인종주의의 망령은 미국과 유럽이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쌓아올린 이상과 삶의 기준을 흔들고 있다. ‘나치’라는 단어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공화당의 대선후보로 목소리를 높일 적에 이미 미국의 멕시코계 이민자들은 파시즘의 그림자를 느꼈다. 최근에는 캘리포니아의 한 예술가가 트럼프에 나치 표식을 합성한 광고판을 설치했다가 논란을 샀다. 그는 트럼프를 비판하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했지만 서구인들에게 여전히 상처인 스와스티카 문양이 대로에 등장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장기집권을 꿈꾸는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유럽국들에 나치 딱지를 붙였다. 그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게 “유럽은 우리가 자기네를 나치라 부르면 불편해하지만 네가 바로 나치 수법을 쓰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세계 사람들은 오히려 얄밉게 말을 뱉는 에르도안에게서 독재자의 모습을 본다. 누군가를 보며 나치를 연상하거나, 나치에 비유하거나 하는 일이 어느 틈엔가 금기에서 풀려나버렸다. 프랑스에선 트럼프보다 극우 색채가 더 짙으면서도 약간 점잖은 척 하는 마린 르펜이 대선 후보다. 르펜은 나치를 대놓고 옹호해온 자기 아버지를 당에서 내쫓으면서까지 중도 유권자들을 끌어당기려 하지만 그의 뒤에 있는 낡고 오래된 인종주의의 그림자는 좀체로 옅어지지 않는다. 유엔에서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을 ‘아파르트헤이트’로 규정한 보고서가 나왔다가 철회되는 소동이 벌어져 시끄러웠다. 인도의 힌두 민족주의자들은 종교차별 속내를 감추지도 않은 채 ‘뉴인디아’를 외친다. 

 

인종주의와 파시즘의 부활이라고 하면 좀 호들갑스럽게 들리기도 한다. 톤을 좀 낮춰 독재 향수 혹은 ‘권위주의의 재생’이라면 어떨까. 트럼프가 불러낸 로널드 레이건, 프랑스에서 우파 대선후보 프랑수아 피용이 들고 나온 드골 향수는 양반이다. 필리핀에선 쫓겨난 독재자 마르코스가 ‘영웅’으로 복권됐고,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는 석방될 예정이다. 얼마전 페이스북에는 제주에서 서북청년단을 자처하는 우익집단이 간판을 내걸었다는 글이 올라왔다.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다.

 

망령의 시대다. 과거의 이야기만 난무하고 미래의 이야기는 없다. 사회의 모든 목소리가 과거로 흘러간다.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과거를 불러낸다. 그럴 때 불러내는 과거는 상상과 기억 조작으로 이뤄진 과거다. 트럼프가 주장하는 위대했던 미국. 박근혜가 그리도 갖다붙이고 싶어했던 한강의 기적. 모더니티로 이동해가는데 실패한 이슬람 전투조직들의 극단주의도 겉모습만 다를뿐이지 조작된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은 매한가지다.

 

청산되지 못한 역사를 제도와 국가가 모른체하고 덮어두고 편들 때 사회는 과거를 놓고 싸운다. 과거를 불러 현재와 싸울 때 미래는 사라진다. 알파고가 바둑을 두는 시대에 삼성동 친박 시위대 입에서 나왔다는 ‘마마’는 대체 웬말인가. 중국 무협사극을 보던 내게 딸이 물었다. 옛날 시종들은 모두 드라마에 나오듯이 주인을 위해 목숨까지 내걸고 충성을 바쳤느냐고. “그 시대에 살아보지 않아 모르지만, 그렇게 계속 교육을 받으면 주인을 위해 목숨도 내놓게 될 지 모르지”라고 답해줬다. 망령의 시대는 복종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정신적 노예의 시대이기도 하다.

 

망령은 멋대로 떠도는데, 지나온 길을 담담하게 되돌아보는 건 너무나 힘든 작업이다. 프랑스 유력 대권 주자인 에마뉘엘 마크롱은 지난달 “알제리 식민통치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가 우파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왕의 목을 자른’ 혁명의 나라라고 칭송받지만 프랑스에서 유력 정치인이 제국주의의 과거를 놓고 마크롱처럼 공개적으로 사과를 주장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프랑스가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람들과 문화를 공유해왔다는 것에 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며 궤변을 늘어놓는 피용같은 정치인들만 있었을 뿐이다. 역사와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우리는 아직도 4·3과, 베트남전과, 미군기지의 군 위안부 같은 문제들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다. 마루야마의 일갈은 단죄를 보지 못한 피해자들의 무익무해한 투덜거림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입 밖에 내어 함께 말하게 될 때 역사가 새로 쓰인다. 뒈져라, 거짓으로 가득한 과거의 망령 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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