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유럽이라는 곳

[구정은의 세계]러시아, 보드카, 푸틴

딸기21 2016. 12. 21.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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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에서 트럭 테러가 일어나고, 터키 앙카라에서는 러시아 대사가 현지 경찰관에게 ‘영화처럼’ 암살을 당했다. 그 와중에 눈길을 끄는 뉴스가 있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바이칼호 부근 도시 이르쿠츠크에서 ‘로션을 술 대신 마신’ 주민들이 숨졌다는 것이었다. 사망자 수는 계속 늘어나, 20일(현지시간) 현재 59명으로 늘었다.


The Moscow Times


피부에 바르는 토너를 술 대용으로 마셨다는 것인데, 엽기적이다. 중국에서 가짜 술을 먹은 사람들이 시력을 잃었다더라, 가짜 계란에 가짜 고구마까지 판다더라 하는 소식은 이제 온 세계의 공공연한 상식이 됐다. 하지만 가짜 먹거리를 만드는 것과, 로션을 술 대신에 마시는 것은 다르다. 로션 용기에 에탄올이 들어있다고 써놨는데 사실은 메탄올이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하지만 로션은 애당초 마시는 물건이 아니다. 


러시아는 많이 추워서? 원래 알콜중독자가 많아서? 옛 소련이 무너진 뒤, 유독 알콜중독자가 늘어나고 평균기대수명이 급속히 떨어진 나라가 러시아였다. 세상 살기 팍팍해서? 그것도 ‘로션 보드카 중독사태’를 해독하는 하나의 힌트인지도 모르겠다. 혹시 ‘공공의학’ 혹은 ‘공익의학’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영역이 있다면 아마도 그 영역에서 첫손 꼽힐 미국 의사 폴 파머. 그는 <권력의 병리학>에서 소련이 무너진 뒤 텅 비어가는 콤비나아트들을 찾아가보고 의료체계가 무너진 뒤 러시아에서 다제내성 결핵환자들이 늘어나는 메커니즘을 드러내보였다.


러시아에서 가짜 보드카 때문에 중독자들이 숨진 사건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문득 떠오른 이름이 있었다. 로텐베르크.


2014년 3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하자,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측근들을 제재했다. 그 면면이 호화로웠다. 푸틴의 돈지갑이라 불리는 석유회사 로스네프트의 이고르 세친은 대표적인 ‘크렘린 이너서클’ 멤버다. 방크로시야(러시아은행)의 유리 코발추크도 당연히 제재 대상자 명단에 끼어 있었다. 석유수입회사 군보르의 소유주인 겐나디 팀첸코의 이름도 빠질 리 없었다. 


푸틴의 이너서클...그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이들에 더해, 제재 명단에는 아르카디 로텐베르크와 보리스 로텐베르크도 포함됐다. 두 사람은 형제다. 로텐베르크 형제는 푸틴의 측근 중에서도 최측근이다. 푸틴이라는 ‘차르’를 중심으로 구성된 크렘린 이너서클을 가리키는 말 중에 ‘유도크라시(Judocracy)라는 게 있다. 뷰로크라시(관료주의 체제)가 아닌 유도크라시, 다른 게 아니라 푸틴이 어릴 적부터 유도를 함께 했던 친구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푸틴은 집권 뒤 자기 친구들 사업에 이권을 몰아줬다. 2004년에는 가스프롬의 보험회사 지분을 방크로시야에 넘겨줬는데, 앞서 말한 코발추크가 경영하던, 당시만 해도 듣보잡 수준이던 은행이었다. 푸틴은 정치적 라이벌이던 호도르코프스키가 운영하는 유코스를 공중분해시켜 그 자산을 이고르 세친의 로스네프트에 넘겼다. 로스네프트는 그러고 나서 석유거래 계약들을 군보르의 팀첸코에게 몰아줬다. 그리고 팀첸코는, 로텐베르크 형제의 야와라-네바(Yawara-Neva) 유도클럽을 후원했다. 푸틴이 명예회장을 맡고 있던 클럽이었다(굳이 덧붙이자면 로텐베르크 형제는 푸틴과 유도뿐 아니라 아이스하키도 함께 했다).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 


여기서 보드카가 등장한다. 푸틴은 2000년 취임하기 직전에 로스스피르트프롬(Rosspirtprom)이라는 국영회사를 만들었다. 술 회사다. 수십 개의 보드카 제조공장을 통합해 정부가 지배권을 가졌다. 명목은 주요 산업의 ‘대표 회사’를 만들어 경쟁력을 키운다는 것이었다. 이 회사 경영을 맡았던 것이 아르카디 로텐베르크였다. 이 회사는 순식간에 러시아 전체 주류 시장의 절반을 장악했다. 푸틴 첫 임기 끝무렵인 2004년에는 이 회사가 러시아의 ‘합법적인’ 보드카 시장의 45%를 점유하고 있었다. 로스스피르트프롬은 여러 증류공장들을 집어삼켰는데, 그 중 하나인 모스크바의 유서 깊은 크리스탈 증류소에서는 ‘푸틴카’라는 이름의 보드카도 나왔다. 


미국 뉴욕타임스 모스크바 지국장을 지낸 스티븐 리 마이어스가 지은 블라디미르 푸틴 평전 <뉴 차르>에 따르면 “당국은 철저한 규제 장치를 도입하고, 경쟁 업체들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는 식으로 이들을 도왔다.” 특히 푸틴 정부가 2006년 만든 규제법안이 로스스피르트프롬에는 큰 힘이 됐다. 정부는 주류 소매상에 인지세를 부과하고, 생산시설을 모니터링하고, 주류 암시장을 단속했다. 명분은 그럴듯하다. 


푸틴과 아르카디 로텐베르크. Photo: Sasha Mordovets/Getty Images


이렇게 해서 푸틴의 유도 파트너였던 로텐베르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별 볼 일 없던 사업가에서 일약 러시아 보드카 제국의 황제가 됐다. 러시아 정부 입장에서 보드카는 매우 매우 중요하다. 옛 소련 말기인 1980년대 후반에 소련의 재정수입 중 보드카에서 나오는 세입이 4분의 1이나 됐다. 1990년대 말까지도 단일 품목으로는 러시아 재정에 가장 크게 기여를 하는 게 주류였다. 그리고 주류 시장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게 보드카였다. 


2014년 2월, 우리에겐 김연아가 아쉽게 금메달을 빼앗긴 것으로 기억될 소치 동계올림픽. 이 올림픽 준비 과정은 어마어마한 부패로 유명했고 그 때문에 대회 준비 비용이 500억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액수로 치솟았다. 소치 올림픽과 관련된 계약 중 70억 달러는 바로 아르카디 로텐베르크에게로 흘러갔다. 로텐베르크의 제국은 이제는 술 생산과 판매를 넘어 금융과 가스관 설립 등 전방위로 커져 있었다. 강화된 주류산업 감독법 때문에 그의 회사가 세금을 못 낼 위기를 맞자 푸틴은 국영 V.T.B.(VneshTorgBank)를 시켜 50억루블 규모의 구제금융까지 내줬다. 언제나 그렇듯, 이 은행의 이사회장은 푸틴의 측근이던 알렉세이 쿠드린 당시 재무장관이었다. 


2010년 소치 올림픽 계약이 문제가 됐을 때, 러시아 언론 코메르산트가 로텐베르크를 인터뷰했다. “야와라-네바 클럽의 명예회장인 푸틴과 친했던 당신, 이제는 어마어마한 자산을 가진 기업가가 됐다. 이것이 우연인가?” 로텐베르크의 답변은 “높은 사람을 알고 지내는 것이 이 나라에서 사업하기 위해 꼭 필요한 측면이 있으나, 그것이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시 이르쿠츠크가 있는 시베리아로 돌아가자. 좀 오래 지난 것이기는 하지만, 의학전문지 랜싯에 실린 연구결과가 있다. 1990~2001년 사이 시베리아 산업지대의 15~54세 주민 중 알콜 남용에 따른 질병으로 숨지는 사람 수가 52%나 늘었다고 했다. 이번 ‘로션 알콜’ 사건 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는 러시아 전역에서 알콜이 들어 있는 액체 상품의 판매현황을 일제 점검하라고 지시했단다. 그런데 1년 전에도 메드베데프는 똑같은 지시를 내렸다. 


재정을 채워주던 기름값이 떨어지자 러시아 정부는 소비세를 올리고 있고, 술 값도 올라가고 있다. 지난해 10월 모스크바타임스에 인용된 한 관리의 말을 빌면 “평균임금과 비교해 보면 러시아의 술값은 다른 나라의 5~8배”다. 보드카 1리터 값은 몇년 새 두 배로 뛰어 220루블에 이르렀다. 고작 3000원 좀 넘는 돈이지만, 이조차 내기 힘든 사람들이 로션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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