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딸기의 하루하루

집을 열어두고

딸기21 2004. 1. 9.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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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열어두고 살고 있다.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
마고가 자기 홈에다가, "딸기언니가 없어도 홍제동 문은 열려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건 바라던 바다(가 아니고 실은 아무 생각 없음). 암튼 집에 문이 달린 것은 드나들라고 달린 게 아니겠느냐고. 모든 문은 드나들어야 문이다. 집이 무슨 '비밀의 화원'도 아닌데 잠가둘 필요는 없지. 아무리 울집에 금송아지 물방울다이아가 쌓여있기로소니, 비밀 금고에 깊숙이 묻어둔 이상 마고 아니라 마고할미라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누가 와서 훔쳐가겠느냐고. 그러니 집은 그냥 열어두는 것이다.

집을 쉽게 열어준다는 점에서, 난 항상 그랬던 것 같다. 어렸을 때야 뭐 마당 있고 대문 있었지만 쪼마난 동네에서 다들 그렇게 지냈었다. 조금 자라서는 아버지가 큰 집을 지어서 위층에는 세를 주시고 아래층에 우리가 살았는데 대문은 잠글 수 있었지만 정작 현관은 우스꽝스러웠다. 밖에서 잠글 수가 없는 현관이었던지라 사람이 안에 들어가 있으면 잠글 수 있고 식구들 모두 밖에 나갈때는 열어둬야 했다. 엄마도 아빠도 "울집에 훔쳐갈 게 뭐가 있다구" 이런 식이었다. 
비단 자물쇠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학교 때 한동안 큰집 식구들이랑 살다가 또 그 다음에는 작은집 식구들과 같이 살았다. 엄마의 제자인 언니가 몇달씩 기거하기도 했고, 아버지 먼 친척 조카뻘되는 총각이 얹혀살기도 했다. 대학교 때에는 우리가 외가에 가서 얹혀살았고, 대학 3학년 때부터 나는 집을 나와 친구들이랑 살았다. 그러니 얼마나 방탕했으랴! 집은 거의 여인숙 수준이었고 나는 돈 안받는 여인숙아줌마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결혼하고 나서도 회사 사람들이 꽤 자주 왔었다. 주로 미혼의 여자분들이 하루씩 묵었다 가곤 했는데, 늘상 있는 일은 아니었고 어쩌다가 술마시면 우리집에 왔었다. 아파트로 이사온 뒤에도 손님행차는 여전했다. 울집이 회사에서 가까운 탓에 사랑방 노릇을 많이 했다. 기본적으로 내가 워낙 손님치레 부담 안느끼는 인종이어서(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와나캣류의 인종들이 충분히 증언해놓았다) 그랬던 것 같다. 회사 동료들에게 안방 공개하기가 보통 껄끄러운 게 아니라고 남들은 그러는데 나는 어찌된 것이 뻑하면 "울집에 오세요"다.
한동안 울집을 제집 드나들듯(본인의 표현으로는 '쥐 방구리 드나들듯') 하던 식객들이 있었는데, 얼마전서부터 그거이가 딸기마을로 옮아갔다. 너그럽고 치마폭넓은 딸기여인숙에 집단투숙 내지는 장기투숙한 인물들이 여럿 있으니 말 안해도 알리라.

나는 왜 나한테 그런 경계심이 없는지 모르겠다. 바보 아닐까? 남들은 뭔가 가린다는데 나는 가릴줄 모르니. 게다가! 남의집에 가서도 내집처럼 잘 지내니 참 편하고 좋다. 오호, 나는 바보가 아니라 방랑자였던 것이냐. 아무튼 뻔뻔한 것만은 틀림없어보인다. 속도 편하지. 다들 이렇게 살아보세요, 얼마나 속이 편한데. 심지어 써니언니네 집에만 가면 벌레처럼 뒹굴거리며 자다먹다를 반복하니, 은혜로운 시절이다. 
네 개의 벽과 기둥이 지붕을 덩그러니 받치고 있다고 해서 모두 집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지붕을 올리고, 벽돌을 쌓아올렸다고 모두 집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했다. 그 공간에 대한 추억과 애착만이 그것을 진짜 집으로 만들어주며 그곳에 담긴 인간의 영혼을 보호해준다고 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감정의 풍요로움을 제공해줄 수 있는 집, 그래서 인간의 마음 속마다 고향과 같은 따스함, 샘물과 같은 신선함을 불어넣어주는 집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집이라고 했다. 생텍쥐페리라는 사람이 그럴싸하게 써놓은 말인데, 이름에 '생' 같은거 들어가는 사람 치고... 멋진 말 한마디씩 안 남긴 인간이 없는 것 같다. 앞으로도 내 집은 열려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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