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딸기의 하루하루

피해다니기

딸기21 2001. 5. 13.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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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하는 얘기지만, 그리고 결코 자랑은 아니지만 언제나 자기방어를 잘 한다고나 할까.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그저 스스로 마음 편하기 위한 기제들을 잘 만들어놓고 있다는 얘기다. 내가 '여우의 신포도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덕택에 언제나 '미련'이 없다. (좀 '미련'하기는 하지만^^) 
돈들여 가방을 산 뒤에는 다른 가방 가게 앞을 지나가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내가 산 가방이 제일 예뻐보인다. 사람이니까, 언제나 '선택'을 해야 하는데 늘상 남보다 쉽게 선택을 하고도 여간해서는 후회를 하지 않는다. 내가 태어났을 때 별로 가진 것(이쁜 얼굴 같은 것^^)이 없어 보여서 하느님이 선물로 그런 남다른(?) 능력을 주셨는지도 모르겠다. 

사는 게 재미있냐고 사회생활 선배들이 종종 나에게 물어보는데 대부분의 경우 재미가 '없지는' 않다. 

며칠 전, 일본에 있는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별 일 없냐? 재밌어? 
무슨 말인지 안다. 얼마 전 우리 회사 사장이 바뀌었고, 나름대로 회사 내에서 '정치'가 굴러가고 있을 즈음이다. 별로 해 줄 말이 없는데다 주변에 듣는 귀들이 많아서 별일 없어요, 저야 잘 지내는데 뭐, 이따가 다시 한번 전화해 주세요, 선배. 

뿐만 아니라 실제로 나는 '대부분의 경우' 재미가 있다. 말하자면 '신포도 정신'이 낙관론으로 승화한 셈인데. 이건 정말 편할 때가 많으며, 응용의 길도 참으로 다양하다. 대전에 갔을 때 친구와 커피숍에서 만났는데 집을 찾아갈 수 있겠느냐고 친구가 나에게 물어봤다. 그야 뭐. 아파트 단지 바로 앞인데, 몇동 몇호 찾아가기가 뭐 그리 힘드냐고, 아무리 헤매봤자 30분이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넌 참 좋겠구나...그러는거다. 

그런데 신포도 정신은 사실 편하긴 하지만 가치판단을 해보자면 결코 '옳은' 것은 아닌 듯하다. 언제나 피해다닐 수가 있다. 내 선택의 잘잘못에 대해, 내가 지금 제대로 잘 살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 묻는 내 마음속의 질문에 맞서서 '늘 그렇지 뭐, 100% 되는 것도 0%로 안 되는 것도 없어, 한번 결정했으면 받아들여야지 어쩌겠어' 이런 식으로 대답을 해나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찰나의 즐거움과 마음편함에 안주했던 대가를 치르게 되는 날이 언젠가는 딸기에게 닥치고야 말리라. 
그다지 교활하지도 못하면서 표피적으로만 여우같은 나에게 함정이 되어 다가올 것이다. 철렁! 

후회한다는 것은 과거를 반성한다는 것이고, 뉘우친다는 것일텐데 내게는 과거를 반추해보는 거울이 없다. 신포도를 포기하고 즐거워하는 데에 급급한 나머지 곱씹는 胃, 회고의 능력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신포도마냥 포기해버린 것은 거울 뿐이 아니다. 나의 마음을 편케 해주는 또하나의 이즘, 테일러주의. 기능적인 자본주의를 만들어준 테일러가 아니고 '무책임함장 테일러'에 나오는 테일러의 정신. 어, 나 원래 그래, 이것 저것 다 책임지고 어떻게 살아, 착한 여자 콤플렉스가 제일 싫어, 살다보면 욕먹을 수도 있고 싸울 수도 있는거지. 

그러다보니 정말 갈수록 무책임해지고 그러면서도 마음은 得道의 상태가 됨을 느끼고 있다^^ 
뉘우침 없는 '자기선언'은 나를 둘러싼 철갑이다. 
이제 나는 뻔뻔함으로 외피를 두른 철갑상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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