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동유럽 상상 여행

9. 비잔틴에 도전한 불가르 족의 나라, 불가리아

딸기21 2012. 9. 4. 13:33
728x90

9. 8~10세기 불가리아의 흥기


불가르족이 서쪽으로 밀려들어와 오늘날의 동유럽에 한 자리 차지하고 비잔틴에 맞섰다는 것이 몇백년 간의 스토리였고요. 불가르족은 681년 비잔틴 제국과 조약을 맺어 발칸 산맥 북부와 다뉴브 강 남쪽의 땅에 대한 통치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불가르의 칸(지배자)들은 수도인 플리스카에 머물며 새로 얻어낸 영토에 살고 있던 슬라브계 원주민들을 통치했습니다. 새 영토는 왈라키아를 비롯한 다뉴브강 북쪽 지역에서 북서쪽 유라시아 스텝 지대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9세기가 시작될 무렵의 불가리아 지도입니다. '불가르 칸국'이라고 돼 있네요. 
서쪽에 아바르 칸국, 동쪽에 카자르 칸국 등등이 보입니다. /위키피디아


건국 영웅 아스파루흐의 후계자들인 불가리아(‘1차 불가리아 제국’이라고도 부릅니다)의 왕들은 비잔틴 제국을 잘 이용해 발칸 반도 내에서 영토를 계속 넓혔습니다. 절친한 사이였던 불가르 왕 테르벨(Tervel·701-718년 재위)과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2세(705-711년 재위)의 예에서 보이듯, 두 나라 지도자들은 전쟁에서나 당국간의 평화적 협력에서나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곧 판도가 바뀝니다. 비잔틴이 '변방의 외적들'과 친하게 지냈다는 것은, 그만큼 힘이 약해졌다는 뜻입니다. 이 변방의 부족들이 세운 나라가 어느새 비잔틴을 턱밑에서 위협하게 됩니다. 9세기 초반 크룸(Krum·808-814년) 황제 시대가 되자 불가리아는 북으로는 대모라비아와 맞닿은 지역까지 손에 넣었고, 남쪽으로는 비잔틴 제국을 강력하게 위협하는 세력으로 떠올랐습니다.


★불가르의 칸국(汗國)


대족장 쿠브라트 Kubrat 는 불가르족을 하나로 통합하고 605년 경 대(大)불가리아로 알려진 칸국을 세웠으나 쿠브라트가 죽자 다섯 아들이 각기 갈라져나갔습니다. 맏아들은 하자르족에 흡수됐고 넷째 아들은 아바르족에, 막내아들 세력은 게르만계 랑고바르드족 왕국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둘째 아들인 바트바얀 Bat-Bayan 은 하자르족의 공격을 피해 볼가 강 유역에 정착한 뒤 ‘볼가 불가리아’로 알려진 나라를 세웠습니다. 볼가 불가리아는 13세기 초까지 번영을 이루다가 몽골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습니다.


803년 다뉴브 분지에서 아바르족을 몰아낸 크룸은 808년에는 불가리아의 황제가 됐습니다. 전제군주를 지향했던 크룸은 집권하자 발칸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비잔틴 제국에 맞선 전면전을 시작했습니다. 

전쟁 초반에는 그의 군대가 밀리는 것 같았지만 결과는 그의 승리였습니다. 811년 불가르 군대는 니케포루스1세(Nicephorus I·802-811년 재위)와 그가 이끄는 비잔틴 군을 몰살시켰습니다. 크룸은 니케포루스1세의 두개골을 가져다 은으로 장식한 뒤 제의용 잔으로 썼다고... 


그 후 2년에 걸쳐 크룸은 비잔틴 제국 군대에 연달아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고 흑해 연안에서 비잔틴 세력을 쓸어냈습니다. 크룸의 군대가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 성벽 바로 앞에까지 밀어닥치자 비잔틴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크룸은 발칸 중부와 동부로 불가리아의 영토를 넓히고 비잔틴 도시였던 소피아도 손에 넣었습니다.


1917년에 그려진 회화. 크룸과 그의 군대. /위키피디아



크룸의 뒤를 이은 계승자들은 발칸 중부와 동부에서 정복전쟁을 벌이기 전에 비잔틴 제국과 평화조약을 맺어 새로운 영토에 대한 통치권을 다졌습니다. 보리스1세는 860년 크로아티아 북서쪽 국경지대에서 게르만계와 세르비아계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지만 서쪽으로 국경을 확장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당시 게르만계와 세르비아계는 불가르의 직접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보리스는 또 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를 불가리아 제국의 행정 중심지로 만들었고 남쪽으로는 트라케를 확보, 에게 해에 이르는 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보리스가 한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투르크계와 슬라브계가 뒤섞여 있던 불가리아인들을 정교로 개종시킨 것이었습니다. 이 개종으로 해서 슬라브어 체계는 오늘날과 같은 역사적, 문화적 연속성을 갖게 됐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크룸과 보리스의 통치를 통해 불가르 국가가 방대하고 중앙집권화된 전제정치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누구보다 잘 보여줬던 것은 보리스의 뒤를 이은 시메온1세였습니다. 


불가리아 제국은 그의 치하에서 정점에 이르러 크로아티아, 테살로니키, 그리스, 트라케와 콘스탄티노플을 뺀 발칸 반도 거의 전역을 지배했습니다. 그는 모라비아 망명객들이 프레슬라프에서 불가리아 학생들에게 키릴 문자를 가르치도록 후원했습니다. 시메온은 어릴 적 비잔틴 제국에 인질로 끌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교육을 받은 바 있다고 합니다. 키릴 문자체계의 탄생은 중세 슬라브 문화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죠. 시메온의 통치기는 불가리아 제국의 ‘황금기’로 불립니다.


시메온도 크룸처럼 끊임없이 비잔틴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시메온은 즉위 이듬해인 894년 경험 많고 단결력 강한 정예부대를 동원해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발칸 반도 대부분을 빼앗았습니다. 불가리아의 막강한 군사력에 밀린 비잔틴 제국은 불가리아 교회의 자치를 사실상 인정해주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에 종속돼 비잔틴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었지만 불가리아 교회는 오흐리드에 본부를 두고 독자적인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크룸 황제가 넓혀놓은 불가리아 지도...



불가리아의 왕은 비잔틴 황제를 제외하면 발칸의 최고 지배자였습니다. 913-924년 시메온은 네 차례에 걸쳐 콘스탄티노플까지 군대를 보냈으며 924년에는 자신이 로마인들과 불가리아인들의 ‘차르’ 즉 황제라고 선언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지는 못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한때 그의 손에 넘어가기도 했으나, 난공불락의 성벽 덕택에 간신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시메온은 남쪽에서 비잔틴을 상대로 벌이면서 다른 국경지대의 군사적 현안들도 함께 처리해야했습니다. 비잔틴 측은 917년 발칸 반도의 슬라브인들과 스텝 지대 투르크계 부족들을 꾀어 불가리아에 반기를 들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메온은 두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해야 했고, 이는 불가리아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스텝에 살던 투르크계 마자르족은 판노니아까지 이어지는 다뉴브 북쪽 땅을 불가리아에서 빼앗았습니다. 


역시 비잔틴의 선동에 말려든 세르비아계도 918년 불가리아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924년 시메온은 대군을 이끌고 불가리아 국경 밖에 있던 세르비아 땅까지 공격, 초토화했습니다. 비잔틴은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메온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발칸의 중부와 남부에서 불가리아 세력을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제국의 황제는 못 되었지만 지역 내 패권을 휘두른 지배자였던 시메온은 927년 숨을 거뒀습니다.



본문과 전혀 상관없는... 불가리아 소피아의 알렉산데르 네프스키 성당. 사진 www.siab-bg.org



불가리아가 슬라브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시메온의 군사적, 문화적 업적 덕분이었죠. 하지만 이 지배권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불가리아의 패권은 시메온 사후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이 동네 역사를 들여다 보면, 왕국이 워낙 자주 들어섰다 망했다 합니다... 전성기라 해야 세 명의 왕 이상을 버티지 못한다 할까. 10세기가 끝날 무렵 불가리아는 러시아와 비잔틴의 침략에 밀리기 시작했고 1018년에는 결국 무너졌습니다. 이후 167년 동안 불가리아는 비잔틴 제국에 병합됐습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