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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인종차별

from 딸기피디아 2010/07/16 10:56

 

스티븐 로런스 Stephen Lawrence (위 사진) 는 18세의 흑인 학생이었는데, 1993년 4월 22일 저녁 런던 남부 엘덤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백인 젊은이 5명에게 흉기로 찔려 죽었다. 하지만 경찰은 범인들을 모두 붙잡아 놓고도 아무도 기소하지 않았다.

(나중에 기소가 됐지만 2명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들에 대해서는 최근까지도 '새로운 DNA 증거들에 따라 재판을 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http://www.telegraph.co.uk/news/uknews/1580128/Could-DNA-reopen-the-Stephen-Lawrence-case.html)




파장이 계속되자 99년 윌리엄 맥퍼슨 William Macpherson 이 이끄는 ‘맥퍼슨 위원회’가 만들어져, 당시의 사건과 이후의 수사과정에 대한 총체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위원회는 로런스 살인사건이 철저하게 인종적인 동기에 의해 이뤄진 범행이었으며, 소년은 단순히 흑인이라는 이유로 희생됐음을 밝혀냈다. 또한 경찰의 수사·불기소 과정에서도 인종차별적인 요소들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맥퍼슨은 보고서에서 런던 경찰청을 ‘제도적인 인종주의자 institutionally racist’라 규정하면서 “이 사건은 현대 영국의 형사 정의의 역사에 남을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 [배정원의 영국보기] 흑인이 재무장관에 임명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1167


브릭스턴 폭동 Brixton riots

런던의 브릭스턴은 아프리카-카리브계 주민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주거환경이 열악하고 실업률이 높은데다 범죄가 많았다. 1981년 4월 초 런던 경찰청은 ‘늪지 작전 81 Operation Swamp 81’이라는 이름으로 브릭스턴에서 범죄 소탕작전을 시작했다.
경찰은 범죄자라고 단순히 의심만 되는 상황이어도 시민들을 검문검색할 수 있게 한 이른바 ‘의심법 sus law’(http://en.wikipedia.org/wiki/Sus_law)을 남용, 닷새 동안 주민 943명을 검문하고 118명을 체포했으며 그 중 75명을 기소했다. 이에 반발한 주민 5000여명이 폭동을 일으켜, 경찰 279명과 시민 45명이 다쳤다. 차량 100대 이상이 불타고 건물 150여채가 손상을 입었으며 30채는 불탔다. 폭동 뒤 82명이 체포됐다. 



레슬리 스카먼 Leslie Scarman 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위원회는 그 해 11월에 이른바 ‘스카먼 보고서’로 알려진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브릭스턴 폭동을 ‘명백히 인종차별적으로 진행된 검문검색과 체포 때문에 일어난 우발적인 폭동’으로 규정하면서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요인들이 폭력적인 저항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인종적인 불리함 때문에 브릭스턴이 쇠퇴를 겪어왔음을 지적하면서 ‘인종적인 불리함이 광범위하고 피할 수 없는 질병이 되어 우리 사회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게 되는 것을 막으려면 시급한 행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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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의 한적한 교외. 주택가 공터에서 공을 차는 소년들의 꿈은 한결같이 위르겐 클린스만, 로타어 마테우스같은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감히 ‘황제’ 프란츠 베켄바워를 꿈꾸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바뀌었다. 요사이 독일 소년들의 이상형은 루카스 포돌스키와 메주트 외칠이다.


독일 축구가 달라졌다. 잉글랜드를 4대1로 누른 데 이어 우승후보 아르헨티나를 4대0으로 완파했다.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 나타난 독일팀은 조직력과 힘, 큰 키를 앞세우던 이전의 전차군단이 아니었다. 환상적인 공격력에 예술성까지 더해졌다. 독일 국가대표 축구팀의 진화를 가져온 것은 ‘유전자의 변화’였다. 외신들은 4일 ‘게르만 축구’를 버리고 ‘다문화 축구’로 한차원 업그레이드된 독일 축구팀을 통해 독일 사회 전반의 변화를 분석한 기사들을 일제히 실었다.
변화가 시작된 것은 1999년 정부가 ‘독일 국적의 부모에게서, 독일 땅에서 태어난 사람만 국가대표가 될 수 있다’는 규정을 없앤 것이었다. 과거에도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외국계 선수들은 많았으나, 90년대까지만 해도 이들은 돈벌이 하러 온 이주노동자들을 가리키는 가슈타르바이터(Gastarbeiter·초청 노동자)로 불렸다.

대표팀의 ‘순혈주의’ 규정을 없앤 후 10여년이 흐르면서 독일 언론들이 ‘M(Multicultural) 세대’라 명명한 새로운 세대가 자라났다. 2002년 미로슬라프 클로제라는 스타의 탄생은 그 결실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리고 2006년, 클린스만 감독 하의 독일 팀은 이미 변화해 있었다. 포돌스키의 활약을 필두로 한 ‘공격축구’는 새로웠다(몇 해 전만 해도 독일 국대의 아이콘은 올리버 칸이었고, 독일 축구는 재미가 없었다. 내가 독일 축구를 좋아하게 될 줄이야!).
이번 월드컵에서 독일 대표팀은 실력에서나 구성에서나 ‘다문화 축구’의 완성판을 보여줬다는 평이다. 대표팀 스쿼드 23명 중 11명이 ‘M 세대’로 이뤄져 있다. 클로제와 포돌스키, 표트르 트로코프스키는 잘 알려진대로 폴란드계 이민자 가정 출신이다. 외칠은 터키, 제롬 보아텡은 가나(형인 케빈 프린스 보아텡은 이번 월드컵에서 가나 대표팀 선수로 뛰었다), 카카우는 브라질, 자미 케디라는 튀니지계다. 데니스 아오고는 나이지리아계 혼혈이고, 세르다르 타쉬는 외질과 마찬가지로 터키 피가 흐른다. 마르코 마린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그라디슈카에서 태어났고, 마리오 고메스는 아버지가 그라나다 출신 스페인계다.

어떤 이들은 독일 대표팀을 “히틀러가 보았다면 깜짝 놀랐을 외인구단”이라 평하기도 한다. 극우파들의 반발도 없지 않다. 일부 우익사이트들은 현 대표팀을 맹비난하면서 ‘게르만 축구팀’으로의 복귀를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이번 대표팀의 성공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인정해주고 있다고 빌트 등 현지언론들은 전했다.


클로제는 진정한 스트라이커다. 비록 2002년 사우디전 때 해트트릭으로 ‘호나우두 대기록에 도전’하고 있지만,
골문 앞에서 클로제의 감각을 누가 따라올 것인가. 내친 김에 우승까지 해서, 기록 갈아치우길. 폴짝. |AP


좋아하는 메르켈 독일 총리. 메르켈이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은 참 드문 것 같은데... |REUTERS


이민자들은 ‘다문화 축구’의 성공이 사회 전반의 관용과 다문화주의의 수준을 더 한층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베를린 교외에서 스포츠용품점을 운영하는 터키계 이민자 메흐메트 마투르는 알자지라방송 인터뷰에서 “새로운 영웅들 덕에 독일 사회가 이민자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더 긍정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베를린자유대학의 페터 발슈부르거 심리학교수는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독일인들과 이민자들 사이의 정서적 교감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레바논계 이민자 유세프 바살은 AP통신에 “이제야 독일 국기에서 슈바슈티카(나치 십자문양)가 사라진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축구경기 한번으로 사회통합이 이뤄질 것이라 기대할 수는 없다는 지적도 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축구대표팀을 가리켜 “(사회적) 통합의 롤모델”이라 칭찬했다. 그러나 지난달 말 메르켈이 이끄는 우파 기독민주당의 몇몇 의원들은 “이민자들에게 지능테스트를 해야 한다”는 인종주의적 주장을 서슴지 않았다. 외칠의 ‘순수 독일인 여자친구’ 안나 마리아 라거블롬이 얼마 전 외질을 따라 이슬람으로 개종하자 독일 언론들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국들 중엔 대표팀을 이미 이민 2세대 출신들로 바꾼 나라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독일 M세대의 경우 옛 식민지 출신 선수들을 대거 영입한 이웃나라들과 달리 최근의 이주노동자 가정 출신들이라는 점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극우파들의 반발이 반 이주노동자 감정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AP는 “여전히 애국주의는 독일에서는 민감한 이슈”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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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 우루과이의 수아레스는, 최악이었다.
축구광분당원으로서... 그따우 행동은 첨봤다.
선수들이 흥분하여 쌈질을 할 수도 있고 침을 뱉을 수도 있고 욕을 하고 박치기를 할 수도 있지만,
골대 앞에서 '배구'를 하다니. 그런 악질적인 핸들링은 처음 본다.
FIFA가 상벌위원회를 열었는데, 겨우 1경기 출장정지인 모양이다. 말도 안 된다!

* 브라질은 브라질로 돌아가길.
둥가 감독의 '실리축구'는 실리도 못 챙기고 재미도 못 챙긴 축구였다.
예선전, 16강전 때만 해도 브라질의 '더욱 강해진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브라질마저(!) 수비를 강화, '이기는 축구'를 하려 한다는 것이 씁쓸했다.
브라질이 그럼 안 되지... 그건 축구팬들에 대한 배신이지...
결과는 씁쓸을 넘어 우스꽝스럽다.
뭥미, 브라질. 우째 독일보다도 공격성, 예술성, 창의성이 떨어지니...
호나우두-히바우두 시절이 그립다 -_-

* 스페인, 잘 해라.
독일 팀이 잉글랜드를 4대1로 깨고(비록 잉글 한 골 도둑맞긴 했지만) 아르헨을 잡으면서 즐거움을 주고 있으나
그걸로는 모자란다, 이번 월드컵. 스페인의 건투를 빈다.
'남미 스타일 축구'를 선보일 수 있는, 유일한 유럽팀 아니겠슴둥?
(아르헨 브라질이 죽을 쑤니 여기다가 애먼 기대를 걸고 있음;;)
토레스가 제발 살아나야 할텐데... 골이 터져야 할텐데... Again Euro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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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거리’로 알려진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이태원 지구대 뒷골목. 지난 3월 이 곳의 한 아프리카 식당을 찾았다. 한국에서 먹기 힘든 플랜틴(바나나튀김)과 병아리콩 스튜를 팔고, 위성TV로 나이지리아 드라마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식당 안에서는 나이지리아인들이 우르르 몰려 브라운관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종업원들도, 손님들도 모두 나이지리아인이다. 아프리카인들이 모이는 곳으로 ‘한국인’이 찾아왔다는 것에 오히려 그들이 호기심을 느끼며 신기해하는 눈으로 바라봤다.

지난 24일 이 곳을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취재진임을 밝히자 종업원들과 손님들, 길 밖에 모여 떠들고 있던 아프리카인들의 태도가 갑자기 싸늘하게 바뀌었다. 메뉴를 가져다주었던 여성 종업원은 부엌 안으로 들어가버렸고,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젊은 남성도 “직원이 아니다”라면서 취재진을 몰아내려했다. 어렵사리 한국인 식당 주인과 전화 연결이 되었지만 주인은 “아무 것도 말해줄 수 없다, 우리 식당에서는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말만 했다.

식당 윗골목에 있는 레게 미용실. 아프리카인들은 곱슬머리를 그대로 두면 피부 속으로 파고들기 때문에 짧게 밀거나 펴서 고정을 해야한다. 그들을 위해 서울 안에도 그들만의 미용실이 생겼다. 미용실 안에서는 아프리카인 여성 미용사가 손님들의 머리를 말아주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인이 들어가자 겁을 먹은 듯했다. 그 곳에 있던 남성은 “보스(사장)에게 물어라,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면서 입을 닫았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이태원 지구대 뒷골목의 ‘아프리카 거리’.
이곳에는 아프리카인들이 자주 찾는 식당과 미용실 등이 모여 있다. | 김문석 기자 kmseok@kyunghyang.com



한달여 전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의 농촌을 찾았을 때, 현지 주민들은 한국에서 온 기자를 붙들고 “우리 딸이 한국에 가서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리도 한국으로 가고 싶은데 한국에 들어가는 비자를 받을 수 있느냐”고들 물었다. 그들에게 한국은 ‘가난에서 벗어난 꿈의 나라’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만난 얼마 안 되는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오히려 한국인들이 ‘도망치고 피해야 할 대상’으로 비치는 듯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한국이 아프리카 국가들의 미래의 모델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제로는 그들에게 닫혀있는 나라, 결코 문을 열어주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5월 한달 동안 행정안전부가 전국에 있는 외국인 거주자들의 실태를 조사해 ‘2009년 지방자치단체 외국인주민 현황조사 결과’라는 보고서를 냈다. 불법·합법 체류자를 가리지 않고 각 지자체 안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과 귀화자, 외국인 자녀 숫자를 조사한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내 외국인 수는 총 110만6884명이었다. 그 중 절반이 중국인(조선족 포함)이었고, 그 나머지도 아시아인이 대부분이었다. 아프리카인의 숫자는 따로 나와있지 않았다.
한 금융회사가 국내 외국인 중 고소득 전문인력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만든 외국인 현황 자료에는 나이지리아인 794명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인 225명이 통계에 잡혔다. 그러나 이태원에서 아프리카 식당을 운영하면서 무역회사 일도 겸하고 있는 나이지리아 출신 사업가에게 “나이지리아인이 얼마나 들어와있느냐”고 물었더니 “2000명,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0명은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통계청이 올 1월 조사한 ‘장단기 체류 외국인 현황’에 따르면 국내 체류 중인 아프리카인은 7191명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주민 숫자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불법체류자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아프리카 국가 출신들에게는 단순노동비자(E-9)를 발급해주지 않는다.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 관계자는 “한국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노동력을 받아들이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에 들어와 일하고 있는 아프리카인은 거의 다 불법체류자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예외가 있다면 남아공 출신의 백인 영어강사들이다. 남아공은 1994년 흑인정권이 출범한 뒤 흑인들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흑인경제력육성(BEE)’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과거 기득권을 누리던 백인들은 일자리를 잃고 우르르 유럽, 아시아 등지로 떠났다. 영어교육에 목숨을 걸다시피하는 한국도 그들의 ‘시장’ 중 하나였다. 한국 내 남아공인들이 인터넷 사이트 ‘페이스북’에 만든 클럽에는 800명이 가입했다. 그런데 한국은 이른바 ‘영어 네이티브 국가’ 출신들을 영어강사로 받아들이면서도 남아공을 제외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다른 ‘영어권 국가’ 출신들은 받지 않는다. 이 또한 ‘한국식 인종차별’의 한 모습이다.

한국에 와있는 남아공 출신들은 아프리카인으로서 한국을 어떻게 느낄까. 2006년부터 서울에 살면서 한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H씨가 지난해 겪은 일이다. 국내의 한 유명 일간지에서 H씨가 일하던 대학의 여름방학 영어교육프로그램을 취재하러 학교를 방문했다. H씨의 수업을 참관하고 인터뷰를 해 갔는데, 며칠 뒤 발행된 이 신문 기사에는 “금발에 푸른 눈의 미국인 강사가 수업을 하고 있다”고 쓰여있었다. H씨는 갈색 머리의 남아공 여성이다. 그는 “남아공 강사에게 대학생들이 영어를 배운다는 것을 한국의 언론은 받아들일 수 없었나보다”면서 씁쓸해했다.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인들이 받는 차별은 그보다 훨씬 클 것이 뻔하다.

구호기구 ‘피스프렌드’의 황학주 대표는 1992년부터 동아프리카 케냐, 탄자니아에서 구호활동을 해왔다. 그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국인들이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시각은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한다. “아프리카는 검고, 비가 안 오고, 못 살고, 그래서 열등하다는 시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그 사람들에겐 그들 나름의 완전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보다 못한 것도 있고 뛰어난 것도 있다는 점을 보지 않는다.”
심지어 아프리카를 이해하고 도우려 하는 사람들조차 편견에 사로잡혀있는 경우가 많다고 황 대표는 지적했다. 우리가 가진 많은 것들을 그들과 나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돕는다’고들 여긴다는 것이다. “나는 역설적이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이 많이 가 있는 나라가 좋은 나라라고 본다. 한국에 아프리카인들이 적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지구상의 가난한 이들이 가고파 하는 ‘좋은 나라’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한국은 주요20개국(G20)에 끼었다고 자랑하지 말고 큰 그늘을 가진 큰 나무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황 대표는 “적은 수의 아프리카인들이라도 이태원 같은 곳에 한데 모여서 어울려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문화적 다양성 측면에서라도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한국인들과 거리를 두고, 번번이 눈칫밥을 먹어야 하지만 그래도 이태원에는 아프리카인들이 모이는 교회와 식당과 가게와 미용실이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 거리가 있는 이태원1동과 한남동, 보광동 주변조차도 ‘뉴타운’ 건립계획에 따라 2017년까지는 모두 허물어질 예정이다. 


  구정은 기자 ttalgi21@kyunghyang.com




르완다 <암소은행> 방문기


“우리는 보통 아프리카가 전쟁 때문에 가난해졌다고 생각하는데, 가난 때문에 전쟁이 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난과 전쟁의 악순환을 끊어야 해요.”
지난 4월말 르완다 수도 키갈리에서 만난 비정부기구(NGO) 지구촌나눔운동의 지성혜 간사는 ‘암소은행’ 사업의 필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만성적인 빈곤을 끝내지 않으면 국가·종족 간의 분쟁이 생겨 생활기반과 생산시설이 파괴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지구촌나눔운동은 지난해 르완다에서 암소은행 사업을 시작했다. 키갈리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인 ‘최빈곤 지역’ 냐루바카 섹터 주민들에게 암소 구입비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르완다 정부의 ‘집집마다 암소 한 마리 키우기 캠페인’과 뜻이 맞아서 사업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르완다 정부는 고질적 영양실조를 몰아내려면 우유와 고기를 얻을 수 있는 암소를 보급해야 한다고 봤다. 하지만 주민들에게 암소는 ‘그림의 떡’이었다. 우량 암소 한 마리의 분양가는 한화 약 80만원이지만 이 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0달러에 불과하다.
몽골, 베트남에서 이미 가축은행 사업으로 성과를 거둔 지구촌나눔운동은 르완다 정부와 접촉해 암소은행 사업을 구체화했다. 영양실조 추방 외에 ‘소득증대’라는 목표가 추가됐다. 하루 평균 10리터 정도 생산되는 우유가 중요한 소득원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기금 마련을 위해 삼성의 후원도 받았다.
지난해 12월에는 첫 수혜자 12명을 선정해 암소 구입비를 전달했다. 수혜자는 암소를 키울 수 있는 능력과 대출금을 상환하겠다는 자립 의지를 평가해 선정했다. 돈만 지원해주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축산 세미나와 암소 건강상태 관리 등 후속 서비스가 계속 이어진다. 지구촌나눔운동은 암소은행 사업을 르완다 곳곳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
 
아프리카를 돕는 한국인들의 손길이 더디지만 늘어가고 있다. NGO 세이브더칠드런은 지난해 말리와 코트디부아르 등 아프리카에 총 17억1500여만원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유·무상 원조를 합한 우리 정부의 아프리카 지원 규모는 지난해 1억100만달러를 기록했다. 또 해외로 나가는 모든 여행객이 최빈 개도국을 돕는 데 동참하게 되는 ‘국제빈곤퇴치기여금’도 도입됐다. 국제선 항공권 1장을 구입할 때마다 1000원씩 적립된다.
그러나 현장에서 일하는 NGO 활동가들은 “아직 멀었다”고 입을 모은다. 지성혜 간사는 “우리 인식의 틀이 한반도에 국한돼야 할 이유가 없다”며 “시민의식에 기반해 아프리카인들과 나눌 때 우리도 그 속에서 같이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키갈리|이청솔 기자 taiy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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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모든 흑인들은 지금 매장을 떠나라!”

미국 뉴저지주 남쪽 워싱턴타운십의 월마트 매장. 지난 14일 이 곳에서 쇼핑을 하던 사람들은 매장 내 안내방송을 들으며 경악했다. 갑자기 한 남성의 목소리로 “모든 흑인들은 떠나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던 것이다. 1960년대 흑백 분리가 공공연히 이뤄지던 시절도 아니고, 사상 첫 흑인대통령까지 탄생한 마당에 흑인들에게 가게를 나갈 것을 요구하는 방송이 나오자 고객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아직까지 신원이 공개되지 않은 이 남성의 방송이 있고난 뒤, 월마트 직원이 다시 마이크를 잡고 매장 안내방송을 통해 사과를 했다. 하지만 파장이 수그러들지 않자, 결국 17일 월마트 측에서 공식 사과를 했다. 아칸소주 벤튼빌에 본사를 둔 월마트 측은 “그런 일은 우리도 용납할 수 없다”면서 누가, 어떻게 저질렀는지 조사하겠다는 성명을 냈다. 월마트는 인종 차별 기업, 이주노동자 착취 기업이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지난 몇년 동안 공을 들여왔는데 이번 일로 다시 이미지가 나빠지게 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매장 안에 있었던 소비자들과 흑인사회는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월마트 측이 문제의 남성이 누구인지, 월마트 직원인지 아닌지, 어떤 경위로 안내방송에 접근할 수 있었는지 등에 대해 사흘이 지나도록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월마트에서 쇼핑을 하고 있었다는 셰일라 엘링턴이라는 여성은 AP통신 인터뷰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인종 간 관용을 열심히 가르쳐왔는데 그런 방송이 나와 황당했다”면서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분명히 밝혀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엘링턴은 당시 함께 있었던 친구들과 함께 사건 경위가 밝혀지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있을 때까지 월마트를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월마트 전직 직원으로서 역시 같은 시간 이 매장에서 쇼핑을 하고 있던 흑인 남성 빌 미첼은 “방송을 듣는 순간 충격을 받았고 몹시 기분이 상했다”면서 “하지만 (월마트에서 일하는 동안) 더 심한 말도 많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소비자들이 분노하는 것은, 월마트가 소수민족과 유색인종 등 마이너리티에 대한 차별로 물의를 빚은 것이 한두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직원들이 흑인 손님들에게 모욕감을 주는 등 차별대우를 해 소송에 휘말린 것도 여러번이고, 그로 인해 회사 측이 거액의 보상금을 문 적도 많다. 지난해 2월에는 트럭 운전기사들을 고용하면서 인종차별을 해 제소되자 합의금으로 1750만달러(약 200억원)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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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벨기에, 이탈리아는 상대적으로 늦게야 아프리카 대륙에서 역할을 말았다. 가장 먼저 온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대부분 처음 자리 잡았던 해안 지대에 머물렀다.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 사람들만이 예외였다. 그들은 모국과의 결속을 끊고 스스로 ‘신에게 받은 권리’를 가진 흰둥이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여겼다.

프랑스가 1881년에 튀니지를 점령하자, 영국은 1년 뒤에 이집트를 집어삼켰다.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줄루족을 제압하는 동안 프랑스 장교들은 세네갈과 서부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들을 뚫었다. 독일은 마지막에 독일령 서아프리카(오늘날의 나미비아)와 독일령 동아프리카(오늘날 탄자니아)와 서부 아프리카에 있는 토고와 카메룬을 차지하였다.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는 벨기에령 ‘콩고공화국’을 선포하였다. 
혼란이 점점 더 커지자 독일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84 11월 15일 유럽 13개국 대표들을 베를린의 ‘콩고회의’에 소집하였다. 이 회의는 콩고 강 하구에 대한 포르투갈의 요구와 벨기에 왕의 콩고 분지에 대한 식민 정책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하여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완전히 나누어 갖는 계획으로 끝을 맺었다.

상대적으로 얼마 안 되는 유럽 사람들이 l억2,000만 인구를 가진 대륙 전체를 폭력으로 장악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노예 매매 시절에는 아랍과 아프리카와 유럽의 상인들 사이에 공조 체제가 있었고 수많은 아프리카 지도자들도 잔혹한 이익을 함께 취했던 반면, 이제는 이런 협동작업이 거의 필요 없었다.
유럽 사람들은 1500년 무렵에는 갖지 못했던 두 가지 이점을 확보했다. 1850년부터 의약품 키니네가 나와서 마침내 말라리아를 예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사망자 수를 80퍼센트나 감소시켰고, 열대 지방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밖에도 새로운 무기들이(예를 들면 1884년 이후에 나타난 기관총 같은) 개발되었다. 이런 무기들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팔지 않기로 1890년 브뤼셀에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합의를 보았다. 수단의 영국 장교들은 한 번의 전투로 1만800명의 아프리카 군을 죽였는데, ‘아군의 손실은 49명뿐’이었다고 열광에 넘쳐 보고하고 있다.

1904년 6월 ‘강경 진압’으로 유명한 독일 군의 로타르 폰 트로타 (Lothar von Trotha) 장군은 병사들을 동원하여 약 8,000명의 남자들과 1만6,000명의 어린이와 여자들이 모여 있는 워터버그 근처의 헤레로 진영을 포위하였다. 살아남은 헤레로족과 나마족 수천 명은 1905년부터 이른바 노동수용소에 감금되었으며,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1911년 인구 조사 결과 10만 명 중 7만 5,000명 이상의 헤레로와 나마 사람들이 독일의 종족말살 정책으로 목숨을 잃었음이 밝혀졌다. (나미비아)

문화적으로 보면 아프리카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8억 5.000만 명이 수천의 종족을 이루고 약 1000종의 공인된 언어를 말하며, 50개가 넘는 나라들에 살고 있다. 주민의 40% 이상이 이슬람교이며 50%가 기독교 그리고 나머지 10%가 전통 종교나 다른 종교를 믿고 있다.
이집트의 역사학도인 파티마(Fatima S.)는 이렇게 말한다. “식민지배는 아프리카를 나누었다기보다 오히려 잔혹하게 통합하였다. 1만 가지의 독립적인 개체들이 합쳐져 50개의 국가가 되었으니 말이다” 영국 인류학자 존 리더(John Reader)는 이를 보충하는 발언을 한다. “외부 세력의 영향 이전 아프리카에 분명히 존재했던 방식, 곧 국가를 이루지 않고 작은 사회로 나뉘어 평화롭게 공존하는 생활방식이야말로 아프리카가 인류 역사에 공헌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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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초의 흑인대통령이 탄생한지 1년이 돼가지만 미국 내 인종차별과 흑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사라지려면 훨씬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미국 민주당의 유력인사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피부색을 거론하며 ‘니그로’라는 비하적인 말을 쓴 사실이 드러났다. 정치적으로는 금기시되지만 여전히 백인들의 머리에 박혀 있는, 이른바 ‘N단어(N-word)’ 문제가 다시 물위로 떠오르고 있다.



문제 발언이 정치적 우군인 해리 리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사진)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더욱 논란을 부추긴다.
2008년 대선을 앞두고 오바마가 민주당 당내 후보경선에 입후보하자 리드는 그를 가리켜 “피부색도 밝은 편이고 니그로 사투리도 안 쓰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오바마가 없는 사적인 자리에서 지지한다는 뜻으로 말한 거였지만 은연중에 ‘N단어’가 튀어나온 것이다.
리드는 오바마 정부의 의료개혁안이 상원에서 통과되는 데 큰 몫을 한 유력 정치인이며, 대선후보 경선 때부터 오바마를 지지한 정치적 동료다. 그런 그조차 사석에서 금기어를 썼다는 사실은 미국 백인 사회에 차별의식이 얼마나 뿌리깊이 박혀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사실은 ‘타임’과 ‘뉴욕매거진’ 기자들이 쓴 <게임 체인지>라는 저서를 통해 알려졌다. 책은 이번주 발매되지만 출판사 웹사이에 일부 내용이 공개됐다. 미국 언론들은 책 내용을 인용해 9일 리드의 발언을 일제히 보도했다.
파장이 일자 리드는 즉시 “그런 나쁜 말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상처를 준 것을 깊이 후회하고 사과한다”며 “나는 언제나 오바마 후보를 자랑스러워하면서 지지했고, 당선 뒤에는 그의 정책들을 입법화하는데 앞장서왔다”고 강조했다. 오바마도 성명을 내고 “그 문제라면 리드에게 사과를 받았고 이미 끝난 얘기다”라면서 진화에 나섰다. 오바마는 “리드가 사회 정의에 관심이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며 감쌌다.
하지만 지역구인 네바다주에서 11월 중간선거에 나올 예정인 리드는 악재를 만났다. 리드는 공화당 예비후보들에게 지지율에서 밀리고 있다. 공화당 측은 “오바마더러 ‘선탠한 남자’라고 했던 베를루스코니(이탈리아 총리)와 다를 바가 무어냐”며 리드를 맹공했다.
2006년 공화당 중견 정치인이던 조지 앨런은 아시아계 청년에게 ‘마카카(원숭이)’라고 욕하는 장면이 동영상사이트 유튜브에 올라와 낙선했다.

1940년대까지 미국 남부에서는 흑인 비하어가 버젓이 쓰였지만, 오래전부터 정치권에서 ‘N단어’는 금기어였다. 1948년 워싱턴포스트는 인종분리주의자인 공화당 스트롬 서몬드의 대선 캠페인을 다루면서 “N단어는 흑인(black people)에 대한 세련되지 못한 표현”이라 비판했다. (하지만 서몬드는 무려 100살까지 상원의원을 하며 천수를 누리다가 2004년 숨졌다)

60~70년대 민권운동이 활기를 띠고 ‘정치적 올바름(politically correctness)’ 운동이 펼쳐지면서 비속어 논란이 사회·문화 영역으로 확장됐다. 68년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는 베트남전 참전을 거부하면서 “베트콩들은 나더러 니그로라 부른 적 없다”고 발언해 ‘N단어’ 논란을 재점화했다. 일본계 여성예술가 오노 요코는 71년 “여성은 세계의 니그로(nigger)”라 발언해 다시 논란을 불렀고, 그의 남편인 존 레넌은 이듬해 아예 그 내용을 노랫말로 한 곡을 발표했다.
2007년 뉴욕시 주민협의회는 상징적인 조치로 도시 내에서 니그로라는 단어를 누구든 쓰지 못하도록 결의했다.

하지만 리드 파문에서 보이듯 ‘N단어’에 배어있는 의식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3년 전 조지프 바이든 현 부통령도 당시 떠오르는 정치인이던 오바마에 대해 “세련된데다가 밝고 깨끗하고 외모도 멋진 최초의 아프리카계 주류정치인”이라는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다. 1년 뒤 바이든은 오바마에게 사과했다.

‘N단어’는 아니더라도, 앤(Ann·흑인과 사귀는 백인 여성 혹은 백인이 되고 싶어하는 흑인 여성), 에이프(Ape·유인원), 버피(Buffie·흑인), 크로(crow·까마귀), 정글 버니(토끼)’, 모스헤드(mosshead·탄 머리), 겨자씨(Mustard seed·흑백혼혈), 삼보(검둥이) 등 흑인에 대한 비하어들이 많이 쓰인다.

유명 잡지 배니티페어의 다음달호 표지는 검은 상반신을 드러낸 타이거 우즈다. 잘 알려진대로 우즈는 아시아, 아프리카계 등 여러 인종의 혼혈이다. 인종이나 피부색과 상관없이 골프황제로 대접받던 그가, 나락에 떨어지는 순간 흑인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도 미국의 인종주의를 보여준다. 미 언론계 내부에서도 “우즈가 추락하자 새삼 그가 흑인 핏줄임을 부각시키는 경향(negroization)이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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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 해외입양아들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한국계 입양아들 대부분이 성장기에 정체성 혼란을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뉴욕타임스는 9일 입양아들이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정체성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조사결과와 함께 한인 입양아들의 고민과 아픔을 전하는 기사를 실었다.

플로리다주 포트로더데일에서 고교 교사로 일하는 한국계 입양아 조엘 밸런타인(35)은 3살 때인 1977년 백인 가정에 입양됐다. 백인들 속에서 자라난 그는 “인종적 정체성의 고민을 얘기하고 싶어도 자칫 양부모의 고마움을 모르는 것으로 비칠까봐 말할 수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1979년 미네소타주의 시골 가정에 입양된 제니퍼 타운(33)이라는 여성도 “대학에 진학한 뒤 내 과거를 알기 위해 한국에 가고 싶다고 하자 부모님은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말했다.



한국계 입양아 김은미 영 씨가 트위터에 올린 백인 동생들과의 어린 시절 사진


한국전쟁 직후부터 2007년까지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계는 16만명으로 미국 내 전체 한인인구의 10%를 차지한다. 하지만 다른 교포들과 달리 입양아들은 백인들에 둘러싸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인종적 혼란을 더욱 크게 느낀다고 한다. 61년 미국에 입양된 김은미 영(46)이라는 여성은 “어릴 때 양아버지가 한국과 관련된 선물을 사주면 모두 무시했고 청소년기에도 백인 남자아이들만 사귀었다”면서 “서른이 넘어 나의 정체성을 깨닫고 나를 버린 생모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면서 큰 혼란을 겪었다”고 말했다.

뉴욕의 아동복지단체인 에반 도널드슨 입양연구소가 한국계 입양아 17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8%는 어린 시절 자신을 백인이라 생각했거나 백인이 되고 싶었다고 답했다. 60%는 중학생이 된 이후에 인종적 정체성을 깨달았다고 답했다. 한국 문화에 호기심을 갖고 친부모를 찾아나선 것은 성인이 된 이후였다고 대답한 사람이 61%였다.
조사결과 입양아들 대부분이 어릴적 인종차별과 괴롭힘을 경험했고, 교사들로부터 심한 차별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같은 아시아계로부터 배척당한 경험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을 여행했다는 밸런타인은 “나를 입양시킨 외할머니를 찾아갔더니 ‘왜 한국말을 배우지 않았느냐’고 탓했다”면서 한국인들의 태도가 입양아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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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BBC방송에 22일 시위대가 ‘난입’하는 소동이 빚어졌다. BBC가 파시스트에 가까운 극우정당 당수를 주요 프로그램에 출연시키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소동 끝에 문제의 프로그램은 예정대로 녹화·방영됐지만, 파시스트 조직·정당과 반대세력 간 충돌은 갈수록 격해지고 있다.



Police clash with protestors at the entrance to the BBC headquarters in west London. (AFP)


Police block the entrance to the BBC headquarters in west London. (AFP)


반이슬람·반이민 파시스트 집단의 부상에 반대하는 시위대 30여명은 이날 극우정당인 영국국민당 닉 그리핀 당수의 방송출연에 항의, BBC방송 런던 본사에 난입해 소동을 벌였다고 BBC와 영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그리핀은 이날 오후 본사 방송센터에서 ‘퀘스천 타임’이라는 시사토론 프로그램 녹화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영국 진보주의자들과 반파시스트 시위대는 공영방송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온 BBC가 극우파 차별주의자에 전파를 할애해주어서는 안된다며 반대해왔고, 이날 녹화시간 전부터 500여명이 모여 방송국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방송국 경비원들이 차량을 출입시키려고 문을 여는 순간 30여명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 녹화장 밖에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했다. 스튜디오 안에 있던 그리핀은 예정대로 녹화를 진행했다. 그는 방송에서 “나는 나치가 아닌데 일부 세력이 나를 악마처럼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날 방송 뒤 영국의 여론은 둘로 갈라졌다. 일부에서는 “BBC는 파시스트의 주장을 그대로 내보낸 것을 사과해야 한다”고 비판했고, 한쪽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BBC방송은 인터넷판 뉴스에 ‘유럽의 미디어들은 극우파를 어떻게 다뤄왔는가’라는 별도의 기사를 싣고 “프랑스의 극우파 정치인 장 마리 르펜의 방송출연에서 보이듯 그들의 입장을 전하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방송국 밖에서는 그리핀 지지자들이 맞시위를 하기도 했다.

가디언 등은 이날 사건이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며, 영국에서 점점 목소리를 키워가는 극우파·파시스트 세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울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리핀의 국민당은 유럽연합(EU) 탈퇴, 이민자 축출 등 앞세워온 정당으로, 영국 의회에는 의석이 없지만 지방의회에 진출해 있다. EU탈퇴를 외치면서도 지난 6월 유럽의회 선거에 후보를 내보내 2석을 차지했다. 영국 주요 정당들은 인종주의 성향인 국민당을 정당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고 시민·인권단체들은 신나치 조직으로 규정하며 반대해왔다.
하지만 극우파의 목소리는 경제 침체와 맞물려 갈수록 커지는 추세다. 극우파 조직 ‘잉글랜드방어연맹(EDL)’은 올들어 영국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며 무슬림 축출을 주장했다. 지난달에는 버밍엄과 런던의 모스크 앞에서 이슬람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했고, 극우파 남성이 기차에 폭탄을 장착하려다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지난달 웨일즈에서는 EDL을 본뜬 ‘웨일즈방어연맹’이 축구경기장 앞에서 난동을 부렸다.
이들은 과거의 나치가 유대인을 핍박했던 것과 비슷하게 영국 내 무슬림 이민자들을 향해 증오를 퍼붓고 있다. 경제위기에 고용불안이 이어지자 저임금 노동자층을 구성하고 있던 흑인들도 파시스트 집단에 가입하는 양상이다. 한 흑인 시위자는 BBC 인터뷰에서 “내가 여기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듯 우린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아니다”라면서 “영국인이라고 볼 수 없는 무슬림들을 내보내고자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반파시스트운동가들은 “또다른 형태의 인종주의일 뿐”이라며 정부가 아예 파시스트들의 집회와 조직활동을 금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반파시스트연합의 잭 허포드는 “그들은 모든 무슬림을 테러범으로 몰아붙이며 증오를 확산시키려 하고 있다”면서 경계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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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상 첫 히스패닉 대법관, 사상 세번째 여성 대법관으로 지명된 소니아 소토마요르(54).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6일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새 대법관 지명자를 발표할 때, 소토마요르의 곁에는 어머니 셀리나가 앉아있었습니다.
소토마요르는 대법관 지명발표 뒤 첫 소감을 밝히는 연설에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어머니 덕분”이라며 모든 영광을 어머니에게 돌렸습니다. 소토마요르가 “나는 어머니에 비하면 그릇이 절반 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온 모친에게 감사의 인사를 할 때에는 청중들 일부가 눈물을 짓기도 했다네요. 
오바마 대통령은 “소니아의 어머니도 몹시 감동을 하신 것 같다”며 청중들에게 ‘리포트’를 해주기도 했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이주 2세대 소녀의 ‘아메리칸 드림’ 뒤에서 피땀으로 헌신한 어머니를 집중 조명했습니다.

이런 스토리, 한국에서도 많이 듣습니다만 어디에서건 '홀어머니의 정성'은 감동적인 휴먼스토리가 되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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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토마요르(왼쪽)와 어머니 셀리나.
가족사진을 뉴욕데일리가 입수해 인터넷판에 올린 걸 퍼왔습니다.


소토마요르의 부모는 2차대전 중 미국령 식민지였던 푸에르토리코에서 뉴욕으로 이주해왔습니다. 푸에르토리코가 독립한 것은 1948년이니, 정확히 말하면 당시로서는 '이민'은 아니었고 식민 모국으로 이주를 한 것이지요.
영어도 못 했던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곧 사망했다고 합니다. 어머니 셀리나는 낮에는 마약중독자 치료센터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밤에는 온갖 부업을 하면서 자녀를 키웠습니다.

소토마요르 가족이 살았던 곳은 히스패닉 저소득층 집단 거주지역인 브롱크스데일의 공동주택단지였는데, 시 당국이 이른바 '저소득층 주택개발 프로젝트'로 만든 거라고 합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예전에 많이 지어졌던 시민아파트 같은 그런 거겠죠. 8층짜리 낡은 벽돌 아파트들로 이뤄진 이 곳은 지금도 가난한 히스패닉계 마을로 남아 있습니다.
셀리나는 힘들게 번 돈으로 백과사전 전집을 사주며 자식들의 지적 호기심을 일깨웠습니다. 딸 소토마요르는 엄마의 지극정성 속에 프린스턴대와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뒤 법관이 됐고, 아들 후안도 뉴욕대를 나와 의사로 성공했습니다. 후안의 세 자녀 중 두 아들은 한국에서 입양해 간 쌍둥이라고 합니다.

소토마요르는 어릴 적부터 뛰어난 학생이었고 대학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지만 히스패닉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예일대 재학시절에는 ‘라틴·아시아·아메리카원주민 학생연합(LANA)’의 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대학 동창들은 “학생 자치활동에 열심이어서 학내에서는 유명인사였다”고 전했습니다.
소토마요르는 로스쿨을 나와 뉴욕 지방검찰청과 로펌에서 일을 하다가, 1991년 조지 H 부시 전대통령 때 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됐습니다. 그 때는 무사히 지나갔는데, 97년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 상급 법원인 항소법원 판사로 지명될 때에는 히스패닉계라는 이유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공화당 의원들의 반대 때문에 1년 넘게 인준 절차가 지연됐던 겁니다.
몇몇 공화당 의원들은 "그냥 두면 나중에 히스패닉계 대법관 후보가 될 지 모른다"며 반대했었다고 하네요. 그렇게 '꼼수'를 뒀던 의원들, 흑인 대통령까지 탄생한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을지 궁금하군요.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이 침체된 흑인 사회에 희망을 가져다준 것처럼, 소토마요르의 대법관 지명은 히스패닉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미국 내에서 ‘교육열 낮은 저소득층’으로 여겨지던 히스패닉계 주민들이 소토마요르를 보면서 꿈을 갖기 시작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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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브롱크스데일 주택단지(Bronxdale Houses)입니다.
사진은 www.skyscrapercity.com 에서 가져왔어요.


그가 졸업한 브롱크스의 가톨릭학교인 카디널스펠먼 고교에서는 26일 대법관 지명 소식이 알려지자 환호가 터져나왔습니다. 이벨리스 벨라스케스(18)라는 학생은 USA투데이 인터뷰에서 “나도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로렌조 테일러(62)라는 주민은 “브롱크스데일에서 40년 넘게 살았지만, 이 낡은 단지에서 대법관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몇몇 신문들은 오바마와 소토마요르, 눈에 띄는 두 사람의 아메리칸 드림을 함께 묶은 기사들을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사실 히스패닉계 중에 이 정도로 '출세'를 한 사람이 꼭 소토마요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지낸 앨버토 곤잘레스도 '아메리칸 드림'을 구현한 인물 중의 하나이긴 하죠. 하지만 곤잘레스는 마이너리티의 이익과 평등을 위해 일했다기보다는, 부시 행정부의 입맛에만 맞추다 물러난 인물이어서 소토마요르하고는 좀 경우가 달랐습니다. 

소토마요르가 의회 인준절차를 무사히 통과하면 ‘가장 재산이 적은 대법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2007년 그의 재산 신고액은 은행 예금액 5만~10만달러 뿐이었습니다. 연방순회법원 판사로 일하면서 지난해 받은 연봉은 17만9500달러.
대법관이 되면 연봉 20만8100달러를 받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이뤄낸 것은 '연봉 2억6000만원'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꿈이라고 봐야겠지요. 
Tag // 미국, 인종
“전쟁이 흡혈귀처럼 사람들의 기술과 돈을 빨아들이는 한, 미국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금이나 에너지를 결코 투자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저는 이 전쟁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전쟁은 가난한 사람들의 아들, 형제, 남편들을 전쟁터로 보내 싸우다 죽게 하는 행위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잔인하게 조종당하는 현실 앞에서 도저히 침묵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7년4월4일,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왜 미국인들은 베트남전쟁에 반대해야 하는가’를 밝히는 연설을 한다. ‘베트남을 넘어서- 침묵을 깨야 하는 때(Beyond Vietnam- A Time to Break Silence)’라는 제목의 이 연설은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과 함께 킹 목사의 가장 유명한 연설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이 연설에서 전쟁이 선량한 시민들을 전선으로 내몰고 정부와 시민사회 간의 약속을 무위로 돌리고 있다고 질타했다. 그는 “침묵은 곧 배반을 의미한다”며 시민권투쟁에 참여했던 이들이 침묵을 깨고 양심에 따라 반전의 목소리를 내야할 때라고 주장했다.

“힘없는 이들, 발언권이 없는 이들, 미국에 의해 희생된 이들, 우리 나라가 ‘적’으로 규정한 이들, 하지만 어떤 문헌에도 우리의 형제가 아니라고 적혀있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저는 이 곳에 왔습니다.”

연설은 킹 목사가 생각했던 ‘인권’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남과 나를 구분하고 적과 우리의 차등을 두는 것은 진정한 시민의 자세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평화와 인권은 미국인들, 미국의 흑인들과 빈민들, 가난 때문에 전쟁터에 나가 베트남인들을 죽여야 하는 미국의 군인들, 그리고 ‘미국의 적’이 되어 공격받는 베트남인들까지도 끌어안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노벨 평화상 수상자였던 킹 목사에게 지지를 보냈던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전쟁에 반대하자”는 주장에는 등을 돌렸다. 백인 자유주의자들, 심지어 흑인 유명인사들 중에서도 애국주의를 내세워 킹 목사를 외면했다.

공교롭게도, ‘베트남을 넘어서’ 연설을 한 지 꼭 1년 뒤인 1968년 4월4일 킹 목사는 암살당한다. 흑인 환경미화원들의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 테네시주 멤피스를 방문했던 그는 이날 저녁 오후 6시1분 로레인 모텔의 발코니에 서 있다가 제임스 얼 레이라는 인물에게 저격당했다.
총탄이 오른쪽 뺨을 뚫고 척수를 지나 어깨에 박히는 순간 킹 목사가 곁에 있던 가수 벤 브렌치에게 남긴 말은 “오늘 밤 ‘주여 이 손을 잡아주소서’를 멋지게 불러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킹 목사는 이 말을 남기고, 한 시간 뒤인 7시5분 숨을 거뒀다. 39세의 젊은 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