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853

스티븐 핑커 <지금 다시 계몽>

지금 다시 계몽 스티븐 핑커. 김한영 옮김. 사이언스북스. 12/29 핑커의 책은 대체로 다 보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 책도 구입. 그런데 언어학자, 인지과학자로서의 핑커를 보여주는 은 재미있었는데 부터는 너무 ‘모든 것 평론가’로 간 느낌. 그렇다 해서 딱히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얘기하는 것들 대부분에 동의한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안 읽어도 될 것 같다.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장밋빛 안경을 끼고 본다는 사실을 오래 전에 발견했다. 자신은 이혼, 해고, 사고, 병, 혹은 범죄의 희생양이 될 확률이 일반 사람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론 연구자들은 이것을 낙관주의 간극(Optimism Gap)이라고 부른다. 20여 년 동안 좋을 때도 있고..

딸기네 책방 2023.12.31

구정은, 오애리 <전쟁과 학살을 넘어>

2023년 여름, 저자들은 동유럽을 함께 여행했다. 숱하게 기사를 쓰면서 지명으로만 남았던 보스니아가 첫 방문지였다. 1990년대 옛 유고연방의 내전 시간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갔고 묻혔던 곳이다. 아름다운 사라예보의 노을 지는 언덕에 줄지어선 흰 묘비들은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안겼다. 세르비아와의 국경선 근처에 있는 스레브레니차를 찾아갔다. 세르비아계 혹은 정교도들은 그곳에서 사흘 만에 8000명이 넘는 보스니아계 혹은 무슬림을 학살했다.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어째서 이런 학살이 벌어졌을까. 민족이란 무엇이며 종교란 무엇이길래 이런 잔혹사가 펼쳐지는 것일까. 유고 연방의 70년 역사는 이들에게 어떤 것을 남겼을까. 의문이 꼬리를 물었고,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보스니아의 상점들에서는 옛 유고의 지도자이..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인간 불평등 기원론 장자크 루소. 주경복, 고봉만 옮김. 책세상. 11/14 김용민 교수님 수업을 듣는데 생각보다 엄청 재미있다. 특히 루소!!! 우리가 이 법[자연법]에 대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법이 되기 위해서는 법의 강제를 받는 사람의 의지가 그 법을 의식하고 그것에 복종할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이 자연적이기 위해서는 그 법이 자연의 소리에서 나와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 영혼의 최초이자 가장 단순한 작용들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보면, 거기에 이성보다 앞선 두 개의 원리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우리의 안락과 자기 보존에 대해 스스로 큰 관심을 갖는다는 원리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감성적 존재, 주로 우리 동포가 죽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혐오감을 느..

딸기네 책방 2023.11.14

<10대를 위한 세계 분쟁지역 이야기>

10대를 위한 세계 분쟁지역 이야기 프란체스카 만노키. 김현주 옮김. 롤러코스터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우크라이나… 이번 세기에 들어와 다른 나라와의 전면전 혹은 대규모 내전을 겪은 나라들이다. 침략자와 침략을 당한 사람들의 ‘국적’은 달라지지만 모든 전쟁에서 변함 없는 것이 있다면, 사람들의 삶을 앗아가고 미래마저 망가뜨린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전쟁, 분쟁을 다루는 보도들은 국가라는 모호한 실체를 주어로 두거나, 국가 지도자들을 비롯한 힘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채워질 때가 많다. 정작 다치고 죽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뒷전으로 밀리게 마련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피해자들, 공습 속에 살아남아야 하고 폐허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상처와 고통 속에서도 ..

딸기네 책방 2023.10.18

꼭 필요했던 책, <아랍의 봄 그 후 10년의 흐름>

아랍의 봄 그 후 10년의 흐름 |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총서 기초연구시리즈 23 구기연 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구기연 박사님이 중동/아랍/이슬람 전문가들로 '어벤저스' 팀을 구성해 한 권의 책을 냈다. 그리고 3월 말 북토크를 했는데 토론자로 참여할 좋은 기회를 주셨다. 지난번 아시아연 여성 인류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과 북토크도 정말 재미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좋은 시간. 남녀 동수 패널의 북토크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아래는 2023년 가을호에 실은 서평. 민주주의는 정말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일까? 그렇다면 시리아에는 지금쯤 민주주의의 가냘픈 싹이라도 텄어야 하지 않을까. 얼마만큼의 피가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질문을 좀 더 잔혹하게 바꿔보자. 피를 먹으면, 민주주의라는 나무가 정말로 자라나..

딸기네 책방 2023.10.10

드뎌 읽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

리바이어던 토머스 홉스. 이정식 역. 올제클래식. 드뎌 읽음.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신의 왕국'과 '암흑의 왕국'은 슬렁슬렁 넘겼지만. 앞부분은 그나마 괜찮았는데, 전반적으로 번역이... 이건 뭐 오역이나 직역/의역의 문제가 아니라 AI번역기보다도 훨씬 못한 수준. 접속사 그러나/그런데/그리고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의 번역이랄 밖에는. 교황을 일본식 표현인 '법왕'도 모자라 '법왕'과 '법황'을 섞어 번역한 것은 대체 머람. 번역 문장이 참담하다고 말하기도 뭣한 수준의 비문이다. 오래 전 주워둔 책이라 걍 읽었는데, 이왕 읽을 거면 차라리 돈 들여 새로 살 걸 그랬다 ㅠㅠ 독자 가운데 이 책의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 어떤 쪽에서는 너무나 큰 자유라고 주장할 것이고, 또 한쪽에서는 너무 많은 권위라..

딸기네 책방 2023.10.09

정욱식, <핵과 인간>

핵과 인간 정욱식. 서해문집. 13/8 넘나 훌륭한 책. 문재인-트럼프 시기의 희망적이었던 분위기에서 끝난 것이 아쉬울 수밖에. 윤석열 정부 들어와서 한미일 동맹 강화한다며 말 그대로 나라 팔아먹고 있는 꼬라지 보면 말이다. "한국 대통령이 반북과 친미·친일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으면 이는 미일동맹에 좋은 먹잇감이 되고 만다." 핵이라는 물리학의 결정체와 변화무쌍한 인간 의식이 만나면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킬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핵은 관계다. '핵'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전쟁도 완전히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결론은 한국전쟁과 핵무기의 관계는 상당히 밀착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은 '세계 전쟁'이었다. 한국전쟁과 핵무기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것은 단순히 과거사의 기술..

딸기네 책방 2023.10.09

피터 왓슨, <거대한 단절>

거대한 단절 - 1만6500년 동안 신세계와 구세계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피터 왓슨. 조재희 옮김. 글항아리. 기후 생태학적 조건을 문명사와 연결시키는 역사학이 대세인 모양인데 이 책도 그런 흐름 속에 있다. 지리 조건과 자연환경, 동식물의 차이 등 구세계와 신세계의 경로가 달라지게 만든 요인들을 분석한 책. 논쟁 중인 것들,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고 그런 부준을 추측과 가설로 메우고 있지만 호기심 충족용으로 재미 삼아 읽기에 딱이었다. 각기 다른 두 세계가 서로 다른 세 가지 현상에 의존했을 뿐만 아니라 지배를 받았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 첫 번째로 광활한 구세계 대륙은 동지중해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계절풍 기후인 아시아 몬순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으로, 전 세계 농부의 3분의 2가 이 몬순기후..

딸기네 책방 2023.09.30

헨리 키신저의 <외교>

외교 헨리 키신저. 김성훈 옮김. 김앤김북스. 9/23 재미있었다. 자화자찬과 합리화도 많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네;;의 통찰력+그만이 말할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겹쳐서 정말 흥미진진했다. 책은 '미국 외교사'라고 볼 수도 있고, 키신저가 설명해주는 외교학 개론이라 할 수도 있다. 책의 주인공은 미국이고 '미국에 보내는 원로의 조언' 같은 느낌을 담고 있다. 좀 더 명확히 하자면, '윌슨주의의 모험'이 이 책의 테마다. 우드로 윌슨이 펼쳐보였던 이상주의가 어떻게 미국을 비현실적인 나라로 만들었으며 동시에 위대한 나라로 만들었는지, 도덕적으로 고매하고 용감한 미국이라는 독보적인 나라가 어떻게 갈짓자 걸음 속에서도 결국 세계의 지도자가 되었는지가 책의 주제다. 현실주의자 키신저에겐 윌슨주의로 대변되는 미..

딸기네 책방 2023.09.23

아주 짧은 소련사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안종희 옮김. 롤러코스터 간략하지만 균형잡힌 평가와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들어있는 책. 정치적 변화를 당대 사람들이 어떻게 보았고 사회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사회적 맥락을 설명한 부분들도 흥미롭다. 넘나 훈늉한 책. 새로운 연방의 헌법은 각 공화국에 연방 탈퇴의 자유를 부여했지만 약 70년 동안 어느 국가도 이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러시아제국 몰락 후 잠시 독립했던 중앙아시아 5개국(우즈베키스탄,투 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이 1920 년대와 30년대에 소련에 추가로 병합되었다. 트랜스코카서스 소비에트연방 공화국은 다시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분리되었다. 1939년 발트 3국(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과 몰다비아..

딸기네 책방 2023.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