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198

디트로이트

무너진 도시가 있습니다. 도심은 텅 비었고, 곳곳에 부서진 채 버려진 집들과 공장들이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습니다. 시 정부는 파산했으며 주민들은 떠났습니다. 한때는 ‘자동차의 메카’라 불렸던 미국 미시간 주의 공업도시 디트로이트입니다. 2014년 10월 블룸버그통신은 이 도시의 집과 건물 6000채를 매입하겠다며 경매에 참여한 한 투자가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6000건의 부동산 매입가격으로 투자가가 제시한 것은 320만 달러(약 34억 원)에 불과했습니다. 입찰자가 제시한 금액은 집값 비싼 뉴욕에서라면 그럴싸한 타운하우스 한 채를 살 수준의 액수이지만, 디트로이트에서는 가압류된 부동산 6000건을 한몫에 매입할 수 있는 금액입니다. 이 입찰자가 사들이고 싶어 한 부동산은 소유주가 세금을 못 내 압류된 채..

말레이시아, 화교, 공산주의

말레이시아가 국제 이슈의 무대가 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한동안 김정남 피살사건 때문에 시끄러웠죠. 말레이시아가 최근에 세계 뉴스에 등장한 것은 3년 전 사라진 MH370 여객기와, 뒤를 이어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MH17 여객기 격추사건 때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김정남 사건 취재 다녀온 심진용 기자의 말로는, 말레이시아 현지 기자들도 "MH370 사건 이래 최대 뉴스였다"고 했다는군요. 김정남에 관한 뉴스들 확인하느라고 현지 신문들 많이 훑어봐야 했는데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소스가 화교들이 만드는 중국어 신문들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직접 훑어본 것은 아닙니다;; 중국어 못함... 그러나 내겐 중국어를 하는 후배가 있지)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생각난 김에 정리하려고요. 말레이시아의 화교들은 19..

51. '색깔 혁명'의 파도가 휩쓴 2000년대의 동유럽

51. '색깔 혁명'의 파도가 휩쓴 2000년대의 동유럽 2003년 11월 3일, 지금은 '조지아'라고 나라 이름...이 아니고 '발음'을 고친 그루지야에서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Eduard Shevardnadze 대통령의 퇴임과 미하일 사카슈빌리 Mikheil Saakashvili 취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장미혁명 vardebis revolutsia'이라 이름 붙여진 시민들의 물결은 2000년대 중반 동유럽 옛 소련권 나라들을 뒤흔든 '색깔혁명'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셰바르드나제. 저처럼 연식이 상당히 된 사람들에게는 '조지아 대통령'이라보다는 옛 소련의 외무장관으로 더 각인돼 있지요. 1985년부터 1990년까지, 소련의 마지막 순간에 외교정책 수장을 지냈던 인물입니다. 당초에는 셰바르..

50. 1999년 코소보 위기

50. 1999년 코소보 위기 1966년 티토는 내 세르비아 공화국 안에 위치한 코소보 자치주에 특권을 주어 유고슬라비아 연방 차원에서 공화국들과 동등한 투표권을 갖도록 해줬습니다. 코소보의 자치권이 강화되자,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자치주 정부 참여가 크게 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자치주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세르비아계 정부의 통치를 받으며 차별을 겪어야 했거든요. 상황이 바뀌자 자치주의 새로운 공산당 정부를 장악한 알바니아계는 보복 차원에서 ‘소수민족’이 된 세르비아계에 대한 역차별 조치에 들어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치주를 세르비아와 대등한 별도의 공화국으로 승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티토 사후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던 유고슬라비아 연방 지도부는 “코소보 자치주의 공화국 승격..

엘모소테, 학살의 가려진 기억

중미의 엘살바도르에서는 1980년부터 1992년까지 정부군과 좌익 무장단체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 Frente Farabundo Martí para la Liberación Nacional (FMLN)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오스카르 로메로 Óscar Arnulfo Romero y Galdámez(1917-1980) 대주교의 죽음으로 유명해진 이 내전으로 7만5000명 이상이 숨졌다. 사망이 확인되지 않은 채 ‘실종’으로 남아 있는 사람도 8000명에 이른다. 당시 정부군은 반군을 소탕한다며 민간인들을 대량학살했다. 그런 학살 중의 하나가 엘모소테 El Mozote라는 곳에서 일어났다. 엘모소테는 온두라스와의 국경에 인접한 엘살바도르 북부의 작은 마을이다 내전 초기인 1981년 12월 11일, 미국..

49. 옛 유고연방의 내전

49. 1991-1995년 유고슬라비아의 잇단 전쟁 조 사코라는 미국 작가는 만화를 통해 세계의 이슈를 그려보입니다. '코믹 저널리즘'이라 부르기도 하더군요. 그 작가의 역작인 ‘팔레스타인’을 오래전 아주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너무 상투적인 표현같지만, 그 책은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안전지대 고라즈데’도 그 작가의 작품입니다. ‘팔레스타인’을 다 읽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렸지만 ‘고라즈데’를 끝까지 넘기는 데에는 꼬박 두 달이 걸렸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외국(서양) 사람들이 자기네들 사정을 너무 몰라준다고 하고, 서방 언론이 이스라엘 입장에서 편견을 갖고 아랍을 들여다본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들 얘기합니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너무 정치화돼 있고 서방은 2차 대전 피해자였던 ..

48. 냉전 시기의 동유럽

48. 1948-1991년의 동유럽 흑... 이제는 '가물에 콩 나듯'도 아니고... 근 반년 만에 정리하네요. 대체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시리즈, 그러나 어느새 20세기의 뒤쪽 절반으로 후딱 넘어왔습니다! 1943년 히틀러의 나치 독일, 그리고 독일에 점령된 동유럽은 동부 전선의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에서 막대한 전력을 앞세운 소련군에 패하며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1944년이 되자 나치 제국의 붕괴는 가속화됐습니다. ‘붉은 군대’는 독일 군을 소련 땅에서 폴란드로 몰아냈습니다. 서부전선에서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역시 독일 군이 밀리고 있었습니다(201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70주년 기념식이 떠오르네요. 프랑스에서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옛 동맹국이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문제로 사이가..

47. 2차 대전과 동유럽

47. 1938-1944년 2차 세계대전 시기의 동유럽 언제 끝날지 모를 이 시리즈, 어느새 해가 바뀌었습니다. 이러다가 5년에 걸친 연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시간은 흐르는 법. 어느새 2차 세계대전 시기로 넘어왔군요.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 분할해 동유럽 공격의 장애물을 제거한 히틀러는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에 들어갔습니다. 나치 독일은 여러 동유럽 국가들 간의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조건들을 활용해 동유럽을 공략합니다. 당시 헝가리와 불가리아는 베르사유 강화조약으로 불이익을 본 패전국들이었고, 국가사회주의 파시즘이 잘 먹혀들고 있었습니다.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1927년 이래로 히틀러와 강력한 연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헝가리 내부에서도 화살십자가당이라는 파시스트 운동이 성장했습니다. ..

러시아 첩보원의 죽음으로 본 암살의 역사

러시아의 황제 표트르3세는 1762년 1월에 즉위했지만 차르 자리에 앉아있었던 기간은 반년에 그쳤습니다. 황태자 시절부터 종교의 자유를 법으로 보장하는 것을 비롯해 서유럽식 자유화를 추진하고 싶어했던 그는 짧은 재위 기간에 220개가 넘는 개혁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하지만 권력이 줄어드는 것에 반발한 근위병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6개월만에 폐위시켰고, 며칠 뒤 쫓겨난 차르는 암살당했습니다. 살인범의 정체는 미궁에 빠졌으나 후대 학자들은 표트르3세의 황후였고 뒤이어 즉위한 예카테리나 여제 쪽의 짓으로 봅니다. 표트르3세의 죽음 이후 250여년이 지났지만 ‘암살’은 끊임없이 러시아를 들쑤십니다.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는군요. 2015년 2월, 제1부총리까지 지냈으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맞서며 야권 지도..

만한전석에서 엘리제궁 '두끼 식사'까지, 국가 만찬의 역사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말이 있지요. 고대 중국의 하(夏)나라 걸왕(桀王), 은(殷)나라 주왕(紂王), 주(周)나라 유왕(幽王)은 모두 폭정과 방탕한 연회로 유명합니다. 걸왕은 매희에게, 주왕은 달기에게, 유왕은 포사에게 빠져서 술잔치를 벌이다가 나라가 망했다는 스토리들입니다. 매희, 달기, 포사는 모두 당대의 미녀들이고요. 고대의 중국 왕들이 술로 못을 만들고 나무에 고기를 매달아 흥청망청 먹고 마셨다고 해서 주지육림이라는 말이 나왔다지요. 너무나 먼 옛날의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지만, 황제와 왕과 대통령들의 만찬은 늘 호기심을 부추깁니다. 예나 지금이나 먹고 마시면서 이야기가 오가고, 외교와 밀담이 이뤄지는 것이니까요. ‘정상들의 만찬’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여다보면 당대의 사회상과 단면도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