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블로그는 딸기네 마을의 일부분입니다.
이 블로그는 누구든 보실 수 있지만, 딸기네 마을에 들어와서 서평이나 여행기를 보시려면
게시판 윗부분 join 버튼을 누르고 가입을 하셔야 합니다.
1976년 7월, 중국 허베이(河北)성 탕산(唐山) 주변의 한 우물에서는 하루에 세번씩 우물의 물이 갑자기 솟구쳤다 가라앉았다. 또 다른 우물에서는 그 달 들어서 가스가 세 차례 새어나와 주민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지진의 전조였다. 탕산은 물론이고 베이징, 톈진, 보하이, 장자커우 등지에서 이상 징후가 속속 탐지되고 있었다. 
국가지진국에서 일하던 왕청민(汪成民)은 탕산 주변 지각작용을 분석해 “7월22일부터 8월5일 사이에 큰 지진이 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마자거우쾅(馬家溝曠) 지진대의 지진전문가 마시룽(馬希融)과 겅칭궈(耿慶國), 탕산시 지진사무실의 양유천(楊友宸) 등도 상부에 지진 가능성을 보고했다. 


대지진이 일어나기 보름도 더 전에, 이미 이렇게 ‘경보’는 나와 있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에 정신이 팔려 있던 공산당 상층부는 지진 경보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급 관리들의 경고는 묵살됐다. 뿐만 아니라 양유천은 갑자기 ‘노동개조’ 대상이 돼 지진 직전 사무실을 떠야 했다. 
왕청민은 60명을 직접 만나 지진이 일어날 것이라 이르고 대책을 당부했다. 왕청민에게 귀기울인 사람 중 하나는 칭룽(靑龍) 만족 자치현의 관리 왕충칭(王春靑)이었다. 7월 25일과 26일, 칭룽 자치현 현장 란광치(?廣岐)는 왕충칭의 말을 듣고 비상회의를 열었다. 47만명의 주민들에게 지진시 대피법을 알리고 건물 안전을 점검했다. 란 현장의 결정은 정치생명을 건 도박이었다. ‘주민들을 들쑤신다’는 이유로 인민재판을 받거나 감옥에 갈 수도 있었다.





7월28일 새벽 3시 42분, 천지가 흔들렸다. 20세기 지진 중 최악의 피해를 낸 것으로 추정되는 탕산 대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규모 7.8, 15초에 걸친 지진으로 “온 땅이 평평해졌다.” 
100만명이 살고 있던 탕산 시는 초토화돼 남아 있는 건물이 없었다. 강력한 여진들이 16시간 동안 이어졌다. 중국 정부는 당초 24만~25만5000명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나중에 허베이성 혁명위원회는 “65만5000명이 숨지고 77만9000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현명하고 용감한 관리들을 두었던 칭룽현에서는 기적이 일어났다.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던 것이다. 란광치는 포상을 받는 대신 오히려 함구령을 들어야 했다. 

1976년은 중국에는 ‘저주받은 해’였다. 인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저우언라이(周恩來)가 그 해 1월 숨을 거뒀고, 6월에는 공산당 지도자 주더(朱德)가 사망했다. 탕산 대지진으로 수십만명이 죽어갈 때, 다른 곳에서는 문화대혁명이라는 정치적 재앙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진 한달 여 뒤인 9월 9일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숨졌다. 정치적으로도 지진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덩샤오핑과의 권력다툼에 혈안이 돼있던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은 “수십만명이 죽었을 뿐이다. 그래서? 덩을 탄핵하는 것은 8억 인민과 관련된 문제다”라 주장했다. 장칭과 4인방에게 탕산 대지진을 들먹이는 덩샤오핑은 ‘혁명을 방해하려 지진 공포를 부추기는 존재’였다. 중국 정부는 유엔의 지진 구호 제의도 거부했다.




묵살된 지진 경보와 칭룽현의 기적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마오의 후계자로 내정된 화궈펑(華國鋒)이 탕산을 한 차례 찾아갔지만 ‘개인적인 방문’일 뿐이었다.

시대가 바뀌어 덩샤오핑이 권력을 잡았으나 탕산의 진실은 그후로도 오래도록 묻혀있어야 했다. 95년 유엔은 “당국의 현명한 대응과 준비로 재앙의 피해를 줄일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며 칭룽의 기적을 조명했다. 10년 뒤인 2005년에는 경보 과정에 관여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담은 장칭저우(張慶洲)의 조사 보고서 <탕산경세록>이 출간돼 당시의 비화를 폭로했다. 




지난 12일 탕산에서는 이란성 쌍둥이 남매가 지진으로 운명이 바뀌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탕산 대지진>이 개봉됐다. 개봉식에 온 주민 1만명은 빗속에서도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희생자 유족들과 생존자들, 제작진이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중국 언론들이 전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어제의 오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숱한 비화를 낳은 탕산대지진  (0) 2010/07/27
아스완 하이댐  (0) 2010/07/20
이라크의 7.14 혁명  (0) 2010/07/13
미-소 이어준 소녀  (0) 2010/07/06
나치제국의 내분, '긴칼의밤'  (0) 2010/06/30
아르헨 축구의 악몽, '푸에르타 도세 참사'  (0) 2010/06/23

아스완 하이댐

from 어제의 오늘 2010/07/20 19:01

고대 이집트인들이 수십미터 높이의 기둥들로 이뤄진 룩소르와 카르나크의 신전을 세우고 ‘세계의 불가사의’로 불리는 거대한 피라미드들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나일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범람하는 나일강이 이집트인들에게 비옥한 충적토를 선사해 농경지를 만들어줬던 것, 흘러넘친 강변을 정비하고 관개를 하면서 사람들이 모이고 나라가 생기고 문명이 발전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있다.
하지만 나일강은 이집트인들의 생명줄인 동시에 늘 걱정거리였다. 현대에 이르러서까지도 나일강의 홍수는 사람들이 제어하기에는 힘든 상대였다. 이집트를 ‘위임통치’했던 영국은 1889년부터 강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한 댐을 쌓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1901년 만들어진 것이 아스완 댐이다. 지금은 후대의 아스완 하이댐(High Dam)과 구분하기 위해 ‘로우댐(Low Dam)’으로 불린다.

로우댐만으로는 강의 파괴력을 막을 수 없었다. 인구가 늘어나고 목화밭이 넓어지면서 물을 더 많이, 더 안전하게 쓸 방법이 필요했다. 1952년 청년장교들을 이끌고 혁명을 일으켜 이집트공화국을 출범시킨 가말 압둘 나세르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아스완에 더 크고 더 높은 댐을 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세르와 사이가 좋았던 미국, 영국이 돈을 댔다. 하지만 나세르가 아랍사회주의를 내세워 아랍권을 규합하려 하자 두 나라는 원조를 끊고 등을 돌렸다.



아스완 하이 댐에서 나세르호를 봤을 때에는 증말 바다처럼 넓었는데, 이렇게 보니 느낌이 안 사네.


나세르는 60년 소련의 도움을 받아 다시 건설을 시작했다. 대역사인 만큼 난제도 많았다. 수몰지구에는 9만명 넘는 이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을 모두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 했다. 뿐만 아니라 물에 잠길 지역에는 람세스2세가 지은 위대한 유적 아부심벨 신전(아래 사진)이 있었다.
배짱 좋은 나세르는 세계를 상대로 을러대는 방법을 택했다. “우리는 댐이 필요하다. 돈을 주지 않으면 신전을 가라앉힐 수밖에 없다.” 세계인의 유산인 아부심벨이 물속에 가라앉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던 유네스코와 국제사회가 돈을 모아주었고, 문화재 전문가들도 파견했다. 아부심벨 신전을 통채로 옮기는 것만 해도 엄청난 작업이었다. 지금 아스완 댐 위편으로 옮겨진 아부심벨 신전에는 토막토막 잘라내 다시 쌓은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게 24개 유적을 들어올렸다.




70년 7월 21일, 마침내 아스완 하이댐이 완공됐다. 높이 11m에 길이 3830m. 공사비로 총 10억달러가 들어갔다. 문화재 복원에는 서방 전문가들이 참여했지만 댐 건설은 이집트 공학자이자 건축가였던 오스만 아흐메드 오스만이 맡았다. 훗날 정치인으로 변신하기도 했던 오스만이 발굴작업도 지휘를 했다 한다. 돈은 소련이 냈기 때문에 준공기념탑에는 아랍어와 러시아어가 나란히 쓰여 있다.
댐이 완공되어 생겨난 거대한 호수에는 ‘나세르호’라는 이름이 붙었다. 저장된 물을 이용해 연간 이모작의 관개농업을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 자랑스런 댐의 부작용도 만만찮았다. 관개농지에서 흔히 나타나는 흙의 염화현상이 심해졌고, 토양 침식이 심해졌다고 한다. 미처 파악하지 못한 인류의 유산들은 그대로 저수지 밑에 묻혀버렸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어제의 오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숱한 비화를 낳은 탕산대지진  (0) 2010/07/27
아스완 하이댐  (0) 2010/07/20
이라크의 7.14 혁명  (0) 2010/07/13
미-소 이어준 소녀  (0) 2010/07/06
나치제국의 내분, '긴칼의밤'  (0) 2010/06/30
아르헨 축구의 악몽, '푸에르타 도세 참사'  (0) 2010/06/23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장기집권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축출하고 ‘레짐 체인지(정권교체)’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라크인들은 물론 국제사회가 일제히 ‘이라크 정치는 이라크인들의 손에 맡기라’고 했지만, 미국의 보수파 이데올로그들은 “오랜 독재에 시달려온 이라크인들에겐 스스로 후세인을 몰아낼 능력이 없다”고 주장했지요.

그러나 미국의 왜곡된 선전과 달리, 이라크 현대사에는 부패한 왕정을 몰아낸 혁명이 분명 있었습니다. 1958년의 ‘7·14 혁명’입니다.

당시 이라크는 현 요르단 왕실과 한 뿌리인 하솀 왕가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하솀 왕가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계보라 주장하고 있지요. 하지만 당시 이라크 왕실의 정통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습니다. 이 왕정이 탄생한 것은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1932년 파이잘1세 국왕이 즉위하면서였으니, 역사가 참 일천했지요.
 
당시 아랍권에는 ‘범아랍주의’로 표현되는 민족주의 정서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라크인들은 왕정을 서방의 괴뢰정권이라 보았고, 터키 등 이슬람권 여러 나라에서 그랬듯 ‘자유장교단’을 비롯한 엘리트 젊은 장교들의 왕정 전복 시도가 잇따랐습니다. 실제 왕정은 미국·영국 석유회사들에 유전 이권을 넘겨주기 바빴습니다. 더군다나 2차 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이 다시 이라크를 점령, 47년까지 통치를 했기 때문에 국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이 불황을 겪자 이라크 경제도 침체에 들어갔습니다. 물가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고 삶의 질이 떨어졌습니다. 왕정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은 갈수록 높아졌습니다.
영국 통치 시절부터 각료를 지내고 총리를 무려 7차례나 했던 누리 알 사이드는 이라크석유회사(IPC)의 수입 70%를 외국 투자자가 아닌 이라크 정부로 귀속시키고 인프라 투자를 늘리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라크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외국인 자문단’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외국인 자문단의 입김이라니.. 사실상 식민통치의 연장이었다고 봐야겠죠.

55년 이라크는 이란·파키스탄·터키와 ‘바그다드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바그다드 협정으로 '중앙조약기구(CTO)'라는 것이 만들어졌는데, 미국의 세계전략에 따라 생겨난 일종의 지역안보동맹체제였습니다(북대서양조약기구, 바르샤바조약기구 같은 지역안보체제가 냉전 시대에 미.소 주도로 많이 만들어졌고 CTO도 그 중 하나). 그러나 이집트에서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계기로 한 반서방 운동이 거세지면서, 미국의 의도와 달리 중동의 민족주의 흐름이 더욱 커졌습니다.







58년 1월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멤버로 하는 ‘아랍연합공화국(UAR)’이 출범했습니다. 이에 고무된 이라크의 자유장교단은 7월 14일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뒤집어 엎었습니다. 파이잘2세 국왕과 압둘 일라 왕세자, 왕실 측근이던 알 사이드 총리는 살해됐습니다. 알 사이드는 여장을 하고 도망을 치려다가 혁명 다음날 붙잡혀서 죽었다고 하는군요.
혁명을 이끈 압둘 카림 카심(위 사진)은 이집트 가말 압둘 나세르의 범아랍주의를 추정하는 ‘나세리스트’였습니다. 그는 혁명 뒤 총리 겸 국방장관이 됐습니다. 이듬해 카심 정권은 바그다드 협정을 탈퇴하고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했습니다. 또 공산당 창당을 허용하고 석유산업 국유화를 추진했습니다.

카심 정권이 한 일 가운데 무엇이 가장 미국을 자극했을까요? 소련에 가까워진 것? 석유산업을 감히 국유화하려 한 것?

어찌 됐건, 미국은 카심 정권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63년까지 총리직에 있던 카심은 정권 내부 권력투쟁으로 기반이 약해졌습니다. 63년 바트당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카심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69년 바트당의 2인자가 됐고 79년에는 대통령이 돼 철권 독재자로 군림했습니다.

64년의 바트당 쿠데타를 지원한 미 중앙정보국(CIA)는 후세인이 90년대 미국에 반항할 때까지 충실히 그의 정권을 지원했습니다. 앞서 이란에서도 51년 민족주의자 모사데크 정권이 역시 석유산업 국유화를 추진했다가 미국에 밉보였지요. 결국 53년 미 CIA와 영국 MI6의 공작으로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쫓겨났고 친미 파흘라비(팔레비) 왕조가 다시 실권을 잡습니다. 이 과정이 이라크에서도 반복된 겁니다.

그래놓고 후세인이 독재자인데 국민들이 무능해서 '대신 몰아내주겠다'고 했으니, 누가 믿을까요.


* 7월 14일은 프랑스 혁명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어제의 오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숱한 비화를 낳은 탕산대지진  (0) 2010/07/27
아스완 하이댐  (0) 2010/07/20
이라크의 7.14 혁명  (0) 2010/07/13
미-소 이어준 소녀  (0) 2010/07/06
나치제국의 내분, '긴칼의밤'  (0) 2010/06/30
아르헨 축구의 악몽, '푸에르타 도세 참사'  (0) 2010/06/23
“안녕하세요, 미스터 안드로포프. 제 이름은 서맨사 스미스이고, 나이는 10살입니다. 새로운 일을 맡게 되신 걸 축하드려요. 저는 러시아와 미국이 핵전쟁을 할까봐 무서워요. 혹시 전쟁을 할 것인지를 놓고 투표를 하실 생각인가요? 그런 게 아니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일을 하실 생각인지 제게 얘기해 주세요. 꼭 대답하셔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왜 이 세상을, 최소한 우리 나라를 정복하려고 하는 건지 알고 싶어요. 신은 우리가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살라고 이 세상을 만드셨거든요.”

1982년 11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숨지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미국인 소녀의 편지가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에 실렸다. 물론 안드로포프의 답신은 없었다. 하지만 프라우다에 편지가 실렸다는 사실에 힘을 얻은 스미스는 미국 주재 소련 대사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안드로포프 서기장이 답장을 보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83년 4월 26일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친애하는 서맨사, 편지는 잘 받았다. <톰 소여>의 친구 베키처럼 용감하고 정직한 아이로구나. 마크 트웨인의 그 책은 우리 나라 아이들도 아주 좋아한단다. 핵전쟁이 일어날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 진지하고 정직하게 대답해보마. 소련은 지구상에 그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하고 있단다.”



스미스를 담은옛소련의 기념우표



스미스의 책 표지





‘Y. 안드로포프’라는 서명이 담긴, 안드로포프의 답장이었다. 안드로포프가 권력을 물려받았을 당시 미국 언론들에 실린 그에 관한 기사는 ‘서방에 더 큰 위협이 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내용이 주를 이뤘다. 안드로포프는 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부다페스트 주재 소련대사로 있으면서 민중혁명을 짓밟게 만든 인물이었다. 모스크바 복귀 뒤에는 KGB의 수장을 맡아 반체제 세력을 억압하며 권력을 강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인권 투쟁이라는 것은 소련의 근간을 흔들려는 광범위한 제국주의자들의 책동의 일환일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집권한 것과 때를 같이 해 미국에서는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해 ‘스타워즈’로 알려진 군비경쟁에 불을 붙였다. 미-소 냉전이 위기로 치달을수록 핵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반전반핵 분위기에도 힘이 실렸다.

스미스는 캐나다와 가까운 메인 주의 홀튼에서 태어나, 어릴 적 맨체스터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강사였고, 어머니는 공무원이었다.
시사주간지 타임의 커버스토리로 다뤄진 안드로포프 취임 기사를 읽은 뒤 “이 사람이 그렇게 무서우면 편지를 써서 전쟁을 할 건지 말 건지 물어보면 되잖아요”라 물었다 한다. “네가 해보지 그러니(Why don‘t you)”라는 어머니의 대답이 소녀의 삶을 바꿨다. 냉전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소녀의 편지는 두 수퍼파워를 잇는 다리가 됐다. 미국은 물론, 유럽과 소련의 미디어들은 ‘어린 친선대사’로 떠오른 소녀에게 열광했다.

스미스는 마침내 83년 7월 7일 안드로포프의 초대를 받아 부모와 함께 소련 땅을 밟았다. 2주 동안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스부르크), 크림반도 등을 둘러본 스미스는 미국에 돌아가서 “그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다는 걸 알았다”며 소련인들의 환대를 알렸다. 정작 모스크바에서 안드로포프와 만나지는 못했고, 전화 통화만 했다고 한다.

스미스는 미국 미디어의 유명인사가 됐다. 84년은 대선이 있는 해였다. 디즈니 채널에 ‘서맨서 스미스 워싱턴에 가다’라는 어린이 코너가 만들어지는 등, 스미스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분위기도 커졌다.
그러나 소녀의 인생은 길지 못했다. 85년 8월 스미스는 영화에 출연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13년의 짧은 삶을 살다간 스미스의 죽음에 미국은 물론 소련인들도 함께 슬퍼했다. 소련의 마지막 대통령이 된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레이건 미 대통령도 애도 서한을 보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어제의 오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스완 하이댐  (0) 2010/07/20
이라크의 7.14 혁명  (0) 2010/07/13
미-소 이어준 소녀  (0) 2010/07/06
나치제국의 내분, '긴칼의밤'  (0) 2010/06/30
아르헨 축구의 악몽, '푸에르타 도세 참사'  (0) 2010/06/23
물리학자 이휘소의 죽음  (1) 2010/06/16
하인리히 히믈러는 나치 제국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유대인 강제수용소와 대량학살의 주범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SS라는 약칭으로 알려진 아돌프 히틀러의 친위대를 이끈 것이 히믈러다.
1900년 뮌헨 근교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히믈러는 23년 에른스트 룀이 이끄는 나치 돌격대(SA)에 가입했고, 히틀러·룀과 함께 뮌헨에서 ‘맥주홀 폭동’으로 알려진 폭동을 일으켰다. 2년 뒤에는 친위대에 가입했으며 친위대 안에서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히믈러는 맥주홀 폭동 때 히틀러와 룀이 징역형을 선고받은 반면 자신은 그냥 풀려났던 것에 끝없는 회한을 표했을 정도로 맹목적인 히틀러 추종자였다. 히틀러도 히믈러를 점차 신임하게 됐고, 마침내 히믈러는 29년 친위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룀의 돌격대가 대규모 무력부대였다면 히믈러는 친위대를 히틀러 최측근의 정예 조직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히믈러 밑에서 친위대의 규모와 역할은 갈수록 커졌다. 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할 당시 친위대 조직원은 5만2000명에 달했다. 그 해 가을 히믈러는 ‘친위대 제국총통(Reichsfuhrer-SS)’의 호칭을 얻었으며 돌격대 사령관과 동급으로 승진했다.





세력을 키운 히믈러는 룀의 돌격대와 친위대를 분리, 무력을 독점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히틀러에 무조건 복종하는 히믈러와 달리 룀은 야심만만한 사람이었고, 돌격대를 아예 독일 제3제국의 정규군으로 만들려 했다. 이 때문에 히틀러와 룀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당시는 아직 히틀러가 절대권력을 굳히기 전이었다. 독일 정·재계와 군부의 보수세력이 돌격대의 횡포에 불만을 가진 것을 알았던 히틀러는 룀을 숙청하고 싶어했다. 집권한 히틀러에게 룀과 돌격대는 이제 방해만 되는 짐이었다.
히믈러는 이 균열을 치고들어가, 룀과 돌격대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 34년 6월 30일 이른바 ‘긴 칼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이었다. 히믈러의 친위대와 나치 비밀경찰 게슈타포가 뮌헨 등지에서 룀 세력을 기습, 85명을 쿠데타 기도 혐의로 ‘처형’하고 수백명을 체포했다. 사흘간 계속된 유혈작전에서 룀 세력과 아무 관계 없던 히틀러의 정적들도 살해됐다. 룀은 붙잡혀 뮌헨 감옥에 수감돼 자결을 강요당했으며, 이를 거부한 뒤 결국 친위대원의 손에 살해됐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엘 수페르클라시코. 영어식으로 말하면 ‘수퍼 클래식 더비’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레알마드리드의 엘 클라시코 더비도 유명하지만,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1부 리그)의 보카 후니오르스리베르 플라테의 경기도 치열하기로는 그 못잖다.
마라도나가 뛰었던 팀으로 유명한 보카는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명문 중의 명문으로 리켈메, 델가도, 테베스 등이 이 팀을 거쳐갔거나 지금도 뛰고 있다. 리베르 또한 에르난 크레스포를 비롯해 아얄라, 사비올라, 캄비아소 등 쟁쟁한 선수들이 거쳐갔던 클럽이다.
두 클럽 모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연고로 하는데, 출발부터 따지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시티처럼 보카는 노동자들의 사랑을 받던 구단, 리베르는 부르주아들이 좋아하는 구단이었다. 지역적으로도 보카는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보카지역에 둥지를 틀고 있고 리베르는 중산층이 밀집한 누녜스에 자리잡고 있다. 아르헨티나 축구팬의 70%는 두 클럽 팬이라 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기록 상 최초의 수페르클라시코는 1913년 8월 24일 열려 리베르가 2대1로 이긴 것으로 되어있다. 양팀의 역대 전적은 막상막하다. 아르헨티나축구연맹(AFA) 등에 따르면 올 3월까지 리그경기에서 보카가 68승, 리베르 61승을 거뒀고 무승부로 끝난 경기가 57번이다. 스페인 산탄데르 그룹이 후원하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수페르코파 수드 아메리카나(남미수퍼컵) 등 여러 대회를 종합하면 보카 82승, 리베르 74승, 무승부 71번으로 역시 전적이 비슷하다.

두 팀의 더비가 치열한 만큼 양팀 팬들의 라이벌 의식도 강하다. ‘바라스 브라바스(barras bravas)’라 불리는 아르헨티나 훌리건들의 난동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거기다가 수페르클라시코라는 계기가 겹치면 싸움이 일어나기 일쑤다. 보카 팬들은 상대방을 가이나스(gallinas·닭, 겁쟁이)라 부르며 닭을 끌고나와 놀리곤 한다. 반대로 리베르 팬들은 보카 팬들을 푸에르코스(puercos·돼지, 지저분하다는 뜻)라 공격한다고 한다.



리베르 플라테의 홈인 엘 모누멘탈 스타디움



100년 가까이 이어져온 두 팀의 열띤 경기에서 사고가 없었을 리 없다. 68년 6월 23일 통칭 ‘엘 모누멘탈(정식 명칭은 안토니오 베스푸치오 자유 기념 경기장 Estadio Monumental Antonio Vespucio Liberti)’로 불리는 누녜스의 리베르 스타디움에서 더비가 끝난 뒤 관객들이 경기장 12번 출구(Puerta 12·푸에르타 도세)에서 압사당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모두 74명이 죽고 150명의 팬들이 다친, 이른바 ‘푸에르타 도세 참사’였다.
아르헨티나 축구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고였다. 희생자 평균연령이 19살이었다고 하니, 대부분의 사망자가 청소년과 젊은 층이었던 셈이다. 문제의 경기는 0:0으로 끝났는데, 종료 뒤 보카 팬들이 위층에서 밑으로 불붙은 종이를 던지자 피하려던 아래층 관중들이 출구로 몰리면서 참사가 벌어졌다고 한다.

원초적 감정을 자극하는 경기의 특성 탓도 있을 것이고, 많은 지역에서 축구장이 거의 유일한 다중 집결시설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안전기준을 지키지 않고 부실하게 짓거나, 규정보다 많은 인원을 관중으로 들이는 것도 문제일 것이다. 아무튼 축구장에서는 유독 대형참사가 잦다.
71년 초 스코틀랜드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에서는 퇴장하던 관중들이 동점골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기 위해 되돌아가다가 기둥이 무너져 66명이 숨졌다. 3년뒤 이집트 카이로의 자말렉 경기장에서는 담이 무너져 49명이 숨졌다.
82년 러시아 모스크바의 레닌경기장에서 유럽축구연맹(UEFA)컵 2라운드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와 네덜란드 할렘의 경기가 열렸다. 끝무렵 추가골이 터지자 이미 퇴장했다가 함성을 듣고 다시 들어오려는 이들, 나가려는 이들이 미끄러운 계단에 한데 넘어져 참사가 일어났다. 정부 발표로는 66명이 숨졌다지만 실제로는 300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얘기도 있다.

팬들 난동으로 압사사고가 난 적도 있다. 유명한 벨기에의 ‘헤이셀 사건’이다. 85년 브뤼셀의 헤이셀 경기장에서 잉글랜드의 리버풀과 이탈리아의 유벤투스가 유러피언컵 결승전을 치렀다. 경기는 유벤투스가 1대0으로 이겼는데, 이미 시작도 하기 전 시내에서부터 난동을 부리며 경기장에 몰려든 양팀 팬들이 맞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이 소동으로 경기장이 무너져 39명이 숨지고 454명이 다쳤다. 이 참사 때문에 잉글랜드 클럽들은 유럽대회 출전이 5년간 금지되기도 했다.

88년에는 네팔 카트만두 국립경기장에서 네팔 클럽 자낙푸르와 방글라데시 팀 무크티 조다의 경기 때 천둥번개에 놀란 관중들이 출구로 몰리면서 100명 가까이 숨졌다. 이듬해에는 영국 셰필드의 힐스버러 경기장 FA컵 준결승 리버풀-노팅엄 포리스트 경기 때 벽이 무너져 95명이 숨졌다.
98년 월드컵을 앞두고 96년 10월 과테말라의 마테오 플로레스 경기장에서 열린 과테말라-코스타리카 지역예선에서도 관중이 수용규모보다 많이 들어와 81명이 압사했다. 2001년 가나 수도 아크라에서도 경기장 압사사고로 100명 이상이 숨졌다.

세계 최대의 축구장 참사는 64년 페루에서 일어났다. 그 해 5월 24일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리마 국립경기장에서 페루와 아르헨티나의 예선전이 펼쳐졌다.
아르헨티나가 1대0으로 앞서고 있었는데, 경기종료를 2분 앞두고 페루가 동점골을 넣었다. 하지만 주심은 노골을 선언했다. 관중들이 그라운드에 밀려내려왔고 진압경찰이 뛰어들었다. 아수라장 속에 빠져나가려던 축구팬 318명이 숨졌다. 경기장 담을 무너뜨리고 몰려나간 관중 수만명은 폭도로 변했고, 페루 정부는 이튿날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했다. 정부는 계엄령을 내린 끝에 한달이 지나서야 리마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우주의 탄생은 이렇다. 태초에 빅뱅이라는 대폭발이 일어나 우리 우주가 생겼다. 빅뱅이 일어난 직후 어떤 요인에 의해 우주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에너지가 들어차게 됐다. 이를 ‘표준모델 이론’이라 부른다. 안타깝게도 현재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구성 물질은 우주 전체의 4%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암흑 물질(23%)과 암흑 에너지(73%)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물질들을 구성하는 입자는 각기 다른 질량을 갖고 있는데, 입자들의 질량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는 수수께끼다. 그래서 영국 물리학자 피터 힉스는 이른바 ‘힉스 입자’라는 것을 고안해냈다. ‘신의 입자’로 불리는 힉스 입자에 의해 각 입자들의 질량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힉스 입자의 실체는 관측된 적도, 측정된 적도 없었다.
그래서 스위스 제네바의 유럽핵물리연구소(CERN)는 엄청나게 비싼 ‘거대 강(强)입자 가속기(LHC)’라는 것을 만들어 지난해 가동을 시작했다. ‘태초의 상황’을 재현해 힉스입자가 튀어나오는지 보기로 한 것이다. LHC는 가동을 시작하자마자 고장이 나 수리를 반복하고 있지만 연구는 조금씩이나마 진전을 보이고 있다. AP통신 등 외신들은 15일 “5개 정도의 입자들이 힉스 입자 후보로 거론된다”는 연구결과를 소개했다.






표준모델 이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한국에서는 ‘핵물리학자’로 잘못 알려진, 입자물리학의 대가 고(故) 이휘소(미국명 벤자민 리) 박사다. 이휘소는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 마이애미대학과 피츠버그대학에 유학해 석사 과정을 마쳤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에서 25세에 박사학위를 딴 뒤 이 대학과 스토니브룩 대학, 시카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68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고, 그 3년 뒤에는 세계 최고의 물리학연구소 중 하나인 미국 에너지부 산하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페르미랩)로 자리를 옮겨 입자물리학 연구팀을 이끌었다.

입자물리학 분야에서 당시 이휘소의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이휘소는 ‘힉스 입자에 미치는 강력(강한 상호작용)의 영향’이라는 논문을 발표, 힉스 입자가 자연계의 질량을 갖게 하는 근본 입자이고 그 질량이 양성자에 110배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치를 내놨다. 지금도 힉스 입자에 대한 논문에는 이휘소의 이름이 종종 인용된다. 그 외에도 100여편의 논문을 발표, 미시세계에서 약력(약한 상호작용)의 작용에 대한 학문적 틀을 구축했다.

이휘소는 안타깝게도 77년 6월 16일 일리애나주 키워니 부근에서 교통사고로 숨지고 말았다. 겨우 42세였다. 그의 죽음을 소재로 한 소설이 히트치면서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과학자’로 잘못 알려졌지만, 제자들과 지인들에 따르면 이휘소는 핵개발과 상관없는 이론물리학자였을 뿐 아니라 핵무기 개발에 반대하는 중도-진보적인 시각의 과학자였다고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고대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 중에는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이해하기 힘들거나 엽기적인 것들도 종종 눈에 띈다. 로마의 황후였던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를 둘러싼 이야기들도 그런 것들 중 하나다.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의 두상


옥타비아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딸로 서기 39년 쯤 로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클라우디우스의 사촌인 발레리아 메살리나였다. 옥타비아라는 이름은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이자 클라우디우스의 할머니였던 옥타비아에게서 따온 것이었다.
옥타비아의 어머니 메살리나는 남편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48년 처형됐다. 클라우디우스는 그 뒤 역시 사촌지간인 아그리피나와 재혼했다. 아그리피나도 재혼이었는데, 전남편에게서 얻은 아들 네로를 데리고 황실로 들어왔다. 옥타비아는 어릴 적부터 루시우스 실라누스라는 사람과 약혼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술책이 뛰어나고 머리가 좋았던 아그리피나는 이 약혼을 물리고 자기 아들 네로와 옥타비아를 짝지어주었다.
그렇게 해서 네로와 옥타비아는 53년 6월 9일 혼례를 올렸다. 하지만 옥타비아의 인생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아버지 클라우디우스가 이듬해 숨지자, 네로는 옥타비아의 오빠인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한 뒤 황제 자리를 빼앗았다. 그 다음엔 네로와 친어머니 아그리피나가 권력다툼을 벌였다. 네로는 자기 어머니까지 59년 살해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옥타비아는 스스로의 감정을 숨기고 사는 법을 배웠다.



요건 네로



기록에 따르면 로마 시민들은 네로를 싫어했지만 옥타비아 황후만큼은 좋아했다고 한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옥타비아를 가리켜 “귀족적이고 덕성 있는 아내”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네로는 옥타비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점점 싫증을 냈다. 여러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며 옥타비아를 구박했다.
처음에 네로의 마음을 빼앗은 여성은 열서너살 밖에 되지 않았던 클라우디아 악테라는 소녀였고, 그 다음은 폼페이 태생인 포패아 사비나였다. 포패아에 빠진 네로가 옥타비아를 박대하자 황실 주변에서 비난이 높았다. 네로는 옥타비아에게 사과를 하며 다독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포패아가 임신을 하자 네로는 아예 옥타비아와 이혼을 하고 내쫓은 뒤 포패아를 황후로 맞았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네로와 포패아는 옥타비아를 판다테리아라는 외진 섬으로 내쫓았다. 로마인들은 옥타비아에 대한 네로의 비정한 처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옥타비아를 복귀시키라는 거리 시위까지 벌어졌다. 엇나간 네로는 결혼기념일인 62년 6월 9일 옥타비아를 처형해버렸다. 그 후로도 광인과 같은 악행을 일삼던 네로는 만 6년 뒤인 68년 6월 9일 전처를 기리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것다/남녘은 똥덩어리 둥둥/구정물 한강가에 동빙고동 우뚝/북녘은 털 빠진 닭똥구멍 민둥/벗은 산 만장 아래 성북동 수유동 뾰쪽/남북간에 오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게딱지 다닥 꼬딱지 다닥 그 위에 불쑥/장충동 약수동 솟을대문 제멋대로 와장창/(중략)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간뗑이 부어 남산만하고 목질기기 동탁배꼽 같은/천하흉포 오적의 소굴이렷다.”


1970년 5월, 잡지 ‘사상계’에 김지하 시인의 시 한편이 발표됐다. 박정희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담시(譚詩)라는 형식으로 발표돼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오적(五賊)’이라는 시였다. 시인은 당대의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세력들을 ‘목질기기 동탁배꼽같은 천하흉포 오적’으로 묶어 부패와 타락상을 질타했다. 당초 이 시는 김지하의 지인이던 사상계 편집위원 김승균의 청탁에 따라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당인 신민당이 기관지 ‘민주전선’ 6월1일자에 이 시를 실으면서 ‘오적’은 지식인들 사이의 풍자를 벗어나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민주전선은 이튿날 곧바로 압수됐고, 김지하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시인은 앞날을 예견한 듯 이미 ‘오적’의 첫머리에서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볼기를 맞은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고 읊은 바 있다. 사상계 대표인 부완혁과 김승균, 민주전선 편집국장 김용성도 함께 갇혔다. 김지하는 보석으로 풀려났고 나중에 선고유예를 받았지만 사상계는 결국 그 해 9월 폐간됐다.

김지하라는 이의 그 뒤 행보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1991년 그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글을 써 독재정권에 맞선 젊은이들의 분신을 비하하고 비난했다. 김지하에 대해 ‘변절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훗날 그는 “내가 붙인 제목을 신문사에서 자극적인 것으로 바꿨다”고 ‘해명’을 했다. 지난해에는 2008년의 촛불시위를 “문화 혁명으로 승화하자”고 주장해 다시 주목을 받았다.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지식인들의 변절 혹은 변신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넘쳐난다. 하지만 변했어야 하는데 변하지 않은 것들도 있다. ‘다섯 도둑’의 면면은 바뀌었을지언정 권력층의 오만함과 횡포는 근래 더해졌다. 김지하의 필화 이후 40년이 지난 지금도 ‘오적’들은 사람들의 말과 글을 막기 위해 기를 쓰고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어제의 오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물리학자 이휘소의 죽음  (1) 2010/06/16
옥타비아와 네로의 비극  (0) 2010/06/08
30년 전 '오적' 김지하 구속  (0) 2010/06/01
어제의 오늘/ 다우존스지수의 등장  (2) 2010/05/25
오래 산 님들.  (2) 2010/05/18
남산 케이블카의 역사  (0) 2010/05/11
미국 저널리스트 찰스 다우는 1882년 에드워드 존스와 함께 ‘다우존스&컴퍼니’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1896년 5월 26일 다우는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DJIA·다우지수)’라는 것을 처음 만들어 공개했다. 오늘날 글로벌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지구 반대편까지 출렁이게 만드는 뉴욕 증시의 주요 지수 중 하나가 탄생한 것이다.







다우는 1884년부터 ‘다우존스평균’이라는 이름으로 대형 철도회사들의 주가 평균치를 계산한 자기만의 지수를 만들고 있었다. 이를 12개 기업 주식으로 확대해 체계화한 것이 다우지수였다. 다우는 기업들의 주가 총액을 계산한 뒤 ‘다우 젯수(Dow Divisor)’로 나누는 독특한 방식으로 이들 기업들의 주가 평균을 냈다. 초창기에 철도회사들 중심으로 돼 있던 종목 구성은 제조업체 위주로 바뀌었다. 다우는 이 주가지수를 ‘커스터머스 애프터눈 레터’라는 이름의 2쪽짜리 증시 소식지에 게재했는데, 이 소식지가 월스트리트저널의 전신이다.

1928년 다우지수에 들어가는 기업 수가 30개로 늘어나면서 지금과 같은 시스템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곧이어 닥친 증시 대폭락과 대공황으로 다우지수는 90%가 폭락했다. 그 후 지금까지 등락을 거듭하면서 이 지수는 미국 경제의 지표로 자리잡았다.
기준이 되는 30개 기업의 업종은 다양하다. 코카콜라, 듀퐁, 월트디즈니, 월마트, 보잉 등 미국의 전통적인 대기업을 비롯해 엑손모빌과 셰브런텍사코 등 에너지기업, 뱅크오브아메리카와 JP모건체이스 등 대형 금융회사들도 망라돼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AT&T, 시스코시스템스 같은 정보통신기술(IT) 분야 기업들도 끼어 있다. 하지만 그 중 1896년 지수가 만들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회사는 제너럴일렉트릭(GE) 뿐이다.

다우지수의 1일 낙폭이 가장 컸던 때는 언제였을까. 1, 2위는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촉발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였다. 그 해 9월 29일과 10월 5일 각각 777.68포인트와 733.08포인트가 떨어졌다. 3위는 2001년 9·11 테러 직후인 9월 17일로, 하루만에 684.81포인트가 빠졌다. 그러나 퍼센티지로 보면 87년 10월 19일 ‘블랙먼데이’ 때 22.61%가 떨어져 최대 폭락을 기록했다. 2, 3위는 대공황의 전조가 된 29년 10월 28, 29일의 대폭락 때였다.
가장 많이 오른 때는 역시 2008년 금융위기 뒤로, 그 해 10월 13일과 10월 28일 936.42포인트, 889.35포인트가 올랐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어제의 오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옥타비아와 네로의 비극  (0) 2010/06/08
30년 전 '오적' 김지하 구속  (0) 2010/06/01
어제의 오늘/ 다우존스지수의 등장  (2) 2010/05/25
오래 산 님들.  (2) 2010/05/18
남산 케이블카의 역사  (0) 2010/05/11
'샤넬 넘버5'가 태어나기까지  (0) 2010/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