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인샤알라, 중동이슬람

인터뷰/ KOTRA 바그다드 무역관 정종래 관장

딸기21 2002. 10. 1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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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전체가 가난했던 1970년대, 한국 노동자들은 '열사의 사막'에서 길을 닦고 건물을 올리며 부국의 기반을 만들었다. '중동'이라는 말을 들을 때 한국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석유와 함께 흑백사진 속에 남아있는 노동자들의 땀에 젖은 얼굴일 것이다.

70년대 '오일붐'을 거쳐 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90년대 걸프전으로 이어지면서 중동의 정세는 계속 변화해갔고 한국의 경제력도 비교될 수 없게 커졌지만, 여전히 중동은 우리에게는 석유라는 천혜의 축복을 받은 부러운 땅이다. 언제고 다시 다가올 엄청난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전운이 감돌고 있는 이라크에서 국내 기업들을 위해 홀로 '수출전선'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바그다드무역관의 정종래(鄭宗來·40) 관장. 티그리스강이 내다보이는 바그다드무역관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현지에서 보는 이라크 정세와 이라크 시장의 특징, 국내기업들의 진출전망 등을 들어봤다.

"한국에서는 다들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곧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현지에서 느끼는 '체감위험도'는 사실 그리 높지 않습니다."
정관장은 전쟁에 대한 바그다드의 분위기를 전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위기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담 후세인 정권이 지난달 유엔의 무기사찰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한 데에서 보이듯 전쟁을 피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사태가 해결될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다고 봅니다".

정관장이 이라크 위기를 과대평가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라크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한국 기업들의 시야가 좀더 넓어져야 한다는 얘기다.
이라크는 12년째 유엔의 경제제재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지난 96년부터 유엔의 '석유-식량 교환계획'에 따라 매년 100억달러 이상의 석유를 수출하고 있다. 이라크 정부는 유엔의 승인하에 수출대금을 이용한 외국과의 각종 구매계약을 맺는데, '우호국' 순서에 따라 계약대상 기업을 결정한다. "그런데 이 100억달러 시장의 대부분을 러시아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고, 우리 기업들은 한국이라는 이름을 못 내걸고 러시아 업체를 통해 '서럽게' 수출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지난해 '석유-식량 교환계획'에 따라 이라크 정부와 국내 기업간에 맺어진 물품 구매계약액은 총 7300만 달러. 수출품목은 중장비를 포함, 차량이 80%에 이르고 각종 기계류가 나머지를 차지한다.
"1600억달러 규모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전체 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자면 턱없이 적지만 제재가 해제되면 그 시장은 곧장 300억달러 규모로 커질 겁니다. 일단 제재만 풀리면 300억달러 시장 중에 10억달러 정도는 우리가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시장 전망이 상당히 밝은 편인데도 아직까지 이라크 시장에 대한 국내기업들의 적극적인 진출은 그리 많지는 않다고 정관장은 안타까워했다.

현재 인근 요르단의 암만에 국내기업 10여곳이 지사를 내놓고 이라크 시장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고 국내 섬유업체나 자동차·기계부품 생산업체들이 진출 가능성을 타진해오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이라크측에서 국내기업들에 물품구매계약을 제의하는데도 '이라크'라는 이름만 듣고 전쟁위기를 떠올리며 선뜻 응하지 않는 업체들이 많다는 것.
그렇지만 '석유-식량교환계획'과 연계해 이라크 정부와 공식 구매계약을 하지 않더라도 이라크의 민간 바이어들을 통해 국산 제품을 수출할 길이 지금도 열려 있고, 이 경우 암만과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두바이 등을 통해 수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전쟁을 걱정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정관장은 설명했다.
"이라크는 지난 20년간 전쟁과 제재로 손발이 묶여 모든 시설과 기계가 낙후된 상태이기 때문에 자동차나 전자·전기부품의 수요가 대단히 많습니다." 그는 특히 최근 전쟁위기가 고조되면서 오히려 물품을 확보하기 위한 수입이 많아지고 통관도 빨라지고 있는 만큼 국내기업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열성 어린 설명을 듣다보니, 문득 그와 이라크의 '인연'이 궁금해졌다. 외국어대 아랍어과를 졸업하고 지난 90년 KOTRA에 입사한 뒤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이라크가 두 번째 부임지라는데, 굳이 전운이 감돌고 있는 바그다드 근무를 '자원'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형이 쿠웨이트에서 노동자 생활을 했기 때문에 사실 중동이 제게 낯선 곳은 아닙니다."
쑥스러운 듯 말을 꺼낸 그는 "이라크는 특히 성장가능성이 높은데다 정치적인 문제만 해결되면 성과가 바로 가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다"고 자원 이유를 설명했다. 전쟁이든 아니면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서든, 큰 시장이 열리는 시점에 현장에 있고 싶다는 욕심이 그를 바그다드로 불러낸 셈이다. 그는 "사실은 지난해 부임 결정이 난 뒤 9·11 테러가 발생하고 이라크 전쟁 얘기가 나오자 주변의 만류가 심했다"고 웃으며 털어놨다.

지난해 10월 바그다드에 도착, 이 곳에서 근무한지 이제 1년. 정관장은 바그다드무역관의 유일한 한국인으로, 현지인 직원 3명과 함께 근무하고 있는데 우리와 전혀 다른 문화권에 속한 나라에서 일하면서 힘든 일도 많았을 것 같아 물었더니 "현지인들과의 갈등은 거의 없다"는 다소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이라크 사람들은 다른 아랍권 국가의 사람들에 비해 자존심이 강하면서도 거만하지 않거든요. 국토는 한반도의 2배니까 아주 큰 나라는 아니지만 가진 자원이 많아 그런지 '대국 기질'이 있다고 할까요."

그러나 '업무'와는 별개로, 가족과 함께 이라크에 산다는 것은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닌 듯했다. 부인, 세 딸과 함께 바그다드 시내 만수르거리 부근에 살고 있는데, 역시 아이들 교육이 가장 큰 고민거리라고 했다. 유엔에서 운영하는 이라크의 유일한 외국인학교에 딸들을 보내고 있지만 현지 교육의 질이 떨어지는 것이 큰 문제다.
또 하나 골칫거리는 음식 문제. 별다른 외식 장소도 없고 식료품의 질도 낮기 때문에 간간이 암만에 나가 배추를 사다가 김치를 담가먹는다. 한국 교민이 워낙 적다보니, 그의 집은 한국손님들이 찾아올 때면 으레 '게스트하우스'가 되곤 한다.

"지금 현재는 위기에 처해 있지만 누가 뭐래도 이라크는 커다란 시장이고, 부국으로의 잠재력을 갖고 있는 나라입니다. 국내 기업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진출한다면 이 나라는 결코 '먼 나라'가 아닐 겁니다."
정관장은 국내기업들이 이라크 시장에서 성과를 거두려면 중장기적인 안목과 적극적인 사고가 필요하다고 당부하며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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