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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영방송 제자리 찾기](3)전문가형 BBC, 시민형 ZDF···제도는 제각각, 언론자유는 ‘운영’이 좌우

딸기21 2017. 9. 1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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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아시아·태평양 방송연맹(ABU)은 ‘공영방송’에 대해 ‘민영도, 국영도 아니며 정치적·재정적으로 독립된 방송’이라고 규정했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시민의, 시민에 의해, 시민을 위해 존재하는 공적 제도’로서 공영방송은 사회적 책무를 갖는다고 언론학자들은 말한다.


MBC 스포츠취재부 기자들이 12일 LG트윈스와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가 열린 서울 잠실야구장 외야석에서 공영방송 정상화를 바라며 ‘돌아와요 마봉춘(MBC·KBS)’이라 쓰인 티셔츠를 입고 선전전을 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나라마다 공영방송 소유구조나 정부와의 관계는 조금씩 다르다. 공영방송들은 독립성을 강조한 ‘전문가모델’, 의회 다수당이나 정부에 의해 직접적으로 통제되는 ‘정부모델’, 의석 비율에 따라 정당들이 영향력을 갖는 ‘의회모델’, 의회 정당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집단들도 발언권을 갖는 ‘시민모델’ 등으로 나뉜다. 여러 모델들은 그 나라의 방송 역사와 시장 구조, 정부 방침 등에 따라 서로 다르게 발전해왔다.


방송 독립성 최우선시하는 BBC

 

공영방송의 대명사가 된 영국 BBC방송은 1922년 설립됐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영방송인 BBC는 2016년 기준으로 직원이 2만900명에 달하는 거대 조직이다. 수신료에 기반을 둔 재정구조였다가 2007년 수신료 모델에서 벗어났다.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정부가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0.36%에 해당하는 돈을 이 방송 재정에 투입하며, 대략 10년 단위로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경영과 관리·감독 권한이 조정된다. 경영위원회와 실행위원회라는 두 기구가 경영과 관리·감독을 맡다가 2007년 ‘BBC 트러스트(Trust)’로 일원화했다. 당시의 제도개선 초점은 위원 후보자들의 명단을 공개하고 청문회를 거치게 해 선임 과정의 투명성을 높인 것이었다.

 

하지만 올해부터 트러스트는 폐지됐고, 왕실칙령(Royal Charter)에 따라 방송·통신·우편서비스 규제사무소(Ofcom)가 관리·감독을 맡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시스템이 2027년까지 이어진다. 방송사 경영은 이사회가 하지만 내무부로부터 방송허가를 갱신받는다. 새 시스템 도입을 앞두고 영국 내에서도 정부 간섭과 개입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없지 않았으나 규제사무소가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구이고 법령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 BBC 사장은 계속 이사회에서 선임한다는 점 등에서 독립성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는 견해가 우세했다.

 

BBC 이사회는 14명으로 구성된다. 정부 추천 인사 5명에 웨일스·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 등 지역 대표들, 의회 동의를 받아 뽑은 이사들, BBC 내부에서 추천한 상임이사들이다. 정부 측 이사들이 다수를 점하지 못하게 구성돼 있는 것이다. 정부나 의회 영향을 최소화하고 방송사와 저널리스트 즉 ‘전문가들’에게 운영을 맡기는 BBC 같은 전문가모델은 독립성이 강한 것이 강점이다.


상·하원이 관리감독 관여하는 프랑스

 

일본 NHK는 한국의 KBS처럼 수신료를 바탕으로 운영되며 정부가 깊이 개입할 수 있는 ‘정부모델’로 분류된다. NHK의 지배구조를 구성하는 기구는 경영위원회, 이사회, 감사다. 경영위원회는 방송사 사업 운영을 감시하고 감독한다. 위원 12명은 총리가 지명해 중의원과 참의원의 동의를 얻어 임명한다. 재계와 과학·문화·교육계 등 각 분야 전문가를 안배하며 지역별로도 배분한다. 최고경영자인 회장과 이사회 임명권도 경영위원회가 갖고 있다.

 


프랑스는 공영방송 지분을 대부분 정부가 갖고 있지만 경영상의 결정이나 관리·감독은 의회 영향 아래에 있다. 재정의 70%가 수신료 수입으로 메워지며 7%는 정부가 지원한다. 대략 8%를 차지하는 광고 수입에 그 외의 라이선스 수입 등을 더해 운영된다. 정부 지원금은 GDP의 0.25% 수준에서 결정된다. 수신료 인상, 광고 수입 비중 등을 모두 정부가 결정한다. 시청각감독위원회(CSA)가 공영방송들 전체에 미치는 결정을 내리며, 수신료를 거둬들인 뒤 여러 채널들에 배분한다. CSA 멤버는 위원장을 포함해 7명인데 3명은 하원에서, 3명은 상원에서 임명하며 위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대표적인 공영방송인 프랑스 텔레비지옹의 경우 1960~1980년대 독점체제로 정부가 소유하고 방송정책에 강력하게 개입했다. 그러다 1987년 TF1을 시작으로 차례로 민영화했다. 여러 곡절을 거친 끝에 정부 소유 방송들은 1992년 프랑스2, 프랑스3 채널 등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갈라졌다가 2000년 프랑스 텔레비지옹SA라는 이름의 지주회사 밑으로 흡수됐다.

 

2008년부터 공영방송 사장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프랑스2와 프랑스3은 지금도 정부가 지분을 100% 갖고 있고 이 채널들이 여러 공영방송 지분을 상호 보유하는 식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중요한 것은 사장을 누가 임명하느냐, 정부가 지분을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민영방송이라 하더라도 ‘라디오와 TV 채널은 공공서비스’라는 인식이 확고하다. 2015년 사회당 정부가 방송 지원금을 200만유로 깎자 공영 라디오방송은 예산삭감에 항의하며 28일간 방송을 중단했다.

 

다양성 반영하는 독일의 ‘시민모델’

 

최근 국내에서 공영방송 지배구조의 대안으로 거론되는 것은 독일의 ‘시민모델’이다. 대표적인 공영채널인 1방송(Das Erste)과 ZDF는 민영방송들을 압도하는 시청률을 보인다. 연방국가인 독일에는 주별로 1방송을 송출하는 방송국들이 총 7곳 있다. 이들의 연방 네트워크가 지역 공영방송의 연합체인 ARD다.

 

ARD에 소속된 강 방송사들과 ZDF는 각기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방송평의회를 두고 있다. ARD 내 방송사들의 평의회 규모는 20~60명 선이며 ZDF의 평의회는 60명으로 돼 있다. ZDF 평의회의 경우 16명은 주별로 선임한다. 2명은 연방정부, 2명은 개신교회, 2명은 가톨릭교회, 1명은 유대인중앙협의회, 21명은 시민사회와 직능별 대표들로 구성한다. 그 외에 16명을 각 주들이 지명하지만 주 대표들과는 별개로 각기 다른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위원들이다. 여러 이해집단과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심영섭 경희사이버대 겸임교수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시민평의회라는 모델을 공영방송 관리감독 시스템에서도 받아들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각국의 공영방송 시스템은 이처럼 제각각이고, 장단점이 다르다. 결국 문제는 제도가 아닌 ‘운영’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정치권과 사회의 상식, 관습과 문화가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언론의 자유를 얼마나 지켜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정부가 규제와 관리·감독 기구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부모델이지만 KBS와 MBC는 지배구조가 다르다. KBS는 수신료와 광고로, MBC는 광고만으로 운영된다. 지배구조도 두 회사가 다르지만 의회 다수당이 사실상 경영진을 결정한다는 점은 같다. 정준희 중앙대 겸임교수는 “한국의 공영방송은 정부모델에 의회모델을 일부 결합시킨 것이지만 야당 추천 인사들은 숫자가 적어 사실상 의결권이 없는 구조”라며 “정치적 대표성, 지역·시민사회의 대표성, 그리고 종사자들의 자율성이 고르게 보장될 수 있도록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독립성, 공정성 둘러싼 고민은 ‘진행형’

 

정부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공영방송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고 사회의 문화적 다양성과 소수자 보호 원칙에 맞는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것이 책임이 있다. 하지만 이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방송종사자들뿐 아니라 정치권력과 사회 전체의 합의, 그리고 감시가 필수적이다. 공영방송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둘러싼 논란은 외국에서도 끊이지 않았다.

 

방송법에 따라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TV를 소유한 모든 가정은 수신료를 납부한다. NHK방송은 자본에 휘둘리지 않고 정치적 편향 없이 중립성을 지킨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왔으나, 최근엔 그런 신화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특히 문제를 일으킨 것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에 편향된 발언과 일본군 위안부 관련 망언 등으로 말썽을 빚은 모미이 가쓰토 전 회장이었다. 3년간 재임한 모미이는 “정부가 오른쪽이라고 하는 것을 (NHK가) 왼쪽이라고 할 수 없다”, “전쟁을 한 어느 나라든 (위안부는) 있었다”는 등의 발언으로 비판을 받았고, 결국 지난해 12월 퇴출됐다. 아베 정권이 2014년 이후 줄줄이 NHK에 친정권 인사들을 내려보낸 것이 근본적인 문제였다는 지적이 일었다. NHK 채널을 차단하는 필터가 팔려나가는 등 수신료 거부가 속출했다. 

 

프랑스의 CSA는 공영방송들의 경영에 관한 결정뿐 아니라 방송의 내용에 대한 규제도 맡는다. 2005년 ‘증오발언’을 내보냈다는 이유로 알마나르TV라는 채널의 방송허가를 중지시키라고 정부에 요청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터키 쿠르드 분리주의 단체와 연결된 메드TV에 대해서도 방송허가 중단 조치를 내렸다. 이런 조치들은 당국의 강력한 감독권한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검열’ 논란도 불거졌다. 특정 종교나 민족집단에 불리한 문화적 잣대를 들이댄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반면 한쪽에선 증오발언을 강력 규제해 시민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지난 5월에는 방송들의 증오발언을 적극 규제하지 않는다며 시민단체가 CSA 앞에서 시위를 했다. 방송의 경영을 관리감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화적 다양성과 시민의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도 당국의 역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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