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구정은의 세계] 집배원의 죽음

딸기21 2017. 7. 12.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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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는 ‘우체국에 간다(Going postal)’는 속어가 있다. 극도로 분노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배경에는 수차례의 유혈참사가 있다. 1986년 8월 오클라호마주 에드먼드의 시간제 집배원 패트릭 셰릴이 자신이 일하던 우체국에서 총기를 난사했다. 셰릴은 10분 만에 우체국 직원 14명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1년에는 뉴저지주 리지우드와 미시간주 로열오크에서, 2년 뒤에는 미시간주 디어본과 캘리포니아주 대너포인트에서 잇달아 우체국 총기난사가 벌어졌다. 거의 대부분 직원들 간의 공격이었다. 2006년에는 캘리포니아주 골레타와 오리건주 베이커시티에서 연달아 살인극이 벌어졌다. 열악한 노동조건, 스트레스와 긴장에 시달리던 직원들이 극단적인 수법을 택하면서 저런 속어까지 나왔다.

 

미국 우정사업국(USPS)은 2015년 기준으로 직원이 61만7000명에 달하는 거대 사업체다. 월마트와 연방정부에 이어 미국 3위의 고용주다. 역사도 길다. 1775년 정부 산하기구로 만들어진 우정사업국의 첫 책임자는 ‘건국의 아버지들’ 가운데 한 명인 벤저민 프랭클린이었다.




1980년대 이후 미국 정부는 우체국에 대한 보조금을 대폭 줄였다. 로널드 레이건 정부가 추진한 예산 감축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e메일 시대’에도 우편물의 양은 오히려 늘었다. 2006년 우체국의 수하물 운송량은 역대 최고를 기록했고 우체국 직원들의 아우성도 커졌다. 의회는 결국 그 해에 노동자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예산 55억달러를 지급하는 우편책임향상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택배가 늘어나고 주말도 없는 삶이 계속됐다. 2013년 2월 우정사업국은 “토요일에는 의약품과 긴급우편, 속달, 포장된 우편물만 배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연방정부가 관련 법까지 만들어 이를 막았다.

 

택배 같은 소화물 수송을 맡고 있는 민간기업 중 대표적인 회사가 UPS다. 팀스터라 불리던 이 회사 노조 조합원 18만5000여명은 1997년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을 벌였다. 비정규직들을 대거 고용하면서 근무조건은 열악해졌고, 노동자들은 연금도 없이 고강도 노동에 투입되던 터였다.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연금 도입, 풀타임 고용 등을 요구해 회사 측의 타협안을 이끌어냈다. 이 싸움은 신자유주의의 횡포에 맞선 ‘미국 노동계급의 승리’로 기록됐다.

 

전신회사 웨스턴유니언은 다른 길을 걸었다. ‘모스부호’로 알려진 새뮤얼 모스가 1844년 전신시스템을 발명하면서 장거리 통신의 역사가 열렸다. 웨스턴유니언은 1851년 설립된 미국의 첫 전신회사였다. 모스가 세운 마그네틱 텔레그래프도 이 회사에 합병됐다. 웨스턴유니언은 이미 19세기 중반에 대서양 통신시스템을 만들었다. 하지만 팩스와 e메일에 밀려 텔레그램(전신)은 퇴물로 전락했고, 웨스턴유니언은 1994년 파산 위기에 몰렸다. 2006년 이 회사는 전신·전보 서비스를 완전히 중단했다.

 

하지만 웨스턴유니언은 다른 분야에서 살아남았다. 나이지리아의 라고스 같은 대도시에서는 어디든 까맣고 노란 글씨의 웨스턴유니언 점포 마크들이 보인다. 외국에 나간 이들이 보내오는 돈이 이 회사를 통해 들어온다. 스페인 마드리드에도 웨스턴유니언 간판들이 즐비하다. 남미로 돈을 보내는 이주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웨스턴유니언은 전신 대신 노동자들의 송금을 통해 세계 곳곳에 뿌리를 내렸다.

 

세계를 넘나드는 문서와 물건의 흐름은 갈수록 늘어난다. 가장 기본적인 서비스업이면서 첨단기술과 글로벌화가 만나는 현장이다. 우편 배달과 통신, 물류·운수, 컴퓨터·금융의 구분도 점점 무의미해지고 있다. 1995년 결성된 영국 통신노조연맹(CWU)에는 우체국, 전신·전화, 케이블 노동자 20만명이 가입돼 있다. 그중에는 운송, 소매, 금융 부문 종사자들도 포함돼 있다. 


영국 BBC가 자랑하는 최장수 애니메이션 <포스트맨 팻>의 주인공 팻은 ‘언제나 행복한 우편배달부’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로지스틱스>라는 책을 쓴 데보라 코웬은 물류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노동에 투입되는 이들의 ‘몸’에 시선을 보낸다. 컴퓨터 기술과 자동화를 통해 관리되는 노동자의 몸은 기업들엔 자원이자 비용이다. 이제는 20세기에 필요했던 훈육(트레이닝)조차 필요 없어지고, 노동자들의 몸은 ‘줄여야 할 비용’ 취급을 받으며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된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지만 임시직과 계약직 등 불안정한 노동형태가 늘어나고 노조는 약해진다. 지구상 여러 곳에서 물류 분야를 이민자 등 취약한 커뮤니티 출신들이 떠맡는 현상도 나타난다.

 

우체국 직원이 분신을 했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에게 막말을 해대고 파업을 ‘나쁜 짓’이라 욕하는 국회의원이 존재하는 2017년의 한국에서. 노동자들이 가진 최대의 자산인 몸을 불사르는 것보다 더 큰 저항이 있을까. 사람과 돈과 물건이 세계를 흐르는 시대에, 노동자들의 삶은 47년 전 전태일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을 때보다 과연 얼마나 나아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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