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구정은의 세계]우상이 사라진 자리

딸기21 2017. 5. 16.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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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우고 차베스의 동상을 무너뜨리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석유대국 베네수엘라에서도 유전지대로 유명한 술리아주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4년 전 세상을 뜬 차베스의 후계자는 반정부 시위에 흔들리고 있고, ‘차비스모’(차베스주의)는 그렇게 끌어내려졌다. 동상이 부서지는 장면은 언제나 그렇듯 시각적 임팩트가 크다. 14년 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는 사담 후세인의 거대한 동상이 무너졌고, 그보다 한참 전에는 스탈린의 동상이 그렇게 됐다. 결국 차베스의 동상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참여민주주의, 21세기형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체제를 추구했건만 그 시도는 ‘실패한 실험’으로만 남을 것 같다. 

 

체제에 신물난 사람들은 그렇게 우상을 끌어내린다. 스탈린 체제는 29년이었고, 사담 체제는 24년이었다. 차베스 체제는 14년, 상대적으로 짧았다. ‘이명박근혜’의 9년은 긴 시간일까? 박정희 집권 기간 만들어진 우상과 신화를 생각하면 촛불시민들이 끌어내린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경상도 표심은 전국과 많이 달랐다지만 이제야 비로소 박정희 우상을 무너뜨린 느낌이다. 그 부스러기들은 미세먼지처럼 여전히 부유하고 있지만.

 

사진 www.notilogia.com


정권이 바뀌고 겨우 일주일 지났을 뿐인데도 뭔가 많이 바뀐 것만 같다. 누구 말마따나 대통령이 아메리카노만 마셔도, 구내식당에서 식판에 밥을 먹어도, 주변 사람들과 산책만 해도 화제가 되고 사람들이 열광한다. 대통령이 ‘출근’했다는 게 화제가 된다. 더 이상 개, 돼지 취급받는 모멸감에 숨이 턱턱 막히지 않아도 되겠구나. 모든 게 정상으로 가는구나. 무엇보다 대통령이 말을 한다. 문법에 맞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솔직담백하고 좋은 말을. 더 이상 대통령으로부터 국민을 협박하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다.

 

스탈린 우상을 무너뜨린 건 후계자인 흐루쇼프였고, 사담을 무너뜨린 건 국민들이기 이전에 미군이었다. 억지로 주입된 신화일지언정 한번 구축된 신화는 사람들 속에 파고들어 깊고 넓게 잔뿌리를 내린다. 공고했던 체제의 잔재들을 시민들이 손 모아 무너뜨리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우린 그걸 해냈다. 하지만 우상이 깨져나가는 일은 한 사회의 분노와 좌절이 임계점을 넘어설 때에야 일어난다. 전체주의와 독재와 이데올로기 공세 속에 지친 이들의 감정이 폭발해 동상을 끌어내리기까지 쌓이고 쌓인 ‘업’은 무겁기만 하다. 그래서 우상을 끌어내린 뒤의 사회는 혼란스럽다. 무언가를 숭배하는 것으로써만 정체성을 확인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이 냉전 붕괴 수준의 체제 변환은 아닐지라도, 9년간 잃어버린 것들과 되찾아야 할 것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경제정의. 언론 자유. 최저시급 1만원. 전염병이 돌면 대처하고, 사고가 나면 수습하는 정부. 녹조 없이 흐르는 강물. 모두 다 필요하다. 세상의 어떤 대통령이 100%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어쩌면 문재인 정부도 여러 실수를 저지를 것이고, 때로는 내 맘에 들지 않는 정책을 들이밀 것이다. 하지만 우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무엇보다 먼저 복원되는 일상의 감각이 가장 반갑다. 동료들과 커피 들고 산책하는 대통령만 보고도 열광하는 건 우리와 같은 시민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말이 통하는 사람, 말이 통하는 사회. 아이들을 구하려다 죽어간 선생님들을 인정해주고 함께 애도해주는 마음. 저녁 먹고 TV 뉴스를 보면서 더 이상 감정적인 스트레스 없이 이러쿵저러쿵 정책을 품평할 수 있는 여유. 조금 더 평등해진 느낌.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는 것 아니냐는, 박정희와 박근혜의 우상이 위압적으로 재등장하는 동안에 내 맘속에서 무참히 깨져나갔던 역사에 대한 믿음과 낙관론이 살짝 다시 고개를 드는 기분이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됐을 때 아마도 미국인들이 이런 기분 아니었을까. 이제 정상으로 돌아간다는, 일상이 전쟁에 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느낌. 하지만 벌써 살짝 걱정이 든다. 미국의 한 베테랑 기자는 장관과 백악관 고문에게 정책에 대해 여러번 캐물었다는 이유로 체포됐고, 시민단체 회원들은 청문회장에서 장관을 ‘비웃었다’는 이유로 기소돼 유죄평결을 받았다고 한다. 세상에 미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하고 놀라기엔 세계 곳곳에서 20세기의 성취들로부터 퇴행하는 움직임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자유, 평등, 포용, 인권, 환경 같은 가치들을 뒤로 물리는 것이 유행이라도 하는 것 같다.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정도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조차 얼마나 애를 쓰며 소중한 가치들을 지켜내야 하는지.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시대가 되어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세상사가 늘 그렇게 되풀이되는 것인지는 아주 오래 살아보지 않아서 뭐라 말하기 힘들지만 우상이 무너진 자리에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혹은 새로운 우상들이 비집고 들어올 수 있다는 걸 역사는 보여준다. 신화를 깨뜨린 우리에겐 이제 신화를 정리하고 치우는 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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