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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미국 우선주의...100년에 걸친 '아메리카 퍼스트'의 역사

딸기21 2016. 11. 12. 0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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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우고 있다. 세계가 걱정할 일이기는 하다.  지금껏 세계를 쥐락펴락하다가, 이제 돈 떨어지고 일자리도 줄고 남의 일 걱정할 처지가 못 되니 '내 집 울타리'만 지키겠다는 것. 아무도 들어오지 마, 우리한테 물건도 팔지 마, 담 쌓을 거야, 싸움패 친구따위 필요 없어, 1진 놀이 이제 안 해... (하지만 내가 불리하면 할 지도 몰라)...

모두 이뤄질 거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트럼프의 말이 진심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미국 우선주의는 트럼프가 처음 말한 게 아니며, 갑자기 튀어나온 주장도 아니다. '아메리카 퍼스트 커미티(AFC)', 어색하지만 번역을 하자면 '미국우선위원회'라는 게 있었다. 1940년 9월 예일대 학생들 중심으로 창립됐다. 


www.charleslindbergh.com


이 단체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면면은 매우 화려하다. 식품회사 퀘이커오츠 창업자의 아들인 더글러스 스튜어트 주니어와 뒤에 미국 대통령이 된 제럴드 포드, 연방대법관이 된 포터 스튜어트 등이 주역이었다. 뒤에 예일대 총장이 된 킹먼 브루스터, 존 F 케네디 정부와 린든 존슨 행정부에서 요직을 지낸 사전트 슈라이버도 있었다. 슈라이버? 맞다, 슈라이버.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부인, JFK의 조카인 그 마리아 슈라이버의 아버지가 사전트 슈라이버다.

JFK도 한때 이 단체에 기부금을 냈고(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최소 100달러를 냈다고 한다), 월트 디즈니도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시카고트리뷴 소유주인 로버트 매코믹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대변인은 찰스 린드버그였다. 비행기 조종사 린드버그. 바야흐로 유럽의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흘러가던 시기, 이들이 내세운 주장은 “영국이 패전할 것 같다 해도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 끼어들어서는 안된다”는 극단적인 고립주의였다. 그 대신에 이들은 나치 히틀러와의 협상을 주장했다. 2차 대전 기간에 이 단체의 회원은 80만명에 이르렀다! 수잔 던이라는 역사학자가 CNN 웹사이트에 기고한 것을 보니, 회원들 중 대부분이 미드웨스트 사람들이었단다.


공교롭다. 미드웨스트, 즉 미국의 중서부 내륙지대, 
아이오와, 미네소타, 미시간, 위스콘신, 인디애나 등은 트럼프가 마지막까지 가장 공을 들인 지역이었고, 또 트럼프 승리의 견인차가 돼준 곳들이었다. 이른바 '러스트벨트'가 몰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고립주의에는 역사가 있었던 셈이다.

다시 
AFC로 넘어가 보면- 2차 대전에 끼어들지 말자는 주장은 평화주의와는 결의 다르다. 심지어 인종주의와 더 관련이 많았던 듯 싶다. 이 단체 회원들 중에 그 유명한 헨리 포드도 있었다. 포드는 반유대주의로 악명 높았고, 린드버그 역시 수상쩍은 행동을 많이 보였다고 한다. 헨리 포드는 너무 지나친 반유대주의 탓에 조직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것은, 마치 샌더스와 트럼프의 지지기반이 통하듯 75년 전에도 공산주의자들과 AFC의 지지기반이 겹쳤다는 점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평화주의를 내세워 고립주의와 불개입을 선호했다. 이들의 태도가 바뀐 것은 나치가 소련을 침공하면서였다. 그 뒤에야 공산주의자들은 AFC를 친나치주의자들이라 비난했다. 


AFC는 시대를 잘못 읽었다. 결정타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뒤 협회는 해체됐다. 1941년 12월에 사라졌으니, 겨우 1년여 만에 없어진 셈이다. 그 짧은 시간에 80만명이나 모았다는 것이 매우 놀랍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 개입했고, 나치의 홀로코스트 진상이 파헤쳐졌고, 세계는 미국이 주도하는 번영의 시기를 경험했다. 하지만 ‘아메리카 퍼스트’는 물밑에 남아 있었다. 따지고 보면 
'아메리카 퍼스트'는 AFC가 처음 쓴 말도 아니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 따르면 1923년 런던 데일리익스프레스에 그 표현이 나온다고. 유럽은 전쟁통에 아수라장인데 홀로 커가는 미국을 보며 이 신문은 "미국은 아메리카 퍼스트라는 현명한 정책을 택한 덕에 잘 나가고 있다"는 분석을 했다고 한다. 


트럼프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정·재계에 뿌리박혀 있던 고립주의의 경향을 극대화해 전면으로 끌어올린 셈이다. 1차 세계대전 후인 1920년대 영국 언론이 본 '아메리카 퍼스트'는 대서양 건너 신생강국의 효과적인 성장 전략이었다. 1940년대의 '아메리카 퍼스트'는 거기에 인종적 우월감이 겹쳐진, 국수적이고 차별적 맥락이 내포된 것이었다.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에는 국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성격이 칠해져 있을 뿐 아니라, 잡아먹을 것이 줄어들고 상처입은 큰 짐승에게서 나는 피 냄새같은 것이 느껴진다. 2010년대 후반의 '아메리카 퍼스트'는 어떤 것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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