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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의 경선 승리를 이끈 말, “더 큰 비행기가 필요해요”

딸기21 2016. 6. 8.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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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비행기가 필요하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은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승리선언’을 하기까지 힘겨운 싸움을 거쳐야 했다. 첫 당내 경선인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경쟁자 버니 샌더스에게 0.2%포인트 차이로 신승을 거두자 미국 언론들은 “화려한 대관식 대신에 마라톤을 뛰게 됐다”며 향후 경선 레이스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예측대로였다. 힐러리는 3월 슈퍼화요일에 압승을 거두고 4월 ‘텃밭’인 뉴욕에서도 승리했다. 하지만 가장 많은 대의원이 걸린 캘리포니아 경선을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샌더스가 치고 올라오면서 위기론이 이어졌다. 결과는 힐러리의 압승이었다. 그는 7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에서 59%대 40%로 샌더스를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힘든 싸움이었지만 어쨌든 힐러리는 이겼다. 2008년 아이오와에서 버락 오바마 돌풍에 맥을 못 추고 결국 대권 도전의 꿈을 접어야 했을 때와는 달랐다. 워싱턴포스트는 2008년과는 다른, 이번 경선에서 힐러리의 승리요인을 꼼꼼히 분석하는 기사를 실었다. 힐러리 캠프가 ‘위기대응’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아이오와에 이은 두 번째 경선이자, 당원이 아닌 일반 유권자들이 참여한 첫 경선인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때였다. 힐러리는 샌더스에게 22%포인트 차이로 졌다.

힐러리 인스타그램

‘2008년의 악몽’이 힐러리 캠프를 덮쳤다. 언론들은 힐러리가 즉시 캠프를 뒤집어엎고 새 진용을 짤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힐러리가 스탭들에게 한 말은 “더 큰 비행기를 내주세요(Get me a bigger plane)”였다. 힐러리는 선거운동을 총괄하는 핵심 참모 로비 무크를 설득했다. 스탭들이 하나둘 떨어져나가 뉴욕 브루클린의 선거본부로 돌아가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함께 돌아가야 했다. 보좌진 등 스탭들 30명 가량이 비행기에 오르자 힐러리는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함께 한 명 한 명 손을 붙잡고 감사 인사를 했다.

 

정중하게 보이기 위한 제스처가 아니었다. 힐러리는 모두에게 신호를 보내고 싶어했고, 자기 팀이 짠 선거전략을 믿고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 이렇게 해서 8년 전과는 다른 ‘힐러리 2.0’이 시작됐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오바마에게 패했을 당시 힐러리 쪽은 대의원 계산에 실패했다. 힐러리 쪽이 한 번 이기면 오바마 캠프는 더 치밀한 계획으로 맞받으며 대의원들을 확보해나갔다. 결국 패배한 힐러리 캠프에 있었던 인물이 지금의 핵심 참모 무크, 그리고 말런 마셜 같은 사람들이다. 브루클린으로 돌아온 무크는 화이트보드에 “아이오와에서 오늘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라는 문구를 적었다. 누군가가 지우면 다시 적었다. 아이오와 패배를 잊지 말자는 것이었다.

 

이들이 샌더스의 위협을 실감한 것은 지난해 9월이었다. 시민들의 십시일반 후원으로 샌더스 캠프가 2500만달러를 모은 것이었다. 유력 주자 힐러리가 모금한 것보다 겨우 300만달러 적었다. 힐러리 측은 샌더스의 선거자금이 지지자들의 열망을 모은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샌더스가 후보지명 가능성이 없더라도 싸움을 계속할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샌더스가 군중몰이를 한 것과 달리, 힐러리는 ‘메가 랠리(대규모 집회)’ 대신 작은 모임을 선호했다. 마약 중독, 정신질환 치료, 대학 등록금빚, 총기 규제 같은 이슈들을 놓고 직접 토론하고 싶어 했다. 힐러리의 강점은 구체적이고 설득력있는 공약과 이슈 토론이었다. 하지만 카리스마로 대중을 압도하는 샌더스 앞에서 번번이 2008년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힐러리는 샌더스가 내세운 큰 주제들, ‘거대기업들이 이익을 독차지하는 시스템’과 ‘미국 노동자들에게 해가 되는 불공정한 교역 관행’을 비판했다. 샌더스를 따라 한 것이다. 

 

하지만 방점은 다른 데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는 충분하지 않다. 독선의 장벽을 깨야 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부모들은 아이가 괴롭힘 당할까, 멸시받을까, 심지어 피부색 때문에 총에 맞지 않을까 걱정한다.” 이주자 가정들, 성적소수자들을 언급하면서 전통적인 지지층을 지켜냈다. 보좌관들이 ‘동전던지기’라고 표현할 정도로 박빙이었던 네바다에서 흑인 표에 힘입어 5%포인트 차로 이겼고, 흑인이 많은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는 48%포인트 차이로 압승했다. 지금까지 치러진 주별 경선에서 흑인의 78%, 히스패닉의 60%가 힐러리를 지지했다. 백인들의 지지율은 샌더스가 49%로 48%인 힐러리를 근소하게 앞섰다. 중요한 것은 결국 전당대회 대의원 수였다. 무크는 “대의원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주문처럼 외웠다. 4월 경선에서 샌더스가 8차례 중 7번을 이겼으나, 가져간 대의원 수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힐러리가 몰랐던 것은 도널드 트럼프의 ‘파괴력’이었다. 이를 먼저 포착한 것은 힐러리 캠프의 좌장 격인 존 포데스타였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포데스타는 이미 지난해 여름부터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힐러리 캠프 대부분은 슈퍼팩(선거자금 모금 법인)들을 통해 막대한 자금을 끌어모은 후보들이 공화당 경선에서 격렬한 각축전을 벌일 것으로 봤다.

 

트럼프의 막말을 상대하는 것은 힐러리 캠프의 최대 고민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트럼프는 “솔직히 힐러리 클린턴이 남자라면 5%도 못 얻었을 것이다. 다 여성임을 내세운 카드로 얻어낸 것이다. 그런데 좋은 일은, 여자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힐러리 캠프는 곧바로 연설 동영상을 띄웠다. “여성 보건과 유급 가족휴가와 동등한 임금을 위해 싸우는 것이 ‘여성 카드’라면, 그렇다면 내가 적격이다.” 선거본부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제니퍼 팔미에리의 승부수였다. 

 

워싱턴포스트는 힐러리가 이미 후보지명을 확정지은 것만으로도 역사를 썼지만, 특히 자신의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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