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아침을 열며]국회의원 사용법

딸기21 2016. 2. 28.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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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는 참신했다. 그 자체가 어떤 이들에게는 시빗거리였지만 많은 이들에게 ‘축제’처럼 다가왔다. 서방이 ‘민주주의가 미흡한 나라’라고 몰아붙이는 이란의 언론들조차 한국의 필리버스터 사실을 전했을 정도로 외국 언론에서도 뉴스거리가 됐다. 사실 필리버스터는 의회 정치의 오래된 수단 중 하나이며, 기나긴 연설뿐 아니라 여러 방식이 동원돼 왔다. 프랑스에서는 야당이 13만건에 이르는 개정안을 내 법안 심사를 늦춘 적도 있다.

 

하지만 늘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시간을 끈다 해서 법안을 마냥 무산시킬 수는 없다. 미국 민주당 대선주자로 나서 붐을 일으킨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2010년 미 의회에서는 근 20년만에 8시간 반 필리버스터를 하면서 감세 연장법안에 맞섰으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듬해 초 결국 법안을 승인했다. 캐나다에서 2011년 의원 103명이 돌아가며 58시간 동안 연설을 해 우편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는 법안을 막으려 했지만 집권 보수당은 끝내 법안을 통과시켰다.


filibuster.me



필리버스터를 ‘다수당의 횡포를 막기 위한 약자의 저항’으로 일반화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미국에서 최장 시간 필리버스터 기록을 세운 사람은 1957년 24시간 18분 동안 연설한 스트롬 서몬드 의원이다. 그가 만 하루가 넘도록 연단에 서서 막아내려 한 법은 흑인들에게도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보장해 주기 위한 민권법이었다.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으로 흑백 분리를 지지한 서몬드는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고 백인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교육시키는 것에 극렬히 반대했다. 서몬드 같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권법은 상원에서 찬성 72표 대 반대 18표로 압도적으로 통과됐다. 필리버스터라는 이례적인 방식으로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음을 보여줬고, 48년간 상원의원을 지낸 서몬드에게는 2003년 사망할 때까지 ‘민권법에 반대한 인물’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테러방지법을 다수당이 통과시키겠다고 우기면, 인권에 대한 염려 따위는 무시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대의제 하에서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그러니 이 법을 막겠다는 야당들의 필리버스터는, 은수미 의원의 연설은, 감동적이지만 서글프다.

 

하지만 냉소하고 포기할 일은 아니다. 진짜 감동적인 것은 한국 의회에서 수십년 만에 필리버스터가 벌어졌다거나, 간만에 야당다운 야당의 모습을 보게 된 사실이 아니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필리버스터에 나선 의원들에게 목소리를 전하는 ‘시민참여 아카이브’다.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해선 안됩니다. 국민들은 헌법에 나와있듯 기본권을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름뿐인 테러방지법으로 인해 국민들의 기본권을 침해당할 수는 없습니다. 신념 님, 2016년 2월 25일 최민희 의원을 통해서.” 시민들이 웹사이트에 올린 글이 의원의 입을 통해 의회에서 울려퍼진다.

 

이 아카이브의 모토는 “당신이 쓴 연설문, 국회 본회의장에서 읽히고 있습니다”이다. 시민들이 국회의원을 ‘대변인’으로 쓰고 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대의제 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가 합쳐지는 순간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금융위기 때 벌어진 ‘점령하라’와 ‘분노하라’는 저리가라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에서 새롭게 탄생한, 구시대 독재자의 진부한 2탄 박근혜가 만들어낸 21세기형 민주주의다.

 

기존의 대형 미디어들은 한심하다. 올드미디어들이 일련의 사건을 나몰라라 하는 것을 보니 화가 나기보다는 가련하다. 신문들이 쓰지 않는다 해서, 기사 비중을 줄인다 해서 몇날 며칠 계속되는 필리버스터를 시민들이 모를까. 미디어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과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전하지 않거나 감췄을 때 사람들은 새로운 소통수단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아랍의 봄’을 불러온 이들도, ‘점령하라’와 ‘분노하라’에 응답한 청년들도 신문과 방송에서 정보를 얻어 거리로 나가지는 않았다. 올드미디어들이 감추기에 급급해 하는 사이에 사람들은 ‘의원 사용법’을 찾아내 하고픈 이야기를 하고 있고, 정치수업과 역사공부를 톡톡히 하고 있다.

 

의원들과 시민들이 필리버스터로 막고자 하는 테러방지법과 비슷한 대테러법을 채택한 나라들이 세계에 몇 곳 있다. 지난해 폐기된 미국의 애국자법, 프랑스 의회가 통과시킨 비상사태 연장 헌법 개정안 같은 것들이 유사한 사례다. 여러 나라 대테러법의 정보수집 강도와 인권 침해 소지, 시민자유 억압 등을 비교해보면 한국의 테러방지법은 아마도 이집트의 것과 가장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집트에서는 병원에 누워 죽은 척하는 옛 독재자의 정치적 아들이 안정을 명분으로 반대파를 내리누르고 반정부 주장을 테러로 몰아붙인다. 그런들 가려질까? 대테러법으로 시민들의 눈과 귀와 입을 얼마나 막을 수 있을까. 참여의 새로운 방식이 날마다 개발되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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