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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이 프라샤드, '갈색의 세계사'

딸기21 2015. 11. 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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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의 세계사-새로 쓴 제3세계 인민의 역사

비자이 프라샤드. 박소현 옮김. 뿌리와이파리



요즘 극히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이라고. 재미있었다. 비동맹운동, 제3세계의 역사만으로 구성된 세계사책은 처음 읽는다. 장렬한 투쟁, 세계를 뒤흔들 수 있었던(한때는 뒤흔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거대한 흐름이 굴절되고 꼬이고 결국 무너져내리는 과정이라니. 원문도 좀 뒤죽박죽인 것같고, 편집자가 원고를 안 읽었는지 오탈자 많고 일본식 표현(수상 국방성 외무성 등등)도 많아 엉성했지만 밑줄 치면서 읽을 부분이 많았다. 



3세계 구상은 수백만 인민을 흔들어 놓았을 뿐 아니라 여러 영웅을 낳기도 했다. 그런 영웅 중에는 3대 거물 정치인인 나세르, 네루, 수카르노뿐 아니라 베트남의 응우옌티빈과 호찌민, 알제리의 벤 벨라, 남아프리카의 넬슨 만델라 같은 이들도 있다. 3세계 프로젝트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 가수 움 쿨숨, 화가 수자나 케르톤 같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상상력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3세계가 만들어낸 새로운 지평은 이 예술가들과 일상에서 역시를 만들어가는 이들을 열광시켰다. 3세계 프로젝트는 이렇게 서로 다른 동지들을 단결하게 했다. (15)



1946년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터키와 그리스의 반공세력을 지원할 계획을 밝혔고. 1947년 미 중앙정보부-CIA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선거에서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공산주의자들에 맞서 보수주의자들이 승리하도록 지원했으며, 소련 역시 동유럽 국가들에게 위성국가가 되도록 강요했다. 19486월 제1세계가 베를린을 봉쇄하자 상호 적대심이 극적으로 증폭되면서 제1세계와 제2세계는 공개적으로 충돌했다. 이 혼전의 와중에 트루먼의 고문이었던 버나드 바루치가 분쟁을 설명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한 냉전이란 표현을 칼럼니스트 월터 리프먼이 널리 퍼트렸다.

동서분쟁이라는 말은 제1세계와 제2세계가 같은 조건에서 서로 대립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점에서 냉전의 역사를 왜곡한다. 스웨덴 사회학자 요란 테르보른은 1968년 발표한 통찰력 있는 논문에서 냉전은 근본적으로 비대등한 분쟁이었지만, 양진영이 서로 대등한 분쟁인 것처럼 상정하고 경험한 분쟁이라고 지적했다. (26)



애당초 소련이 시작한 지점은 피폐한 봉건 경제인 데에다 그마저도 내전과 뒤이은 나치의 맹렬한 공격으로 철저히 파괴됐다. 1941년 미국과 소련의 인구는 모두 13000만 정도였다. 그러나 미국의 전쟁 사망자가 군인 40만 명인데 비해 소련은 군인과 민간인 2000만에서 3000만 명을 잃었다. 1세계 지배계급은 소련의 물자 부족과 [정치적] 억압을 본보기 삼아 자국의 노동계급을 통제하는 도구로 활용했으며, 1세계의 경제·정치적 기반은 모두 제2세계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대등한 것처럼 싸운 비대등한 분쟁이 불평등을 배가시켰다. 냉전은 사회주의에 오랜 형벌이었다.

하지만 제l세계와 제2세계의 인구는 세계 인구의 3분의 l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동서 세계에 속하지 않았던 나머지 3분의 220억 인구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27)



1927년 반제국주의연맹 준비단은 이 야만성의 수도에서 반제국주의 회의를 열어 유럽의 코를 밟아주고자 의도적으로 브뤼셀을 회의 장소로 정했다. 반제국주의연맹은 위임통치 체제를 통 해 제국주의를 보호하는 국제연맹에 대한 정면 공격이었다. 국제연맹은 독립과 자치권이 아니라 민족자결원칙이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할 최선의 방안은 자원과 경험, 지리적 위치 측면에서 이런 책임을 맡기에 적합하며 기꺼이 책임을 떠맡고자 하는 선진국에 국제연맹을 대신한 위임통치권을 주어 인민을 보호 감독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국제연맹에게 민족자결이란 식민주의의 종식이 아니라 가부장적 제국주의였던 것이다. 브뤼셀회의는 경멸의 시선으로 베르사유를 부정했다.

브뤼셀회의에 온 대표들은 공산당과 사회주의 정당뿐 아니라 급진적 민족주의 운동에 속해 있었다. 남아프리카의 제임스 라 구마와 조시아 구메다(둘 다 남아프리카공산당), 알제리의 하즈-아흐메드 메살리(최초로 알제리 독립을 요구한 단체인 북아프리카의 별설립자),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와 무함마드 하타(새로 결성된 민족주의 정당), 세마운(공산당), 팔레스타인의 자말 알 후사이니(팔레스타인아랍민족회의)M. 에렘(시온의 노동자), 이란의 아흐메드 아사도프와 모르테사 알라위, 인도의 무함마드 바르키툴라(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당한 가다르당)와 네루(인도 국민회의)가 참석했다. 중국은 최대 규모의 대표단을 보냈는데 대부분 국민 당 소속이었지만 유럽 전역의 지부에서도 참석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로저 볼드윈 같은 시민자유운동가와 리처드 무어 같은 활동가, 빅토르 아야 데 라 토레(페루)와 호세 바스콘셀리아스(푸에르토리코) 같은 거물급 민족지도자들이 왔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프랑스의 노벨상 수상작가 로맹 롤랑, 중국 민족운동 지도자 쑹칭링(쑨원의 부인)이 브뤼셀회의의 후원자가 됐다. (46)



트리니다드인 헨리 실베스터 윌리엄스가 추진해 1900년 런던에서 열린 첫 범아프리카회의에는 미국, 카리브해, 유럽, 아프리카등 대서양 각지에서 참석자들이 몰려들었다. 45년이 지난 1945년 열린 제5차 범아프리카회의에서 듀보이스는 핵심지도자가 돼 아프리카 대륙의 차세대 지도자인 조지 패드모어, 크와메 은크루마, 조모 케냐타와 함께 하게 된다. 범아프리카주의와 아프리카 독립이라는 이론적 개념은 1940년대 대륙 전체로 퍼져나간 노동자 파업을 거치면서 실질적인 세력을 얻었다. 1945년 라고스부터 1947년 다르에스살람까지 부두노동자들이 상품 수송을 멈췄고, 철도·우편·전신·공장노동자뿐 아니라 농장 노동자도 식민주의에 맞선 총파업을 일으켰다.

1957년 가나가 독립하자 수도인 아크라에서 제1차 아프리카국가회의가 개최되고 전아프리카인민회의 본부가 문을 열었다. 아프리카인들을 이런 장소로 모이게 한 것은 문화나 언어가 아니라 은크루마의 말대로 아프리카의 독립이라는 공동의 이해였다. (49)



패기 넘치는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이끄는 중국대표단은 반둥회의의 한복판을 돌파했다. 저우언라이는 자신의 전설적인 경력과 모두와 친해지려는 열정적인 태도로 각국 대표 대다수의 환심을 샀다. ‘중도파인 네루, 우 누와 차를 마신 후 바로 우파인 필리핀의 카를로스 로물로, 실론의 코텔라왈라와 차를 마셨다. 저우언라이는 회의장을 지배하던 민족주의적 수사에 대해서는 회유하는 자세를 취했고,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자신의 무신론에 관용을 베풀어달라고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중국은 적대적인 강대국들에 완전히 둘러싸였다. 북서쪽에는 소련이, 다른 쪽에는 미국이 주도한 군사조약이 있었다. 더군다나 타이완 정부가 중국에 배당된 의석을 차지했기 때문에 유엔에서 중국의 입장을 피력할 길도 없었다. 반둥회의는 세계의 여론과 지지에서 동떨어져 있는 중국의 고립을 종식시킬 무대가 돼줬다. (66)



허약한 민족부르주아지가 통치하는 이 나라들에는 민족부르주아지의 정통성과 권력을 위협하는 전투적 대중운동이 존재했다. 로물로가 모신 대통령 마누옐 로사스와 후임자 라몬 막사이사이가 이끈 필리핀 정권은 1946년에서 1954년까지 새 정부와 배후의 미국에 반대하는 무장봉기인 훅Huk 반란에 시달렸다. 트루먼이 준 무기로 무장한 막사이사이 정부군은 강대국들이 동남아시아조약기구 결성에 서명하러 마닐라에 도착하기 직전에야 간신히 반란군을 진압했다. 타이가 공산주의 반란을 두려워 할 이유는 한둘이 아니었다. 국내에서 비민주적인 정권에 대한 반발이 거센 데에다, 국경을 맞댄 말레이시아에서 1948년부터 1960년대까지 계속된 공산주의 대중반란으로 주변 지역이 봉쇄된 상태였다. 이 반란은 영국의 무지막지한 융단폭격으로 가까스로 진압됐다. 이라크와 이란에도, 오스만제국의 붕괴 이후 권력을 쥔 지주지배층에 맞서 대안을 제시한 강력한 좌파정당이 있었다. 특히 이라크에는 당시 아랍 세계 최대 규모의 공산당이 버티고 있었다. 이렇게 북쪽의 소련과 연계된 압력에 시달리던 여러 정권은 미국의 군사 우산 아래서 안식처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68)



사상적 지향점과 관계없이 참가국들은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군비축소가 필요하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1856년 영국군의 광둥 폭격에서 1913년 스페인 공군의 모로코 공습에 이력까지 식민지 세계는 이미 대량살상무기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핵보유 강대국들이 대회를 미루는 가운데 제3세계는 유엔에서 핵무기를 통제하고 관리할 체제를 만들 것을 요구했다. 1957년 마침내 유엔이 창설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설립헌장은, 강대국들에게 모든 대량살상무기의 생산, 실험, 사용 금지를 비롯해 군사력과 무기를 규제, 제약, 통제, 축소하고 이를 위해 효과적인 국제 통제기구를 창설하라고 요구한 반둥회의 최종성명을 그대로 따랐다. 달리 말하자면 IAEA는 반둥이 낳은 아이였다. (73)


1905, 1909, 1919, 1920-21, 1930-31년 인도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질 때마다 여성들은 거리를 점거했다. 이란의 헌정운동 당시 여성들은 1907년부터 1911년까지, 그리고 1919년에 시위를 벌였다. 중국, 인도차이나, 인도네시아, 가나, 남아프리카에서도 여성들이 같은 역할을 해냈다는 기록이었다. 이런 시위와 바깥 세계와의 접촉을 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해갔다. 부유층 이집트 여성들은 여권단체를 조직했다. 재력과 권력을 가진 집안 출신(아버지가 의회 대변인)의 후다 샤라위가 이집트 여성운동의 선구자가 됐다. 조직화된 여성운동의 선구자 상당수는, 제국주의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 덕분에 귀족 지위를 유지한 구사회 계급 출신이었다. 일부 는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신사회 계급(군부, 관료, 상인) 출신이었다. 이 여성들은 자신을 둘러싼 반제국주의 대중투쟁과 (당시 한창 참정권 투쟁 중이던) 유럽 여성들과 교류하면서 영감을 얻었다. 이집트 여성운동의 선구자들은 유럽 여성들을 연대의 대상으로 여겼지만, 유럽 여성들은 식민지 여성들을 동정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89)



1957년 아시아아프리카인민연대회의에서 아시아아프리카여성연합이 결성됐다. 1961년 다시 카이로에서 열린 여성연합회의에는 37개국이 참석했다. 반식민 투쟁에 참여하는 것은 여성해방 의제에 대한 하나의 장애물을 공격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운동과 사회에서 남녀관계를 바꿔내는 것이었다. 여성들은 알제리, 쿠바, 기니아, 인도네시아, 남북한, 오만, 베네수엘라, 베트남 둥지에서 게릴라전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전쟁물자를 공급하고 부상자를 돌보고 이집트, 인도, 잔지바르 등지에서는 거리 시위에 앞장섰다.

독립의 역사는 짧았으나 민족해방 국가는 이 여성운동가들에게 관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신생국은 여성들이 바라왔던 바와 달랐다. 카이로에서 열린 두 차례 회의는 정책 목록과 양성평등권이란 전망을 내놓았는데, 이 목록은 이런 정책들을 수렴하지 못한 신생국의 실패에 대한 암묵적인 비판이기도 했다.

1957년 회의가 거듭 강조했던 동일노동 동일임금구호는 4년 후에 다시 등장했다. 1961년 회의는 여성이 직업을 갖고 성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승진할 권리, 임신과 산후회복기에 차별받지 않을 권리, 모든 직종에서 직업 훈련이나 기술훈련을 받을 권리,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이끌 권리 등 경제 영역에서 여성주의 투쟁의 전망을 상세하게 내놓았다. 또한 계약직을 폐지할 것을 요구했는데 주로 여성들이 떠맡는 그런 일자리는 복리후생이나 명확한 법적 규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권고안은 임금노동을 하지 않는 여성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회의는 이들을 위한 두 가지 권고안을 내놓았는데, 정부가 소비재에 대한 간접(판매)세를 축소해 가계의 부담을 줄이고, 무의미한 일을 시키지 않으면서 이들의 수입을 지원할 방도를 찾으라는 것이었다. (95)


1949년 라울 프레비시는 라틴아메리카의 경제발전과 그 근본 문제들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내놓았다. 이 논문이 제기하는 기본 문제는 기초적인 것이다. 어떻게 절대적으로 빈곤한 제3세계가 전 국민의 발전을 위한 경제계획을 수립할 것인가? 프레비시는 1차 산품 수출국은 어떤 구조를 만들어 국내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건 없는 보조금이 주어지지 않을 경우 최상의 방침은 법적 ·정치적 방책을 취하는 것이다. 신생국은 수입을 막기 위해 관세를 이용해야 한다.

국제무역에서 관세를 이용한 특별대우라는 문제는 제3세계 경제 의제에서 계속 핵심적인 도구이자, 반둥회의에서 나온 주된 경제 강령이었다. 유엔의 제3세계 국가들은 이론을 세우고 모든 회의 자리에서 그것을 밀어붙였다. 관세에 대한 주장은 다음과 같다. 3세계 국가들은 발전을 위해 차별적인 관세체계를 세우고자 한다. 3세계 국가들은 산업선진국들의 상품에 불리한 관세를 매기고, 산업선진국들은 제3세계 국가들의 상품에 무역장벽을 낮추기를 원한다. 관세는 국내 산업을 진작할 것이고 산업화를 위한 자본은 해외원조와 국내 이윤의 효율적인 활용으로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프레비시는 이렇게 썼다. “산업화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그러나 그 나라들이 기술 진보의 혜택에서 지분을 얻고 대중의 생활수준을 진보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주된 수단이다.”

3세계 국가들은 자신들의 의제를 실현할 유엔 기구를 만들도록 압력을 넣었다. GATT가 이미 제1세계의 도구가 됐다면 제3세계 그 자체의 대웅기구를 원했다. 유엔무역개발협의회UNCTAD 창립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수단이었고 프레비시는 그 기구의 초대 총재가 됐다. UNCTAD는 제1세계 다국적기업의 권력과 구식민 세계의 상품을 좌우하는 그들의 지배권에 도전했다. (109)


카스트로는 우리는 자유란 구걸이 아니라 마체테 날로 얻어내는 것임을 배웠다고 말했다. 1900년에서 1933년 사이 미군의 개입으로 인민들의 희망은 수없이-쿠바(네 번), 도미니카공화국(네 번, 8년간 점령 포함). 과테말라(한번), 아이티(두 번, 19년간 점령 포함), 온두라스(일곱 번), 니카라과(두 번), 파나마(여섯 번)-물거품이 됐다. 가장 최근인 1954, 미국 정부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과테말라의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 정권을 전복하는 데에 개입했다. 1959년 프랑수아 파파 독뒤발리에가 우익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자 미국은 그의 준군사조직 통통 마쿠트를 무장시켜 인민들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 카스트로 정부가 북쪽의 거인 미국을 의심할 이유는 수없이 많았다. (156)



카스트로는 비동맹운동과 소련이 베트남뿐 아니라 다른 피식민 인민을 위해 확실한 조치를 취해주기를 바랐다. 이런 기대와 조바심 때문에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후반 사이 제3세계 안에서 정치 논쟁이 벌어졌다. 무장투쟁이 반식민주의 전술로서뿐 아니라 중요한 전략자체로서 부활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시기다.

3세계 정권들은 베트남을 보면서 대서양 강대국에 대한 환상을 거의 버리게 됐다. 반둥과 베오그라드의 주요 지도자 중 네루는 사망했고, 수카르노는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로 실권했으며, 우누는 양곤에서 가택연금 상태였고, 나세르는 이집트 민주주의의 마지막 생존자마저 억누르는 중이었다. 3세계 역학을 주도했던 쿠바의 카스트로, 알제리의 우아리 부메디엔, 잠비아의 케네스 카운다, 자메이카의 마이클 맨리는 제1세계에 대한 참을성이 별로 없었다. (159)


대중을 해산하고 무장해제한 신생국 대부분은 제국주의 세력이 벌인 군사개입의 희생양이 됐다. 1953년 미국이 뒤에서 조종한 이란 쿠데타는 워싱턴이 벌인 이러한 세계적 역할의 초기 사례다. 3세계 쿠데타 대부분에서 미국이 관련된 증거가 불분명한 데에 반해, 도미니카공화국(1963), 에콰도르(1963), 브라질(1964), 인도네시아(1965), 콩고(1965), 그리스(1967), 캄보디아(1970), 볼리비아(1971), 그리고 가장 유명한 칠레(1973) 쿠데타에서는 CIA와 미군 정보부의 흔적이 분명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200)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 같은 저명한 지식인들은 군사적 근대화라고 부르는 하위 학문분야를 만들었다. “정치적 근대화에 관한 영향력 있는 1968년 연구에서 그는 열대지역의 자유민주주의는 낡은 사회구조를 영속화하는 데에 복무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국가는 경제발전의 우선과제가 될 정치권력에 집중해야 하는데 이 분야에서 군대보다 더 나은 사회기관은 없다는 것이다. 헌팅턴의 치밀한 분석은 1962년 국가안보위원회의 정책문서에 반영돼 있다. “비공산주의 세력이 무력으로 달성한 변화가 장기화된 정부의 무능에는 더 나은 처방일 수 있다. 미국의 이해에 부합한다면 지역 군대와 경찰을 민주주의의 옹호자이자 발전 과정을 수행할 행위자로 만드는 것이 바로 미국의 정책이다.”

모부투의 콩고, 수하르토의 인도네시아, 피노체트의 칠레는 군사적 근대화가 내세운 약속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군대라는 제도를 근대적 권리의 기반을 만드는 데에 이용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국민을 억압하고 공포통치를 하는 데에 이용했다. 군부의 반공은, 군부가 인민에게 중요한 두 기관인 노동조합과 대학을 공격한다는 것을 뜻했다.

볼리비아의 바리엔토스나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처럼 미군과 함께 움직인 자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미국을 이용할 국내적 이유가 있었던 특정한 계급분파를 상징한다. 그들은 그저 서구 제국주의에 이용당한 수동적이고 술수를 모르는 자들이 아니다. 전 세계 곳곳의 바리엔토스, 모부투, 수하르토들과 그들이 지켜낸 계급 역시 하청업자일지라도 제국주의라는 앙상블의 일부이다. (205)


공산주의자들은 쓸모가 많았다. 수카르노는 공산당 프로그램과 간부들 때문에 PKI가 필요했다. 1958년 이라크 왕조를 무너뜨린 카심 준장과 1969년 부패한 수단 군부를 몰아낸 자파르 니메이리 대령은 둘 다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려고 강력한 공산당에 기댔다. 이라크와 수단에서 집권한 지도자들은, 인민들의 사회 세계에 닿을 수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능력뿐 아니라 사회변화 프로그램 때문에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했다. 공산주의와는 결코 화합할 수 없는 바트당조차 이라크공산당의 프로그램을 채택할 정도였다. 이라크공산당은 평화파르티잔, 여권방어연맹(-라비타). 이라크청년연맹 등의 금지된 단체들을 부활시키는 등 상승세를 타면서 간부 수 25000, 당원 수 (이라크 인구의 5분의 1) 100만 명에 달했다. 당시 이라크에 바트당원은 300명뿐이었고 1960년대 초에도 겨우 3000명 정도밖에 늘지 않았다.

195910월 바트당이 쿠데타를 시도하자 이라크공산당은 민족주의 군부 정권을 방어했다. 이라크공산당은 재빨리 국방부와 통신망을 장악했다. 공산주의자들과 지지자 5000명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에 겁을 먹은 대령들은 유일하게 조직된 지지층인 이라크공산당을 섬멸하기 시작했다. 바트당의 길은 탄탄히 닦여 있었고 마침내 1963년 바트당이 정권을 잡는다. 그리고 미래로 가는 창은 닫혔다. 1968년 후세인이 권좌에 올랐다. 만신창이 상태의 이라크공산당을 분열시킨 후세인의 가장 큰 동맹국은 소련이었다. (227)


각국이 자국의 공산당에 벌인 일은 신성불가침의 내정이 됐다. 좌파의 파멸이 제3세계에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가장 보수적인, 심지어 반동적인 사회계급들이 반둥에서 만들어진 정치적 플랫폼에서 지배력을 얻었다. 군사정권에 기생하며 동장한 정치세력은 좌파와 자유주의자들이 내세운 보편적 반식민 민족주의를 거부하고 인종주의, 종교,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잔혹한 문화적 민족주의를 따랐다.

이 문화적 민족주의는 만들어진 전통을 피난처로 삼았고, 자신이야말로 정통문화를 대변하며 진보좌파의 현대또는 서구적 영향에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발리는 지상낙원이며 아랍은 엄격하다는 신화, 또는 힌두교는 위계적이며 아프리카는 부족적이라는 신화, 이 모든 전통적 비전의 등장은 좌파에 대한 구사회 계급의 복수다. 3세계 여러 나리에서 CIA와 구사회 계급은 좌파를 박살내고 구사회 계급에게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자신들도 통제할 수 없는 괴물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233)


영국의 히말라야 지도 제작은 고산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필요나 욕망과는 무관하게, 차르 러시아와 청나라로부터 그들의 인도 제국을 지켜낼 완충지대를 확보하는 데에 주력했다. 영국은 1893년 파슈토어사용지역을 가로질러 아프가니스탄을 인도와 러시아 사이의 국경지대로 만드는 듀랜드 라인을 긋고, 마찬가지로 1914년에는 중국에서 인도 영토를 분리해내는 맥마흔 라인을 만들었다. (241)


국제주의와 (평화공존 5원칙에 근거한) 상호 주권존중의 고결한 사상은 낡은 이데올로기와 문화적 압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중국의 일부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는 한족 중심주의라고 부르는 생각이 강했다. 19569월에 열린 제8차 공산당 전당대회에 낸 보고서에서 류사오치는 간부들에게, 한족이 가장 우월하고 다른 종족은 열등하며 한족만이 소수민족을 책임질 수 있다는 생각에 빠져 활동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19577월 저우언라이는 전국인민의회에서 대표들에게 대국중심주의에 빠지지 말라고 당부했다.

중국 공산주의의 광범위한 국제주의 안팎에서 종족민족주의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면, 네루의 세속적 국제주의 또한 비슷한 물결에 부딪혀 무너졌다. 국경분쟁이 점점 복잡하게 꼬이면서 비타협적인 군소 우익 정당들이 논쟁을 일으켰다. 첫째, 이전에는 지하에 있던 국수주의가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됐다. 주변부의 우익 세력이 국경뿐 아니라(우익에게는 힌두교로 대변되는) 고대 인도문화를 지키겠다며 중앙 무대에 등장했다. 둘째, 국경 방어와 역사·정치적 문제의 군사적 해결로 국가건설에 예산상의 부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최신 군사기술 도입은 엄청난 예산을 잡아먹었고 일국의 사회발전 의제를 망쳐놓았다. 3세계의 국방비 지출은, 제국주의가 유출하는 부를 바로잡고 사회적 형평성을 우선으로 하는 국가경제를 만들겠다던 경제계획을 왜곡시켰다. 소중한 자본이 국방비로 들어가면서 이 사회들의 저축률은 낮아졌고 동시에 국방비 지출과는 반대로 사회적 지출(교육, 보건, 아동복지)은 급격하게 줄기 시작했다. 군대는 이렇게 투자자본 뿐 아니라 얼마 되지 않는 인적·물질적 자원까지 끌어갔다. (245)



1962년 중국-인도 국경분쟁은 비동맹의 동력을 방해했고 그 결과 제3세계의 정치적 플랫폼도 무너졌다. 중국 외교정책은 반둥에서 미국과 미국의 동맹이 될 가능성이 큰 독재정권에 대한 재접근으로 옮겨갔다. 유엔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면서 중국 정부는 그리스 군사정부를 두둔했고(1972), 방글라데시 독립 문제에서 파키스탄의 편을 들었으며(1971),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한 수단의 독재자 니메이리를 베이징에 초청했고(1971), 스리랑카에 좌익 랑카사마자당의 반란을 진압할 긴급지원군을 보냈으며, 칠레에서 벌어진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재빨리 숭인했다(주중국 칠레대사가 피노체트에 협력하기를 거부하자 대사를 추방하기도 했다). 중국-인도 국경분쟁은 인도와 중국 간의 신뢰를 갉아먹었다. (246)



1936714, 잡지 아호라는 첫머리에 석유씨뿌리기 또는 심기라는 제목의 논설을 실었다. 논설을 쓴 사람은 1931년 놀라운 역사소설 붉은 창을 내놓아 카라카스의 유명인사가 된 아르투로 우슬라르 피에트리였다. “이제 베네수엘라에서는 모든 것이 석유다. 석유는 심을 수도 없고 작물이나 공장으로 변하지도 않는다. 대신 석유는 흘러넘쳐 지나가는 길마다 집과 공장과 가축을 쓸어버린다.”

석유산업은 산업프롤레타리아를 낳았지만 이 자본집약적 산업의 노동자수는 많지 않았다. 1950년대에 석유생산은 두 배로 늘어나, 1948년에서 1957년 사이 베네수엘라 정부가 석유산업에서 거둬들인 세금이 무려 70억 달러였다. 이 액수는 베네수엘라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 이래 거둬들인 세금을 모두 합친 액수보다 많았다.”

독재자 마르코스 페레스 히메네스(재임 1952-58)는 석유로 벌어들인 세입을 베네수엘라 도시 재건에 썼다. 부자들은 카라카스 계곡에 지상낙원을 세운 반면, 엄청난 수의 이주자들은 언덕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95퍼센트라는 극적인 성장을 기록한 GNP가 건설 무역과 부자를 위한 서비스 산업을 떠받쳤다. 페레스 히메네스는 군대를 동원해 판자촌을 밀어버리고 거대한 공공주택(수페르블로크)을 세워 올렸다. 1958년 이 독재자가 축출되자 그의 후임자는 도시로 밀려들어오는 무토지 농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이들을 수용할 구역인 바리오를 마련했다. 바로 그곳에서 혁명과 무질서, 노동과 재건의 에너지가 생겨났다. (250)



193420년 동안의 다툼 끝에 한때 석유산지를 지켰던 장군 라사로 카르데나스가 대통령이 됐다. 1937년 멕시코 석유노동자들은 노동조건과 생활조건 및 입금하락에 반대해 파업하겠다고 위협했다. 카르데나스는 상황을 조사하도록 위원회를 구성했고, 이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임금과 노동조건이 개선돼야 하고, 멕시코인 관리자와 기술지들이 외국인으로 교체돼야 하며, 석유회가들이 멕시코를 속여 왔다고 밝혔다. 1938년 카르데나스는 석유산업을 국유화했다. 그 보복으로 일곱 자매는 멕시코산 석유 구매를 거부했고, 새로 설립된 멕시코국영석유공사PEMEX는 위기에 봉착했다. 이제 일곱 자매의 관심은 멕시코에서 베네수엘라로 옮겨갔다. 일곱 자매는 베네수엘라 정부가 움직이기 전에 세를 과시하려고 19592월과 19608월 두 차례에 걸쳐 원유가격을 대폭 인하했다. 배럴 기준으로 유전에 내는 세금은 즉각 감소했다. 이로 인한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은 여러 산유국 정부들이 국제경제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재고해보게 된 것이다.

1958년 페레스 알폰소는 민주행동당 정부의 광산 및 탄화수소부 장관이 됐다. 그가 일곱 자매에 세금을 부과하면서 정부의 석유세입이 60퍼센트 증가했고, 베네수엘라의 주권은 땅속 깊은 곳까지 미치므로 석유산업 전체는 공익사업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자동차도 타지 않고 밤에 전등도 쓰지 않던 그는 베네수엘라의 석유자원에 대해 일종의 신비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석유는 본질적인 가치를 지녔으며 후세에게 빌려 쓰는 것이기 때문에 그 수명이 보장되도록 지키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는 것이다. 석유에 대한 그의 태도와 행동은 생태적인 동기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민족주의적 동기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257)



1983년 비동맹운동 국가들의 산업생산량은 세계 산업생산량의 10분의 1에 못 미쳤지만, 그중 4분의 3을 초국적 기업들이 통제했다. 3세계 전체 생산량의 80퍼센트가 브라질, 한국, 인도, 멕시코, 아르헨티나 5개국의 생산량이었다. 이 나라들(특히 인도, 동아시아의 네 마리 용’, 브라질)이 제3세계 의제가 탈선하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298)



3세계 민족주의를 떠받치는 두 기둥은 자급경제와 세속적 민주주의였다. 세속적 민주주의는 신생국에 분열을 초래하는 식민주의적 통치기술을 폐기했을 뿐 아니라, 부담거리였던 문화적 차이를 국가 자산으로 바꿔놓았다. 자급경제는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추진됐다.

경제주권을 버린 민족해방정권은 자기 정통성의 근거가 되는 두 가지 원칙 중 하나를 잃었다. 이 국가들의 지배계급은 사회를 결속시키는 고삐를 풀어버리거나, 풀어버리는 동시에 태생적으로 획득되는 신앙적·인종적 정체성으로 국민을 재결속시키고자 열망했다. 국내지배층은 언제나 민족해방 의제의 약한 연결고리였다. 이 신흥 부르주아지는 계급동맹을 재조정하고 경제적 이득과 소비적 쾌락을 기대하며 서구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 했다. 1980년대 초 인도에서 이 계급의 수는 프랑스 인구 전체만큼 늘었다. 1980년대 초 인디라 간디의 아들 라지브 간디는 이 계급을 대변했다.

진정으로 잔인한 문화적 민족주의 정치세력 바라티야 인도국민당BJP이 등장했다. BJP는 반식민 민족주의가 아니라 나치식 민족주의(혈통과 토양)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적 애국주의의 폭력적이고 남성우월적인 전통 속에서 생겨났다. 그들의 적은 외국자본과 지배계급이 아니라 무슬림과 공산주의자였다.

새로운 민족주의는 급진적이고 종교적이며 문화적인 피해망상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인종·종교·문화적 차이를 넘어서던 연대감은 제3세계에서 약해지거나 완전히 무너졌다.” (303)


경제위기 이후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특기할 만한 반응 두 가지가 나타났다. 첫 번째는 동아시아(와 구 제3세계)의 신흥 부르주아지들이 자유화에 열광했다는 점이다. 자국 통화가 폭락하고 국내에서 불평등이 가중되는 데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호시절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상당수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미국의 다국적기업에서 일하는 그들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외부와 격리된 영원한 소비주의와 이윤의 세계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한 발전이 보여주는 것은 부르주아 계층에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서서히 사그라지고, 글로벌 부르주아의 경제이해 셈법에 걸맞은 코스모폴리탄적 탈국가 감정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국가들의 부르주아는 자국 인민 대부분에게 피해가 갈지라도 친미적인 조약을 맺고 싶어 안달한다. 이 진정으로 세계적인 부르주아들은 민족주의적 의제보다는 타산적인 애국심과 자신들의 문화유산의 가치를 인정받을 필요에 따라 움직인다. 1990년대 전 지구적인 열광을 일으킨 것은 바로 이 터보 엘리트들의 세계화였다. (353)


파이살은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와하브파 교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이슬람교는 초기 칼리프 시대국가로 돌아가야 하며 무슬림은 수 세기 동안 일어난 변화를 깨끗이 씻어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1970년 그는 울레마가 사법부를 관장하도록 하고, 석유로 벌어들인 돈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비세속적 이슬람 공공영역을 만들어 무신론적 공산주의와 나세르주의를 비난하는 데에 전력했다. 그들은 제3세계 민족주의, 세속주의, 사회주의뿐 아니라 그런 종류의 근대성을 거부했다. 3세계 민족주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위계와 특정 계급과 가문의 지배를 폐지하자는 편이었다. 이런 입장은 파이살 같은 사람들에게는 증오할 만한 일이었다. 그들은 제3세계 민족주의의 합리주의를 거부하고, 종교적 청교도주의, 인종주의, 부족주의 같은 퇴행적인 구조에 의지했다. 메카에서 세계무슬림연맹은 가혹하고 남성 중심적인 이슬람을 대변해 움직였다. 남아메리카 지배층과 주류 가톨릭교회는 공산주의와 해방신학의 위협에 맞서 교회와 군사정부가 결탁하도록 부추겼다. 원시 상태로의 회귀는, 3세계 민족주의의 가장 뛰어난 전통인 세속주의와 사회주의 사회세력에 대한 공격을 위장해주는 역할을 했다.


나세르주의는 바이러스처럼 왕궁의 높은 담 안에도 스며들었다. 그들의 지도자는 붉은 왕자탈랄 빈 압둘아지즈였다. 그는 리야드의 지루한 궁정생활보다는 베이루트와 카이로의 활기찬 생활을 좋아했을뿐 아니라, 레바논의 민족주의자 총리(아랍연맹의 창설자 중 한 명)인 리아드 아스솔의 딸 모우나 아스솔과 결흔하기도 했다. 1958년 탈랄은 국민의회 창설이란 구상을 내놓았고 자유왕자들이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 움직였다.

탈랄은 1961년 상당한 시간을 들여 사우디 사회에 세속적 사회기관을 세우고 공공근로를 통해 실업을 개선하고자 했다. 왕자들이 좌익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군대를 동원하지 않고도 자유장교단이 해낸 일을 이뤄낼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대중적 기반이 없었고 가문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바로 그때 파이살이 탈랄의 발목을 잡았다. 파이살에게는 아람코의 고위관리들이 있었고, 그들 뒤에는 미국 정부가 있었다.

탈랄과 그의 무리는 베이루트로 후퇴했다. 자유왕자들은 진압됐다. 왕자 대부분은 입장을 번복하고 왕실 보조금을 받는 생활로 돌아갔다. 탈랄은 카이로와 베이루트를 오가며 영원한 반체제 인사이자 당과 대중기반이 없는 개인으로 남았다. (365)


lMF1970년대 탈식민 국가가 교육, 보건, 구제 같은 공공서비스를 포기하고 민간기업이나 자선단체에 그 일을 넘기게 했다. 파키스탄과 이집트에서는 국가가 서서히 공교육을 축소하자 값싼 이슬람 학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무슬림 인구가 있는 마르크스주의 국가에서 세계무슬림연맹(WML)과 그 동맹단체들은 공격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종교 세미나에서 훈련시킨 청년 집단을 무장시켜 좌익 정권을 불안정하게 만들도록 했다. WML 소속단체들이 남예멘과 아프가니스탄의 마르크스주의 정권을 전복하고, 수단에서 인도네시아까지 각지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의 세력 확대를 시도했다.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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