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피케티 '21세기 자본'

딸기21 2015. 3. 3.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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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중추수적'이다.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다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남들이 많이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하는 것은 한번씩 해보고 싶고, 많이 팔렸다는 책은 한번쯤 봐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책을 산다(다만 영화는 예외다. 난 영화를 안 좋아하니까).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장경덕 외 옮김. 글항아리)은 참 시끄럽게도 등장했다. 이 정도면 거의 '난리가 났다'고 해도 될 것이다. 국내에 출간되기도 전에 유명해졌다. 오만 군데에서 피케티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샀다. 그리고 다 읽었다. 읽고난 뒤의 느낌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느무느무 재미있다"는 것이다. 몇달 손 놓고 있었던 시간이 아까울 정도다.



어렵지 않다. 두꺼울 뿐이다. 경제학책? 저자의 말을 빌면 자기는 economic science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은 정치경제학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단다. 그대로다. 이 책은 수치를 따질 과학책이 아니라, '정치적인 책' 혹은 '철학에 관한 책'이다. 이 책으로 인해 불거지는 논쟁이 있다면 죄다 정치적인 다툼이거나 철학적인 논쟁이 돼야 할 것이다. 


책의 주제는 평등이다. 그러기 위해 피케티는 먼저 '성장'의 의미를 짚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제1부의 제2장은 '성장: 환상과 현실'이다. 성장, 다시 말해 전체의 파이가 커지는 것은 그 자체로 불평등을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있다(우리는 지금도 늘 이런 주장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있다). 


성장에서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는 지금 '전 세계에서' 성장의 사이클이 끝나가는 시기, 혹은 성장이 머지 않아 끝날 것으로 여겨지는 시기에 와 있으니 말이다. 쉽게 말해 GDP 증가로 대표되는 성장은 인구가 늘어나는 것과 거의 비례한다. 대부분 지역에서 인구는 더 늘지 않을 것이다. 경기의 문제가 아닌 구조의 문제다. 


평등화 요인으로서의 ‘성장’ 


인구 증가는 각국의 발전과 상대적 국력을 좌우하기도 하지만 불평등 구조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견조한 인구 증가는 상속받는 부의 중요성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일종의 평등화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 모든 세대는 어떤 의미에서는 스스로 부를 쌓아야 한다. 

과거의 미국처럼 이민자가 끊임없이 인구를 보충하는 사회도 마찬가지 다. 대부분의 이민자가 큰 재산 없이 들어온다고 볼 때, 이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을 수 있는 재산은 저축을 통해 새롭게 축적된 재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민을 통한 인구 증가는 다른 결과들, 특히 각 집단 내에서뿐만 아니라 이민자와 원주민 간의 불평등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이민자가 인구 증가의 원천이 되는 사회를 자연적 증가와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인구가 정체되거나 감소하면 이전 세대에 축적된 자본의 영향력이 늘어난다. 경제가 정체될 때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저성장 체제에서는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크게 웃돌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런 상황은 장기적으로는 부의 분배를 심각한 불평등으로 몰고 가는 중요한 요인이다. 나는 만약 우리가 앞으로 저성장 체제로 돌아간다면 그것이 자본축적과 불평등 구조의 변화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살펴볼 것이다. 특히 세습된 부의 시대가 귀환할 것이라는 점을 살펴야 한다. 


성장이 불평등의 감소나 적어도 엘리트 집단의 빠른 교체에 기여할 수 있는 또 다른 메커니즘이 있는데, 경제성장은 이전 세대에서 엘리트층에 속하지 않은 부모를 둔 개인들의 사회적 이동성을 늘릴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경제성장이 개인의 능력과 재능을 발현시켜주는 경이로운 수단이라는 통념은 경계해야 한다. 


(106-107쪽)


전체적으로 쉬운 문장으로 쓰였고, 논지가 반복되기 때문에 찬찬히 하지만 꽤 빨리(라고 말하려니 좀 찔린다;;) 읽을 수 있다. 아무튼 성장이 멈춘다는 것은 불평등이 심해질 거라는 뜻이다. 가뜩이나 여러가지 이유(민영화와 자본집중, 가진 놈들에게 덜 받는 조세제도 문제, 미국과 영국의 나빴던 정부들, 무지막지하게 받아챙기는 기업 CEO들 등등)로 불평등이 커지는 판에, 탈성장 그 자체로도 불평등이 더 더 더 커진다니. 


성장 다음에 도마에 오른 것은 인플레이션이다. 화가 나게도, 인플레이션이 줄어든다는 것 또한(!) 불평등이 늘어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돈 가치가 떨어지면 돈을 많이 가진 자들일수록 손해의 폭도 커지는데... 탈성장 시대, 디플레를 우려할 판이라니.


인플레이션 문제 


인플레이션은 이 연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희소성의 원칙에 바탕을 둔 리카도의 이론에서 상대가격 변동은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가격, 예를 들어 토지, 건물 혹은 석유의 가격이 장기간에 걸쳐 아주 많이 오른다면, 이는 우연히 이들 희소 자원의 최초 소유자가 된 이들에게 유리하도록 부의 분배를 영원히 바꿔 놓을 수 있다. 상대가격의 문제 외에 인플레이션 즉 모든 가격의 일반적인 상승 그 자체도 부의 분배의 동학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선진국들이 지고 있던 공공부채를 없애는 데 인플레이션이 큰 역할을 했다. 인플레이션은 또한 20세기 내내 종종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방식으로 사회집단 간에 다양한 재분배의 결과를 낳았다. 


(129쪽)


18~19세기의 통화가치 안정 


먼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인플레이션이 대체로 20세기 특유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 이전,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인플레이션은 제로이거나 혹은 제로에 가까웠다. 더 정확히 말해 1700~1820년 그리고 1820~1913년의 평균 물가상승률을 살펴보면 프랑스, 영국, 미국, 독일의 인플레이션은 기껏해야 연 O.2~0.3 퍼센트로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다. 돈의 가치는 수십 년 동안 변하지 않았고 미래에 그 가치가 변할 것이라고 생각할 만한 이유도 전혀 없었다. 


(129-131쪽)


역사는 흐른다. 피케티는 20세기 초반, 즉 양차 세계대전 사이 전간기 서유럽(주로 프랑스)의 흐름과 2차 세계대전 이후 급변한 각국 경제/조세정책을 들여다보며 우리가 오랫동안 익숙해져온, 하지만 사실은 몇 십년 '밖에' 되지 않은 지금의 경제체제와 임금/자본/불평등에 대한 생각들을 점검한다. 


1970년대 이후 부유한 국가들에서 나타난 자본의 귀환 


1970년 이후 부유한 국가들에서 민간자본이 강력하게 회복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새로운 세습자본주의가 출현한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변화는 세 가지 요인으로 설명되며, 이 요인들은 상호 보완적으로 이 현상을 매우 현저한 규모로 강화한다. 장기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성장률 둔화, 특히 인구증가율의 둔화다. 다른 두 요인도 가려져서는 안 된다. 첫 번째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공공부문의 자산이 점차 민영화되고 민간에 이전된 현상이다. 두 번째는 부동산과 주식 시세의 장기적인 반등 현상이다.

(210쪽)


저성장 체제 속에서의 자본의 귀환 


저축률이 약 10퍼센트를 유지하고 장기간의 성장률이 약 1.5퍼센트에서 안정화된다면-인구가 정체 되고 기술 진보가 느려진다는 것을 고려할 때 글로벌 자본총량은 이론적으로 연소득의 6~7배까지 높아질 것이다. 그리고 성장률이 1퍼센트로 떨어지면, 자본총량은 소득의 10배로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281쪽)


총소득의 불평등: 두 개의 세계 


상위 10퍼센트가 매년 생산의 90퍼센트를 차지한다면(그리고 부의 분배에서 보듯이 상위 1퍼센트가 단독으로 부의 50퍼센트를 차지한다면) 특별히 효과적인 억제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 한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자본 소유에 관한 한 그처럼 심한 수준의 집중은 심각한 정치적 긴장을 일으키는 요인이고 대개 보통선거권과 양립하기 힘들다. 

하지만, 상위 10퍼센트가 국민소득의 50퍼센트 이상을 결코 차지할 수 없다거나 이 상징적인 한도를 넘어서면 국가 경제가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없다. 실제로 그런 극단적인 불평등이 지속 가능한지 아닌지는 이를 억제하는 장치가 얼마나 효과적인지 뿐만 아니라 이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얼마나 효과적인지에도 달려 있다. 가령 불평등이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 보다 더 열심히 혹은 효율적으로 일하기로 한 선택의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거나, 혹은 부자들이 더 많이 벌지 못하도록 막으면 사회의 가장 궁핍한 구성원들에게 불가피하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이유로 불평등이 정당화될 경우, 소득의 집중이 역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수도 있다. 노동소득의 불평등과, 그리고 정도가 덜하긴 하지만 자본 소유의 불평등이 최근 몇십년처럼 계속 높아진다면 미국이 2030년경에 신기록을 세울 수도 있다.

(317쪽)


'슈퍼스타 자본주의'에 대한 얘기가 회자된 적 있다. 각계 각 분야의 슈퍼스타들이 차지하는 몫이 그 나머지들의 몫과 너무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타이거 우즈가 상금을 독식하고 대다수 골퍼들은 가난하다, 배용준이 다 벌고 나머지 연예인들은 낮은 보수를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케티의 눈을 따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는 절반의 진실이다. 


'슈퍼 소득자'가 너무 많은 몫을 챙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 중 '스타'는 별로 없다. 정확히 말하면 슈퍼 소득자들 중 특정 분야의 스타들은 5%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기업 돈을 느무느무 많이 챙겨가는 '슈퍼 경영자'들이다.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 둘을 구분하지 않으면 사회가 전반적으로 승자독식사회가 된 것이다, 이런 정도의 진단만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슈퍼 스타가 아닌 슈퍼 경영자들이 그 대다수임을 알고 나면, 슈퍼 경영자들의 보수가 한정 없이 올라가게 만들고 고소득층에 매기는 세금을 팍팍 줄여버린(요즘 말로 '부자감세') 미국 정부의 조치들이 그 배경에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마치 그 막대한 소득이 그들의 '(기업 경영) 능력'에 대한 보상인 듯 여기는 합리화 기제들도 눈에 보이게 된다.


‘자본소득자 사회’에서 ‘경영자 사회’로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소득계층 구조의 위쪽으로 갈수록 노동소득이 점점 더 사라지고 상위 1퍼센트와 0.1퍼센트에서는 자본소득이 더욱 지배적이 된다. 이런 구조적 특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는데, 오늘날에는 사회계층의 훨씬 더 위쪽으로 올라가야 자본소득이 노동소득보다 커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중요한 변화다. 자본소득은 상위 0.1퍼센트 혹은 0.01퍼센트에서만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닐 뿐 상위 1퍼센트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은 비교적 미미하다. 

상당한 정도로 우리는 자본소득자의 사회에서 경영자의 사회로, 즉 상위 1퍼센트가 대부분 자본소득자들이었던 사회에서 상위 1퍼센트의 최상위층이 주로 높은 보수의 노동소득으로 생활하는 개인들로 구성되는 사회로 바뀌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부의 집중을 제한하고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존재했던 초자본소득자 사회의 부활을 지금까지 막아온 구조적 요인의 하나로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매우 누진적인 소득세와 상속세의 도입이다.

(335쪽)


장기와 단기의 충돌 


매우 장기적인 추이에만 관심을 둔다면 20세기 프랑스에서 나타난 두드러진 변화는 1914년에서 1945년 사이에 임금불평등이 상당히 축소되었고 이후에는 비교적 안정화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자본-노동 소득분배가 노동소득의 불평등과 같은 방향으로 변화해 중·단기적으로는 서로를 강화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꼭 그렇지 않다는 점이 흥미롭다. 경제가 호황일 때는 국민소득에서 기업 이윤이 차지하는 몫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고 임금 체계의 최상위층이 받는 보수가 흔히 하위층과 중간층의 임금보다 더 많이 증가한다. 경기가 후퇴하거나 불황일 때는 다양한 비경제적 요인, 특히 정치적인 요인으로 인해 이러한 움직임들은 오로지 경기 변동에 의해서만 좌우되지 않는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경영자, 기술자, 그 외에 숙련 인력의 급여가 임금계층의 하위층과 중간층의 노동자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인상되었는데, 처음에는 아무도 여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47쪽)


1980년 이후 폭발한 미국의 불평등 


미국이 눈에 띄는 이유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슈퍼경영자’라는 계급이 처음 등장한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국이 1913년에 대법원과의 긴 싸움 끝에 연방소득세를 도입했다는 사실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가장 두드러지는 사실은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미국이 더 평등했지만 20세기에 접어든 이래 미국이 프랑스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유럽보다 현저히 더 불평등해졌다는 것이다. 


(351쪽)


미국에서는 1950년과 1980년 사이에 불평등이 최저 수준으로 떨어져 소득계층의 상위 10퍼센트가 국민소득의 30~35퍼센트를 차지했다. 이는 오늘날의 프랑스와 거의 같은 수준이다. 그러나 1900년 이후 소득불평등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상위 10퍼센트의 몫이 1970년대 국민소득의 30~35퍼센트에서 2000년대 45~50퍼센트로 증가했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변화가 계속된다면 2030년에는 상위 10퍼센트가 국민소득의 60퍼센트를 끌어모을 것이다. 


(354쪽)


주식시장의 끊임없는 단기적 변동이 상위 10퍼센트가 차지하는 몫의 변동성을 상당히 높였지만 불평등의 구조적인 증가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자본이득은 예외적으로 높거나 낮은 해는 제외하고 1970년대에는 상위 10퍼센트가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몫을 약 1~2 퍼센트포인트 늘렸고 2000~2010년에는 약 2~3퍼센트포인트 늘렸다. 따라서 그로 인한 구조적 증가분은 약 1퍼센트포인트 정도다. 이것은 의미 없는 수준은 아니지만 자본이득을 제외했을 때 상위 10퍼센트가 차지하는 몫이 14퍼센트포인트 증가한 데 비하면 그리 크지 않다.

불평등 증가의 대부분은 ‘1퍼센트’에서 나왔다. 상위 10퍼센트가 추가로 차지한 국민소득의 15퍼센트포인트 중에서 약 11퍼센트포인트, 즉 전체의 4분의 3이 (2010년에 연간 35만2000달러 이상을 번) ‘1퍼센트’에게 돌아갔고 그중 약 절반이 (연간 150만 달러 이상을 번) ‘0.1 퍼센트’의 손에 쥐여졌다.

(357쪽)


슈퍼 연봉의 부상 


미국의 불평등 증가는 주로 전례 없는 임금불평등의 증가와 특히 임금계층의 꼭대기층, 그중에서도 대기업 최고위 경영진의 보수가 극도로 높아진 결과다. 임금불평등은 1920년대에 확대되었다가 1930년대에 비교적 안정화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극심하게 축소되었다. 이 ‘대압축’의 국면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뤄져왔다. 이 과정에서는 1941년부터 1945년 사이에 미국의 모든 임금인상안을 심사하고 낮은 보수를 받는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만을 승인했던 국가전시노동위원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영자들의 급여는 물가 상승과 관계없이 체계적으로 동결되었고 전쟁이 끝날 무렵에도 완만하게 인상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상위 10퍼센트, 더 나아가 상위 1퍼센트가 노동소득에서 차지하는 몫이 평균 임금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359쪽)


소득세 신고에 나타난 소득과 기업의 보수 기록을 연결시킨 연구에 따르면 2000-2010년에 소득 최상위 0.1퍼센트의 대다수(60~70퍼센트)가 최고위 경영자들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온갖 운동선수 배우 예술가들은 이 집단의 5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새로운 불평등은 ‘슈퍼스타’보다 ‘슈퍼경영자의 등장과 훨씬 더 관련이 높았다.

(364쪽)


피케티가 이런 현상을 보며 던지는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불평등의 증가가 금융위기를 불러왔을까? 


미국에서 불평등의 증가가 금융 불안정에 기여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불평등 증가의 한 결과로 하류층과 중산층의 구매력이 거의 정체되었고 그리하여 평범한 가구가 빚을 질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특히 규제에서 자유로워진, 그리고 부유층이 금융시스템에 투입한 거대한 저축으로부터 높은 수익률을 얻고자 갈망했던 비양심적인 은행과 금융기관들이 점점 더 관대한 조건으로 신용을 제공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불평등의 증가가 예외적으로 강한 성장과 동반되었더라면 상황은 꽤 달라졌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았다. 미국 경제는 이전의 10년보다 더 느리게 성장했고 그리하여 불평등의 증가는 저소득층과 중산층의 소득이 거의 정체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렇게 사회집단 간에 내부적으로 이전된 규모(미국 국민소득의 약 15퍼센트포인트)가 2000년대에 미국이 겪은 놀라운 무역적자(국민소득의 약 4퍼센트)의 거의 4배에 이른다. 미국의 내부적 불균형이 글로벌 불균형보다 4배 더 크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위기와 관련된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야 할 곳은 중국이나 다른 국가들이 아니라 미국 내부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358쪽)


너무 많이 챙겨가는 놈들을 옹호해주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참으로 강력하다.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논리와 쌍둥이이면서, 그 비슷하게 강력한 것같다.


하지만 능력자가 많이 받는 게 아니며, 특히 기업 경영자들의 능력은 수치로 평가할 수도 없다. 아니 실은, 평가하기가 어려워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다. 그저 경영자들은 '지들끼리끼리' 보수를 정하기 때문에 임금이 높아진 것뿐이다.


부유한 사회에서의 극단적인 능력주의 


매우 심한 임금불평등을 정당화하기 위해 종종 능력을 중시하는 가장 열렬한 신념을 동원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임금불평등은 상속에 따른 불평등보다 더 많이 정당화된다는 생각들이 있다. 최근 미국에서는 슈퍼 경영자들이 받는 높은 임금(평균 소득의 최대 50~100배)을 종종 이런 식으로 정당화한다. 현대사회의 불평등을 능력주의로 정당화하는 모습은 최상위층뿐만 아니라 하층과 중산층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498쪽)


부자 순위에 오른 상속자와 기업가 


포브스 순위에서 가장 충격적인 교훈 가운데 하나는 특정한 한도를 넘으면, 거액의 재산은 상속된 것이든 기업가의 것이든, 소유주가 일을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모두 극단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빌 게이츠의 재산은 1990년에서 2010년의 기간에 40억 달러에서 500억 달러로 증가했다. 동시에 릴리앙 베탕쿠르의 재산도 20억 달러에서 250억 달러로 증가했다. 살아오면서 하루도 일하지 않은 베탕쿠르의 재산도 정확히 빌 게이츠의 재산만큼이나 빠르게 늘어난 것이다.

재산이 일단 형성되면 자본은 그 자체의 동학에 따라 자라나며, 단순히 그 규모 때문에 수십 년 동안 빠르게 성장을 계속할 수 있다. 일단 재산이 어느 정도 수준을 넘으면, 이 자본에서 나오는 거의 모든 소득이 재투자된다는 사실로 인해 포트폴리오 관리에서 나타나는 규모의 경제 효과와 위험을 감수하는 데 따른 기회로 인한 규모효과가 더욱 증폭된다. 


(524쪽)


'부의 도덕적 위계' 따위는 없다, 도덕적인 재산(능력으로 벌어들인 재산)과 도덕적이지 않은 재산(상속으로 받은 재산)의 구분 따위는 애당초 문제가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러니 돈 많은 사람들에게 세금을 많이 매겨서 불평들을 줄여야 한다.


문제는 단순하다. 부의 불평등이 기업가적인 노력 때문이라는 주장은 부의 모든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기업가는 세대를 거치면서 뿐만 아니라 일생 동안 자본소득자로 변모해가는 경향이 있다. 기대수명이 늘어나면서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지고 있다. 이것이 세계적으로 대규모 재산에 매년 부과하는 누진세가 필요한 중요하고 타당한 이유다. 그런 세금은 자산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기업의 역동성과 국제적인 개방경제를 보호하면서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조세적 접근은 또한 부의 도덕적 위계에 대한 헛된 논쟁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모든 재산은 부분적으로는 정당하지만 잠재적으로는 과도하다. 그 부가 완전히 도둑질의 결과인 경우는 드물며 절대적으로 능력에 의한 경우도 마찬가지로 드물다. 

서구 언론에서 흔히 보도하듯이 정부 지원으로 독점적인 지대를 얻어 세계 제1위 부자가 된 멕시코의 카를로스 슬림과, 칭찬할 만한 기업가의 본보기로 생각되는 빌 게이츠가 보통 비교된다. 솔직히 카를로스 슬림이나 빌 게이츠가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상대적 능력을 분석할 수도 없다. 


(529쪽)


2008년의 금융위기를 가리켜 피케티는 "21세기의 세계화된 세습자본주의 최초의 위기"(564쪽)라고 진단한다. 그는 이를 "시장의 실패에 대한 고발인 동시에 정부의 역량과 역할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그 해법으로 '자본에 대한 누진세'를 제시한다.


이 누진세가 어떤 것이냐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들여다봐야 할 것은, 20세기 불평등을 크게 줄이는 데 기여했던 누진세의 역사와 그것을 탄생시킨 불평등에 대한 인식들이다. 더불어 그 인식의 바탕이 됐던 '평등' 개념의 역사와, 우리가 통칭 '복지'라고 부르는 '사회적 국가'의 역사가 이어진다.


20세기 사회적 국가의 성장 


1920년에서 1980년 사이 부유한 국가들이 국민소득 중 사회적 지출에 투입하기로 한 금액의 비중은 상당히 증가했다. 또한 국민소득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0년부터 2010년대까지 거의 완벽한 안정성을 유지하고 있다. 모든 부유한 국가의 세수가 예외 없이 국민소득의 10퍼센트 이하인 균형 상태에서 국민소득의 3분의 l이나 절반으로 상승한 새로운 균형에 도달했다.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재건 이후에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정부의 역할을 강화하고 사회적 지출을 필요한 만큼 최대한 늘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합당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선택은 확실히 더 복잡해졌다. 국가의 대약진은 이미 일어났으며 두 번째 대약진은 없을 것이다. 어쨌든 첫 번째와는 다를 것이다. 


(567쪽)


현대적 재분배: 기본권의 논리 


현대적 재분배는 부자로부터 빈자에게로 소득이 이전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렇게 노골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현대적 재분배는 그보다는 의료, 교육, 연금을 비롯해 대체로 모두에게 동등한 혜택이 돌아가는 공공서비스와 대체소득을 위한 재원을 조달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대체소득의 경우, 종종 평생소득에 대략 비례하는 대체소득을 지급하는 형태를 띤다. 교육 및 의료와 관련해서는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소득(또는 부모의 소득)과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실제로 동등한 혜택이 주어진다. 현대적 재분배는 기본권의 논리 그리고 기초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일정한 상품에 대한 평등한 접근이라는 원칙에 따라 이뤄진다. 

1789년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 제1조 또한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고 살아갈 권리를 갖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바로 뒤에 "사회적 차별은 오직 공익에 바탕을 둘 때만 가능하다”는 선언이 따른다. 이 두 번째 문장은 중요한 부가문이다. 사실상 이것은 인간의 권리에 기반을 둔 모든 접근법에서 핵심적인 갈등 요소다. 평등한 권리라는 것은 과연 어느 선까지를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권리에 20세기의 사회적 국가가 제안하는 교육과 의료보장제도, 연금에 대한 동등한 권리도 포함시킨다면 한발 더 나아가 문화, 주거 및 여행에 대한 권리도 포함시켜야 하는가? 

두 번째 문장은 이 질문에 대한 일종의 답을 마련해준다. 평등이 정상적인 것이며 불평등은 오직 ‘공익’에 바탕을 둘 때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제 ‘공익’이라는 용어를 정의하는 일이 남는다. 

한 가지 합리적인 해석은 사회적 불평등이 오직 모두에게 이익이 될 때에만, 특히 가장 불리한 입장에 처한 사회적 집단의 이익에 공헌할 때에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권리와 기회가 가장 적은 사람들의 이익에 공헌하는 한, 기본적인 권리와 물질적 혜택은 가급적 모두를 대상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사회적 권리와 불평등에 의미를 부여해 특정한 역사 및 경제적 맥락과 결부시키려고 하면 의견의 불일치가 명백히 드러난다. 이런 갈등은 주로 경제적으로 가장 불리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 조건을 실제로 개선시키는 효과를 내는 수단들과 관련이 있으며, 모든 국민에게 부여할 수 있는 권리의 정확한 범위와도 관련이 있다. 또한 이는 정확히 어떤 요인들이 개인의 통제 안에 혹은 바깥에 존재하는지, 즉 개인에게 있어 어디까지가 행운의 영역이고 어디부터가 노력과 성취의 영역인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질문들에 대답하는 것은 오직 민주적 논의와 정치적 토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이러한 민주적 토론과 결정을 가능케 하는 제도와 규칙 그리고 서로 다른 사회집단들의 상대적 힘과 설득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573쪽)


빈곤국과 신흥국에서의 사회적 국가 


20세기 선진국에서 부상한 사회적 국가는 보편적인 사명을 지니고 있는가? 빈곤국과 신흥국에서 유사한 발전을 볼 수 있을 것인가? 이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없다. 서유럽 국가들의 국민소득 대비 세수는 약 45~50퍼센트에서 안정된 것으로 보이는 데 비해 미국과 일본의 경우 이 비율이 약 30~35퍼센트 수준에 고정된 것으로 보인다. 1970년에서 1980년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국가들을 보면 세수가 보통 국민소득의 10~15퍼센트에 불과하다. 남미와 북아프리카 그리고 중국처럼 중간 수준의 발전 단계에 있는 나라들로 눈을 돌려보면, 정부가 국민소득의 15~20퍼센트를 가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선진국들이 과거 비슷한 발전 단계에 있을 때보다 낮은 수준이다. 가장 놀라운 점은 부유한 국가와 그리 부유하지 않은 국가 들 사이의 차이가 최근 몇 년간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염려스럽다. 오늘날 전 세계 모든 선진국에서 재정 확보와 사회적 국가 건설은 현대화와 경제발전 과정의 핵심적인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증거를 보면 국민소득의 10~15퍼센트에 불과한 세수로는 국가가 전통적으로 수행했던 기본적인 책임 이상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공공서비스 기능의 부실은 정부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이에 따라 세금 인상이 훨씬 더 어려워지는 것이다. 

더욱이 1980년 이후 선진국들에서 시작된 자유주의 물결은 가난한 나라들이 공공부문을 축소하고 경제발전을 촉진하는 데 적합한 세제를 발전시키는 일의 우선순위를 낮추도록 강요했다. 


(587쪽)


자, 길고도 길었으나... 이제부터가 핵심이다.


현대적 재분배: 누진세의 문제 


과세는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다. 과세는 상당히 정치적이며 철학적인 문제다. 모든 주요 정치적 격변의 핵심에는 국가재정의 혁명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에서 앙시앵레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혁명 의회가 귀족 및 성직자의 세제상 특권을 폐지하고 현대적인 보편적 과세 제도를 확립했을 때였다. 미국의 독립혁명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이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의 세금을 정하려 했을 때 시작되었다. 


(590쪽)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세계에서 조세경쟁이 격화됨에 따라 많은 정부가 자본 소득에 대한 누진적 소득세를 면제해주었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 중 하나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세금이 고소득 계층에서 역진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소득 상위 1퍼센트에서 명백하게 나타나는 역진성은, 이 계층에서는 누진적 과세에서 대부분 면제되는 자본소 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장 부유한 시민들이 조세 체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조세에 대한 사회적 동의에 큰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조세제도가 전체적으로 불공정한데, 왜 다른 사람을 위해 계속 세금을 내야 하는가. 따라서 현대적인 사회적 국가가 계속 유지되려면, 그 기초가 되는 세금제도가 최소한의 누진성을 지니거나 명백히 상류층에게 역진적이지는 않도록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594쪽)


어림없는 소리 말라고? 아니다. 20세기의 전반기를 지나 1980년대가 되기까지 여러 선진국, 특히 미국은 '몰수'에 가깝게 부자들에게 세금을 매겼다. 다시 강조하지만, 과세는 곧 정치의 문제다!


과다소득에 대한 몰수적 과세: 미국의 발명 


20세기 누진세의 역사를 살펴보면 누진세의 적용에 있어 영국과 미국이 앞서 있었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특히 미국은 ‘과도한’ 소득과 자산에 대해 몰수적인 세금 confiscatory tax을 고안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모든 선진국은 흔히 변덕스런 방식으로 매우 높은 최고세율의 적용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1919년부터 1922년 사이에 70퍼센트 이상의 세율을 시도한 최초의 국가는 바로 미국이었는데, 1919~1922년에는 먼저 소득에 적용했고 1937~1939년에는 상속재산에 적용했다. 

주된 목표는 부가적인 세수 확보가 아니다. 이런 높은 소득 구간에서 얻을 수 있는 세수는 많지 않다. 이런 세금의 목적은 지나치게 많은 소득과 대규모의 상속을 억제하려는 데 있다. 이런 세금의 목적은 적어도 그것들을 유지하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들도록 만들어 영속화되는 것을 강력하게 제한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진세는 사회적 정의와 개인의 자유 사이에 이뤄진 이상적인 타협을 나타낸다. 

1919년 당시 미국경제학회 회장이었던 어빙 피셔는 “2퍼센트의 사람이 50퍼센트 이상의 부를 소유한다”는 사실과 “인구의 3분의 2는 거의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비민주적인 부의 분배”로 간주했으며 이 문제가 미국 사회의 기반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구유럽과 닮아가고 있다는 우려가 틀림없이 미국이 누진세에 관심이 많았던 이유 중 하나였다. 


(605쪽)


민주적 투명성과 금융의 투명성 


자본세는 현대의 사회적 국가가 의존하는 다른 세원을 적당히 보충해주는 정도 이상은 아닐 텐데, 그 세수는 고작해야 국민소득의 3~4퍼센트 정도다(그래도 가볍게 볼 것은 아니다). 자본세의 주된 목적은 사회적 국가의 재원을 조달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를 규제하는 것이다. 첫 번째 목적은 부의 불평등이 끝없이 증가하는 것을 막는 것이고, 두 번째 목적은 금융 및 은행 제도의 위기를 피하기 위해 금융과 은행 시스템에 효과적인 규제를 가하는 것이다. 


(621쪽)


드디어 결론에 이르렀다! 


저자가 아주아주 강조해서 되풀이하는 공식이 있다. 자본 수익률은 생산의 성장률을 웃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생산해서 돈 버는 놈보다 돈으로 돈 버는 놈이 더 많이 번다! 이걸 피케티는 r>g라는 공식으로 표현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 책은 "생산해서 버는 놈보다 돈 가진 놈이 더 큰 부자가 되는 건 잘못됐다, 그러면 그넘들이 계속 점점 더 부자가 될 것이다, 그러니 돈 가진 놈들에게 아주 '글로벌하게'(안되면 최소한 지역적으로라도) '누진적으로' 세금을 매기자"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거나 느슨하게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안정을 초래하는 주된 힘은, 민간자본의 수익률 r이 장기간에 걸쳐 소득과 생산의 성장률 g를 크게 웃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r>g라는 부등식은 과거에 축적된 부가 생산과 임금보다 더 빨리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등식은 근본적인 논리적 모순을 드러낸다. 기업가는 필연적으로 자본소득자가 되는 경향이 있으며 노동력밖에 가진 게 없는 이들에 대해 갈수록 더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자본은 한번 형성되면 생산 증가보다 더 빠르게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과거가 미래를 먹어치우는 것이다. 


(690쪽)


올바른 해법은 매년 부과하는 누진적인 자본세다. 이는 초기 단계에 새로운 자본축적을 촉진하기 위한 경쟁과 유인을 유지하면서도 끊임없는 불평등의 악순환을 피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역사적 경험은 부의 거대한 불평등이 기업가 정신과는 거의 관련이 없으며 성장을 촉진하는 데 쓸모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런 해법, 즉 자본에 대한 누진세는 높은 수준의 국제 협력과 지역별 정치적 통합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개별 국가 즉 예전의 사회적 타협이 이뤄졌던 범위를 벗어난다. 


r>g라는 부등식은 시장의 ‘불완전성’에 따른 것이 아니므로 순수하고 완전한 경쟁을 통해 바꿔놓을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해야 한다. 위험은 현실이지만 진정한 대안은 아직 없다. 우리가 자본주의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으려면 민주주의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691쪽)


헥헥... 이제 다 읽었다!


아래는, 위에서 인용한 큰 줄기에 붙은 이파리들인데 장차 참고하려고 스크랩해둔 것들. 


독일: 라인 자본주의와 사회적 소유 


독일에서는 19세기 후반 농경지의 중요성이 영국보다 프랑스의 경우와 더 유사했고 산업자본의 가치는 프랑스나 영국보다도 더 높았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의 해외자산은 프랑스의 절반, 영국의 4분의 1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몇몇 매우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긴장의 원천이 되었다. 

또한 독일은 지난 수십 년간 무역흑자 덕분에 상당한 해외자산을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10년 독일의 순해외자산은 국민소득의 50퍼센트에 근접했다. 그중 절반 이상이 2000년 이후 축적되었다. 이는 1913년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 이것은 19세기 후반의 영국과 프랑스의 해외자산에 비하면 적은 양이지만 두 과거 식민 열강의 순해외자산이 현재 제로에 가까운 것에 비하면 상당한 것이다. 


1920년대의 초인플레이션은 독일 사회와 경제를 극심한 불안정으로 몰고 갔다. 독일 국민은 이런 경험을 통해 인플레이션에 강한 반감을 품게 되었다. 20세기에 공공부채 청산을 위해 인플레이션을 가장 극적으로 활용했던 독일이 이제는 연평균 물가상승률이 2퍼센트만 넘어도 견뎌내기 힘들어 한다는 것이다. 반면 20세기에 정부가 지나칠 만큼 꼬박꼬박 부채를 갚아왔던 영국은 인플레이션에 좀 더 유연한 태도를 보이며, 중앙은행에서 상당한 공공부채를 매수하는 것이 약간 높은 인플레이션을 의미한다 해도 잘못된 것이라 여기지 않는다. 


(174쪽)


우선 고려할 사항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독일의 부동산 가격이 비교적 낮다는 것이다. 이는 1990년 이후 유럽의 다른 모든 지역에서 나타난 부동산 가격의 급격한 상승이 독일에서는 통일의 효과 때문에 억제되었다는 것으로 어느 정도는 설명될 수 있다. 통일로 인해 많은 값싼 주택이 시장에 나왔던 것이다. 

어쨌든 독일이 프랑스 및 영국과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대부분 주택자본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기업의 자본과 같은 다른 종류의 국내자본의 가치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차이는 독일 부동산의 저평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일 기업들의 저평가된 주식 시장가치에서 기인한 것이다.

독일 기업의 낮은 시장가치는 종종 ‘라인 자본주의Rhenish Capitalism’나 ‘이해관계자stakeholder 모델’이라 불리는 경제모델의 특정을 반영한다. 이는 기업들이 주주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대표로부터 지방정부, 소비자 단체, 환경보호 단체 등의 대표까지 포함하는 이해관계자라고 알려진 집단들에 의해 소유되는 경제모델을 일컫는다. 이해관계자 모델이 필연적으로 낮은 시장가치를 의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낮은 사회적 가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177쪽)


국부펀드의 수익: 자본과 정치 


2013년 기준으로 7000억 유로 이상의 가치를 지난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국부펀드 가운데 가 장 상세한 금융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국부펀드는 대중의 감시 대상이었기 때 문이며 투자 수익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국부펀드, 특히 중동 지역의 국부펀드는 노르웨이의 국부펀드보다 훨씬 더 불투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로 다른 펀드들은 분명 서로 다른 투자 전략을 따르며, 이러한 전략은 대중과의 소통 방식 그리고 국제정치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아부다비는 높은 펀드 수익률에 대해 거침없이 말하고 있는 반면, 석유펀드 순위에서 쿠웨이트, 카타르, 러시아를 앞서 아부다비와 노르웨이에 이어 3위를 기록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인구가 걱정스러울 정도로 적은 페르시아 만 연안의 작은 산유국들은 보고서를 주로 국제 금융계에 보내고 있다. 이와는 달리 사우디아라비아의 보고서는 더 진지하며 석유 매장량뿐만 아니라 국민계정 및 정부 예산에 대한 정보도 제공한다. 이런 보고서들은 우선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민에게 분명하게 전달된다.

이것만이 유일한 차이는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펀드는 훨씬 덜 공격적으로 투자되는 것으로 보인다. 공식 문서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의 수익률은 2~3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대부분의 돈이 주로 미국 재무부 채권에 투자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해도, 사우디아라비아가 자국을 군사적으로 방어해주는 국가에 저금리로 돈을 빌려주는 것이 불합리한 일은 아니다. 전 세계적 자본 분배의 동학은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546쪽)


국부펀드는 세계를 소유할 것인가? 


2013년에 국부펀드의 총투자가치는 5조3000억 달러를 조금 넘었으며, 이 가운데 약 3조2000억 달러는 석유수출국 펀드에 속하고 약 2조1000억 달러가 비산유국 펀드(주로 중국, 홍콩, 싱가포르 그리고 다른 작은 펀드들)에 속한다. 오늘날 억만장자는 세계의 총 민간자산 가운데 대략 1.5퍼센트를 소유하며 국부펀드가 또 다른 1.5퍼센트를 소유한다. 

국부펀드와 억만장자 간의 핵심적인 차이는 펀드, 혹은 석유수출국 펀드는 수익의 재투자뿐만 아니라 석유판매 수익금의 일부를 투자함으로써 성장한다는 것이다. 천연자원의 개발에서 나오는 연간 지대는 천연자원의 판매 수익금과 생산비용과의 차이로 정의되는데, 2000년대 중반 이후 전 세계 GDP의 약 5퍼센트였다. 이것의 절반은 석유로 인한 지대이고 그 나머지는 다른 천연자원, 즉 주로 가스, 석탄, 광물, 목재에서 나오는 지대다.

이렇게 얻은 지대 가운데 충분히 큰 비율이 매년 국부펀드에 투자된다면, 2030~2040년에는 국부펀드가 세계 자본의 10~20퍼센트 혹은 그 이상을 소유하게 되는 시나리오를 예상할 수 있다. 어쨌든 석유수출국의 국부펀드가 지속적으로 성장해 2030~2040년 전 세계 자산에서 차지하는 몫이 현재보다 최소 2~3배 커지리라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다.


(548쪽)


유로화 : 21세기를 위한 국경 없는 통화인가? 


유럽이 1992년에 국경 없는 통화를 만든 것이 단순히 실용적이라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유럽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대다수의 사람이 중앙은행의 유일한 역할은 물가 상승을 통제하는 것이라고 믿던 시기에 유로화에 대한 제도적 합의 사항을 정했다.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은 각국 정부와 국민으로 하여금 중앙은행은 정치적 통제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하며 낮은 인플레이션을 유일한 목표로 믿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유럽이 국경 없는 통화와 정부 없는 중앙은행을 만든 이유다. 하지만 2008년의 경제위기는 이러한 중앙은행에 관한 정태적인 시각을 깨뜨렸다.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중앙은행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하며, 기존의 유럽 기관들은 눈앞에 닥친 임무를 수행하기에 전적으로 부적당하다는 것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6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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