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

무너지거나, 두 손 들거나, 협상하거나...어느 새 사라진 미국의 적대 국가들  

딸기21 2014. 12. 18.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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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새해 초 국정연설에서 이란, 이라크, 북한을 ‘악의 축’이라 지목했다. 비록 적대관계에 있는 나라라 할지라도 극단적인 표현으로 ‘적들과 우리’ 사이의 선을 그은 것은 적절하지 못했다는 지적과 함께, ‘악의 축’을 비판한 숱한 패러디가 쏟아져나왔다.


그 후 12년이 지난 지금, 북한을 제외하면 미국에게 더이상 ‘적대국가’는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17일(현지시간) 국교 정상화 합의와 함께 50여년에 걸친 미국과 쿠바 사이의 적대마저 끝을 맺게 됐다. 

 

21세기 초반만 해도 오사마 빈라덴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준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무아마르 카다피의 리비아, 시아파 종교지도자들이 이끄는 이란, 세습독재정권에 신음하는 시리아, 우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 등 여러 국가들이 미국에 대놓고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 나라들은 모두 미국의 공격에 무너졌거나, 미국의 전방위 압박에 손을 들었거나, 미국과의 협상을 택했다. 

 

이라크도, 리비아도... 미국의 적들 '몰락'


아프간 탈레반은 1996년 전국을 장악한 뒤 미국의 수배를 받던 빈라덴을 숨겨줬다. 하지만 2000년 이후로는 미국과 물밑 협상을 하며 빈라덴을 내주고 안전을 보장받으려 했다. 탈레반 관리들이 미국에 가서 가스송유관 건설 권한을 주겠다며 거하게 대접을 받았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면서 모든 협상은 물 건너갔고, 미국은 그 해 10월 아프간 공습을 시작했다. 탈레반 정권은 축출됐다.


2003년 5월 미국이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점령한 뒤 바그다드 시내에 있던 사담 후세인 동상이 끌어내려지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3년 3월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미 1991년 걸프전을 겪고 이후 계속된 미국의 금수조치와 유엔 무기사찰로 방어능력을 잃은 후세인 정권은 바그다드 공습과 동시에 도주했다. 고향 티크리트의 어느 가옥에 숨어있던 후세인은 초라한 몰골로 생포됐고, 뒤에 이라크 특별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처형당했다.

 

이라크가 부서져나가는 걸 본 리비아의 카다피는 2003년 말 대량살상무기(WMD) 개발·보유를 전면 포기하고 국제사찰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미국의 엄청난 화력 앞에 백기를 든 것이다. 리비아의 ‘투항’을 중재한 사람은 당시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였다. 리비아는 이라크 공습이 시작되자마자 미국과 대화를 시작해, 9개월 만에 ‘있지도 않은’ WMD 포기 선언을 했다. 그 대가로 미국은 1988년 팬암기 폭파사건(로커비 사건) 이후 리비아에 가해온 강도높은 경제제재를 일부 풀어줬다. 


아이러니하게도 카다피를 무너뜨린 것은 미국이 아닌 리비아 국민들이었다. 카다피는 2011년 봄 북아프리카를 휩쓴 ‘아랍의 봄’ 민주화 물결에 밀려났고, 그 해 10월 사살됐다.

 

이란 핵협상, 오바마 중동정책 '최고의 성과'


이란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개혁파 정권이 8년간 득세해 미국과의 적대관계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2005년 보수 강경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양국 간 관계는 다시 악화일로를 걸었다. 아마디네자드는 2006년 부시에게 미국의 외교적 일방주의와 중동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한 장문의 공개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양국 간 최대 이슈는 이란 ‘핵 의혹’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이란에 중도온건파 하산 로하니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두 나라 관계가 급진전됐고, 9월 로하니의 유엔총회 연설 뒤 숨가쁜 막후 논의를 거쳐 로하니-오바마 간 전화통화가 이뤄졌다. 두 달 뒤 이란은 서방과 전격적으로 핵 협상에 합의했다. 이후 이행과정을 둘러싸고 협상이 계속 진행되고는 있지만, 오바마 정부가 이란 문제를 푸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기 때문에 관계개선 쪽으로 가닥은 잡힌 셈이다. 경제적 압박을 받는 이란도 협상에 적극 나서야 할 처지다.


지난해 9월 존 케리 미 국무장관(맨 왼쪽)과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맨 오른쪽)이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만나 핵협상을 시작하기 앞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란 프레스TV(presstv.ir)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은 3년반 넘게 이어진 내전 속에서도 여전히 무너지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이 반정부진영 내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에 나서면서 오히려 미국의 공습을 반기는 상황이 됐다. 어찌 됐든 더 이상 중동의 작은 맹주 노릇을 하던 ‘군사강국’ 시리아는 없다. 부시에게서 “지옥의 유황불 냄새가 난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해온 베네수엘라의 차베스가 지난해 세상을 뜬 후, 국제무대에서 미국과 ‘맞장 뜨는’ 독설가는 사라졌다.

 

'적들' 사라졌지만... 세계도, 미국도 더 위험해졌다


이렇게 미국과 적대하던 나라들은 하나둘 사라졌으나, 역설적으로 미국의 위상은 어느 때보다도 낮아 보인다. 오바마의 중동정책은 방향을 잃었고,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존재감이 없다’는 비판이 들끓는다. 10여년의 대테러전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탈레반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으며, 시리아는 물론이고 이라크의 일부 지역마저도 반미 무장세력 IS에 넘어갔다. 


카다피 정권이 사라지고 난 리비아에서 2012년 미국 대사는 테러공격에 목숨을 잃었고, 미국인들은 세계 곳곳에서 안전의 위협을 받고 있다. 올들어 계속된 우크라이나 위기에서 미국은 내내 무기력을 노출했다. 적대 ‘국가’가 사라진 지금 미국은 무장세력과의 전쟁에 본격 뛰어들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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