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아시아의 어제와 오늘

7세 아이와 나무판자에 매달려 6시간 바다 위를... 필리핀 타클로반 슈퍼태풍 '하이옌' 1년

딸기21 2014. 11. 7.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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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맘때, ‘슈퍼태풍’이라 불린 초대형 태풍 하이옌이 필리핀 세부 섬 부근 타클로반 일대를 강타했다. 당시 공군장교 페르민 카랑간은 타클로반 공항의 설비를 보호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바닷물은 공항청사 안에까지 넘쳐들어왔다. 강풍에 문을 닫을 수조차 없었다. 허리까지 물이 들이찼다. 카랑간은 부대원들에게 지붕으로 올라가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그 순간 지붕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부서진 건물에서 떨어져나온 버팀목을 붙들고 물 위를 떠돌며 살아남으려 애쓰던 카랑간은 주변에 있던 코코넛 나무를 향해 간신히 헤엄쳐갔다. 나무 위를 올려다보니 한 어린 아이가 간신히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그대로 있으면 물이 곧 나무 위쪽까지 물이 차올라 파도에 휩쓸려갈 것이 뻔했다. 카랑간은 아이를 내려오게 해서 함께 버팀목에 매달렸다. 나무기둥 세 개를 이은 삼각형 모양의 버팀목은 안쪽에 구멍이 나 있어, 카랑간과 아이가 함께 들어가 있을 수가 있었다. 


카랑간과 아이는 풍랑 속에서 함께 바다 위를 떠돌았다. 사방이 물이었고, 지금 떠내려가고 있는 곳이 육지로 향하는 것인지 바다로 멀리 나가고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버팀목을 잡고 있는 손은 추위 때문에 보라색으로 변해갔다. 아이는 저체온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체온과 함께 기력이 떨어져 잠이 들면 그대로 죽을 게 뻔했다.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잠들 지 말라고, 이름은 무어냐고 계속 말을 걸었다.” 아이의 이름은 미겔 룰로나, 겨우 7살이었다. 어머니는 마닐라에서 일하고 있고, 소년은 누나와 함께 조부모 밑에서 지내며 타클로반 공항 옆 산호세 마을에 살고 있다고 했다. 미겔과 함께 사투를 벌이면서 카랑간은 마닐라에 있는 자신의 세 아들을 떠올렸다. 버팀목을 잡은 손에 힘이 빠질 때마다 옆에 있는 미겔의 흐느낌을 들으며 다시 손에 힘을 주곤 했다.



폭우가 몰아쳤고, 파도는 3m 가까이 치솟았다. 파도가 솟구칠 때면 바닷물이 눈에 들어가 앞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그렇게 6시간 가까이 ‘목숨 건 항해’를 한 끝에 카랑간은 어렴풋이 보이는 산의 윤곽을 확인했다. 그는 미겔에게 “이제 곧 땅이 나올 것”이라며 격려를 했고, 힘겹게 헤엄쳐 바닷가로 나갔다. 하이옌에 부서지긴 했지만 그들이 도착한 해변마을은 그래도 집들이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4km를 떠돌다가 산페드로 만을 건너 타클로반 옆에 있는 사마르 섬의 산안토니오에 도착한 것이었다.

 

카랑간은 6일 영국 BBC방송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을 전하며 “땅에 발을 딛고 나니, 마치 세탁기 안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산안토니오라 해서 깜짝 놀랐다. 사람들도 내가 아이와 함께 만을 건너온 것을 알고는 몹시 놀랐다.” 

 

카랑간은 현지 경찰을 찾아가려 했지만 산안토니오 역시 태풍에 파괴된 뒤였다. 도로는 막혔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다시 7km를 건너 타클로반으로 이어지는 산후아니코 다리 부근의 경찰서로 갔다. 거기서 미겔을 다시 타클로반에 데려다주려 했으나 다리도 끊겨 있었다. 그는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미겔을 맡겼다.



카랑간은 나중에 미겔을 다시 만났다.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아이를 데리고 카랑간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카랑간의 동료 장교가 미겔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도와줬다. 그러나 미겔의 누나와 할머니는 태풍 속에 실종된 채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8일로 태풍 하이옌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되지만, 미겔은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미겔은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미겔의 어머니는 카랑간에게 “태풍 때 겪었던 공포감이 종종 아이를 다시 덮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미겔의 어머니가 아이를 구해줘서 고맙다고 하자 카랑간은 “내가 아이를 살렸지만 이 아이 역시 나를 살렸다”며 “미겔이 없었다면 나도 살아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날의 기억은 카랑간의 인생관을 바꿨다. 그는 BBC에 “직업군인으로써 일에만 매달렸는데, 그 뒤로는 일과 내 삶의 균형을 맞추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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