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지그문트 바우만,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

딸기21 2014. 9. 30.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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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만 인터뷰, 그 다음은 타리크 알리-올리버 스톤 대담, 그러고 나서 '엔데의 유언'을 읽고 있는데 회사에 나눔문화 허택 선생님이 이반 일리치의 책을 놓아두고 가셨다. 이렇게 좋은 책들이 줄줄이 이어지니...


<희망, 살아있는 자의 의무>(궁리)는 인디고연구소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을 몇 차례 찾아가 기획 인터뷰를 한 것을 묶고, 거기에 바우만을 연구한 이들의 글을 덧붙인 것이다. 요 몇년 새 바우만의 글을 읽었는데, 비록 몇 권 되지는 않지만 모두 다 흥미진진했다.

무인도에 간다면 어떤 책을 가지고 갈 것인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때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페렉의 『인생사용법』, 보르헤스의 『미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 중에서 선택할 테지만 너무 어려운 질문이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물론 이 중 꼭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보르헤스의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선택하겠지만요. (81쪽)

바우만의 글을 내가 왜 좋아할 수밖에 없는지 이제 확실히 알았다! 무질과 페렉은 모르지만,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 들어있는 보르헤스의 책과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라니!!!

자유란 안전보장이라는 개념과 결혼한 용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인간의 품위 있는 삶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두 가치는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서로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유 없는 안전보장이란 노예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지요. 노예란 자유가 없는 상황 속에서 안전을 보장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안전보장 없는 자유란 혼란이자 불확실성이며, 계속되는 두려움과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역사 속 다양한 인간사회와 문화들을 보면 자유와 안전보장 사이에서 올바른 균형을 맞추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늘 있어왔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 노력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자유와 안전 사이의 관계를 선형적인 발전 과정이 아니라 '진자 운동'과 같이 끝없이 움직이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49쪽)

아직은 미약하지만 점점 더 강해지는 경향들 중 하나는 근본주의자들의 움직임입니다. 오직 몇 개의 법칙만이 지배하도록 사회를 단순화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경향들이 그것이지요. 문제는 이 약속을 만드는 과정에 당신은 배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약속이지만 당신은 접근할 수도 없고, 접근할 자격도 주어지지 않은 그런 약속을 철저히 따라야 하는 것이죠. 

이 약속이 더 강력해지고, 더 빈틈없이 작동하게 된다면 더 심한 배제가 자행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 고통을 담보로 하는 자유로운 사회를 왜 원하는가, 왜 억압을 견뎌야 하는가 등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사회적 과업에 부적절한 존재로 낙인찍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는 것이죠. 그렇게 하여 이제 많은 사람들은 근본주의적인 사회의 원리 속에서 자신의 존엄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존엄을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하는 안정된 위치에 있고자 애쓸 것입니다. (69쪽)

오늘날의 사회를 성취주의 사회라고 부르는 것은 다소간 무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재성취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재성취해야 합니다. 이는 끊임없이 자신을 재정의하는 문제와 같습니다. 정체성 형성이란 이제 매순간 우리가 생을 걸고 해야 하는 과업이 되었습니다.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멈추는 순간 당신은 퇴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80쪽)

리처드 세넷에 따르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열려 있는 협동"에 진정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공생의 원칙이 사전에 계획되거나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협동의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열려 있다는 것은 구성원 모두가 서로 배우고 가르치면서, 단순한 토의를 하기보다는 긴밀한 협동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30쪽)

불을 지펴줄 최초의 불씨가 필요한 것은 부인할 수 없죠. 하지만 이 점화 뒤에 무엇이 따라오는지는 불씨가 아니라 가연성 물질들의 속성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여러 다른 종류의 불씨가 다양한 군중들을 이끌어 오더라도 말입니다. (139쪽)

저는 이것이 지식인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익숙한 것을 낯선 눈으로 보게 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문제시함으로써 인간세계를 통념이나 억견 doxa의 비가시성으로부터 구출하여 각성의 영역, 결단력 있는 행동의 대지로 이끌고 가는 것 말입니다. (157쪽)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이와 함께 치욕 속에 있는 이들도 있다. 세상이 그 어떤 역경을 줄지라도 나는 이 둘 모두에게 충실할 것이다." 까뮈의 신념이 담긴 이 선언이 공동선의 실천 에 대해 가장 적합한 답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아가 이것이 더욱 멀리 퍼져서 우리 모두의 삶을 이끄는 강령이 되는 것은 어떨까요?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세넷의 말을 빌려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열려 있는 협동"에 맡기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58쪽)

몇 세기 전에는 '현대화'된다는 것이 '완벽한 최종 단계'를 쫓는 것을 의미했지만, 지금은 끝없는 개선을 의미할 뿐입니다. 눈에 보이거나 추구할만한 최종단계 따위는 없지요. 저는 예나 지금이나 고체성 solidity 과 액체성 liquidity 을 이분법으로 사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둘은 서로 분리할 수 없도록 고정된 변증법적 관계의 쌍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액체성은 고체성의 반대편에 서 있는 적수가 아니라 고체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산물에 더 기깝습니다. 고체성이 부모 격이죠. (187쪽)

세상을 오래 살아온 노학자의 이야기는 늘 울림이 크다. 특히 바우만처럼 이 체제와 저 체제의 압력을 견뎌내며 '다른 사회'를 꿈꿔온 할아버지라면.

아시다시피 저는 지나치게 오래 살아왔습니다. 정말이지 많은 역사를 내 피부로 직접 느꼈지요. 서로 아주 다른 제도와 체제를 가진 사회에 살았고, 그러면서 극단적으로 다른 두 형태의 전체주의를 경험하기도 했지요.

제 삶의 끝자락에서 제가 꽤 오랫동안 중요한 가치들이 제 기능을 충실히 발현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꿔왔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스스로 결론을 내리자면, 다소간 체념을 더한 결론이긴 하지만, 결코 비관적인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좋은 사회에 대한 저의 정의는 아주 간단합니다. 좋은 사회란 자신이 속한 사회가 결코 현재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입니다. 그래야만 현재 상태로부터 개선과 발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1쪽)

요컨대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의 실현가능성을 뒷받침해줄 그 어떤 확실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그 일이 성공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인정받지 못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희망하기를 멈추는 이유가 되지는 못 합니다.

낙관주의자는 지금 이곳의 세계가 도달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비관주의자는 '누가 정답을 알겠어, 그래도 아마 저 사람 말이 맞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죠. 저는 제3의 부류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희망하는 자들'입니다. 금과는 다른 대안적인 세계가 가능하다고 희망하는 자들이죠. 저는 새로운 세계가 불가능해지는 지점은 오직 우리가 희망하기를 멈출 때뿐이라고 생각합니다. (206쪽)

책 뒷부분에는 요즘 나의 관심사가 된 '도시의 도전과 가능성'에 대한 토막글도 하나 붙어 있다.

왜 국민국가는 전 지구적 상호의존성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들에 있어 특히 부적합한가. 국민국가는 본성상 경쟁과 상호배척이라는 특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상호협력에 대해 썩 내키지 않아 할 뿐만 아니라 전지구적 공동선을 정립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도시가 문제 해결에 아주 적합한 것일까? 도시는 '독립'과 '자율'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다가 성벽에 고립된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나 불평등, 주권이나 민족성 등의 억압적인 힘에 제약을 받지 않는 협력과 평등주의라는 고유의 잠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력이 넘쳐흐르며 공동체는 굳건해지고 시민의식은 고양되 는 장소"로 도시가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도시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도시가 살아남고 또 번영하기 위해서는 실용주의와 문제해결, 협동과 네트워크, 창조성과 혁신에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해야만 한다. 결국 세계화되고 다문화적이며 다중심적인 세계의 도전에 직면히여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최상의 능동적인 주체로서 도시는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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