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공감] 빙하공화국

딸기21 2014. 3. 11.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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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 주민투표 문제로 세계가 시끄럽다. 지금도 자치공화국이고 주민과 정부와 의회가 있지만, 이들이 분리를 하겠다고 하니 난리가 났다. 이유는 단 하나, 그냥 분리한다는 게 아니라 ‘러시아의 일부’가 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옛소련권 나라들이 떨어져나가고 거기서 또 다른 나라들이 가지치듯 분리독립할 때 박수치던 서방이 갑자기 국제법 위반을 들먹이며 반대한다.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적 통일성을 지지한다고 선언을 한다. 크림반도 사람들의 목소리는 아무래도 러시아 쪽으로 기우는 듯한데, 서방이 얘기하는 ‘주권’에는 크림반도 사람들의 권리는 들어있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고 주변국을 툭하면 찍어누르는 블라디미르 푸틴이 옳다는 얘기는 아니다.

 

국가란 무엇이고 주권이란 무엇인지 갸우뚱하던 차에 눈에 들어온 새로운 소식이 있다. 세계의 이목이 크림반도에 쏠린 사이, 남미의 남쪽 끝 파타고니아에는 어느 새 새로운 나라가 생겨나 있었다! 지난 2일 출범한 ‘빙하공화국’이 그것이다. 

 

이 공화국은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 대사관을 두고 있고 희망자들에게 여권도 발급해준다고 한다. 칠레의 저명한 시인이자 학자인 니카노르 파라가 산티아고에 있는 대사관을 통해 빙하공화국의 여권을 발급받았다. 세르반테스상 수상자이고 노벨문학상 후보로 매년 거론되는 파라는 문학의 언어가 아닌 거리의 언어로 시(詩)가 아닌 ‘반시(反詩)’를 씀으로써 라틴아메리카의 우울한 현실에 도전해온 인물이다. 그가 빙하공화국의 여권을 발급받은 첫번째 인물이라고 하니 더더욱 관심이 간다. 좀 많이 춥기는 하겠지만 이 공화국에 산악용 텐트로 만들어진 거주시설도 있기는 있단다.


빙하공화국의 독립투사들. Photo via Greenpeace Chile / Facebook


1933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발표된 ‘몬테비데오 협약’이라는 게 있다. 미주 대륙에서 어떤 나라가 독립국이라고 주장할 때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국제법상 어떤 경우 국가가 성립됐다고 봐야 하는지 등등을 의논해서 발표한 선언문이다.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당시 대통령과 코델 헐 국무장관이 이른바 ‘좋은 이웃 정책’을 발표, 미주 국가들 내부의 일에 무력을 동원해 끼어들지 않겠다고 천명한 것도 몬테비데오 회의에서였다. 아무튼 이 협약에 따르면 거주민과 정부가 있고, 영토가 있고, 이웃나라와 상시적으로 관계를 유지할 능력이 있을 때 국가로 인정받는다. 빙하공화국은 이 협약을 근거로 들며 독립을 선언했다.

 

빙하공화국의 위치가 칠레 영토 안에 있으니 칠레의 주권을 침해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칠레는 법적으로 빙하를 주권이 미치는 대상으로 보지 않는단다. 산티아고타임스는 바로 이런 법의 구멍을 이용해 빙하공화국이 선포된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 새로운 나라의 주민이자 ‘정부 대변인’인 마티아스 아순은 “이렇게 거대한 빙하라는 실체가 헌법에서도, 물과 관련된 어떤 법에서도 모두 무시당하고 있어서 독립국을 창설했다”고 주장한다. 새 공화국의 영토는 2만3000㎢, 남미 전체 빙하의 80%에 이른다. 대여섯명에 불과한 이 나라 주민들은 아무 권리도 없는 빙하를 깨부수고 자원을 캐내가려는 칠레 국영 광업회사 코델코와 캐나다 광업회사 배릭골드 등에 맞서 싸우고 있다.

 

아순은 그린피스 칠레 지부의 대표다. 그를 비롯한 활동가들은 칠레 정부가 빙하보호법을 만들 때까지 자신들의 공화국을 지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위임된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면서도 정작 보호받아야 할 것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 그런 국가의 빈틈을 치고나간 빙하공화국 독립투사들의 시도가 신선하다. 따지고 보면 국가도, 주권도, 국경도 모두 사람이 만든 것이며 신성불가침의 것이란 없다. 핍박받는 모든 사람들, 착취당하는 모든 자연에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는 걸 상기시켜준 빙하공화국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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