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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색깔 혁명'의 파도가 휩쓴 2000년대의 동유럽

딸기21 2016. 12. 26.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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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색깔 혁명'의 파도가 휩쓴 2000년대의 동유럽


2003년 11월 3일, 지금은 '조지아'라고 나라 이름...이 아니고 '발음'을 고친 그루지야에서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Eduard Shevardnadze 대통령의 퇴임과 미하일 사카슈빌리 Mikheil Saakashvili 취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장미혁명 vardebis revolutsia'이라 이름 붙여진 시민들의 물결은 2000년대 중반 동유럽 옛 소련권 나라들을 뒤흔든 '색깔혁명'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1997년 7월 미국 국방부를 방문했을 때의 사진입니다.


셰바르드나제. 저처럼 연식이 상당히 된 사람들에게는 '조지아 대통령'이라보다는 옛 소련의 외무장관으로 더 각인돼 있지요. 1985년부터 1990년까지, 소련의 마지막 순간에 외교정책 수장을 지냈던 인물입니다. 당초에는 셰바르드나제도 소련의 개혁파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그를 발탁한 것이 소련의 유일한 대통령이자 마지막 대통령이 된 미하일 고르바초프였습니다. 셰바르드나제는 고르바초프와 함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티(개방)를 주도했습니다.


결과는... 아시다시피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였습니다.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타지키스탄 등이 줄줄이 떨어져나갑니다. 옛소련 내 공화국들의 분리 독립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는 힘이 듭니다. 이미 1988년부터 여러 곳에서 민족주의 정치조직들의 분리독립 요구가 터져나왔고, 그후 2년 동안 고르바초프는 각 공화국들을 돌면서 위협도 하고 달래기도 하며 연방을 유지하려 애썼지요. 하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자치공화국들은 제각기 선거를 치렀고, 1989~91년 사이에 새 정부들을 세웠습니다.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의 나리칼라 Narikala 요새입니다. 이쁘네요... _ georgia.travel


조지아도 그랬습니다. 수도 트빌리시 Tbilisi에서 처음 반 소련 시위가 일어난 것은 1988년 11월이었습니다. 조지아 민족주의가 득세했고, 소련이 공중분해되기 직전인 1991년 3월 31일 국민투표로 분리독립을 결정지었습니다. 그리고 4월 9일 조지아 최고위원회가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 Zviad Gamsakhurdia가 5월 26일 대선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결정됐습니다. 그러나 조지아에는 러시아계가 많이 사는 별도의 작은 자치구들이 또 있었습니다. 압하지아 Abkhazia , 남오세티아 South Ossetia 같은 지역들입니다. 이 지역들은 지금까지도 분쟁이 벌어지는 곳들이죠.


아무튼 조지아 상황은 복잡했고, 감사후르디아는 1991년 말부터 시작된 준군사조직과 방위군의 유혈 쿠데타 끝에 1992년 1월 6일 축출됐습니다. 이 때부터 근 3년간 내전이 진행됩니다. 그 상황을 정리하고 대통령이 된 것이 셰바르드나제였습니다. 그는 소련 외무장관을 마치고 1992년 고향에 돌아왔으며, 감사후르디아에 반대하는 싸움을 이끌었고 1995년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 때부터 2003년까지 8년 동안 셰바르드나제가 조지아를 움직였습니다. 러시아와 미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했고, 나름 외교적인 성과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 조지아의 부패와 치안 불안은 위험수위로 치달았습니다. 마침내 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게 만든 계기는 2003년 11월 2일의 총선입니다. 부정선거에 항의한 군중들이 국회로 쳐들어갔습니다. 셰바르드나제는 계엄령을 선포하겠다며 맞섰으나 결국 사카슈빌리와 협상 끝에 탄핵했습니다. 셰바르드나제는 2014년 7월 숨을 거뒀습니다.


장미혁명. _ geworld.ge


역전의 노장 셰바르드나제를 몰아낸 동유럽의 혁명은 이어 우크라이나로 옮겨갑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 이야기는 조금 뒤로 미루고요. 2005년의 '튤립 혁명'으로 가보지요. 무대는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입니다. '핑크 혁명'이라고도 불리는데, 독재자 아스카르 아카예프 Askar Akayev의 횡포에 항거하는 시민혁명이었습니다.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아제르바이잔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동유럽과는 지리적으로나 경제적, 정치적으로나 다소 다른 역사의 경로를 걷게 되니, 이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동유럽에서 이어진 혁명의 무대는 벨라루스였습니다. '청바지 혁명 Džynsavaja revalucyja'이라고 해야할까요. 이 나라에서 2006년 3월 19일부터 25일까지 일어난 민중 항쟁을 서방에서는 '청바지 혁명 Jeans Revolution, Denim Revolution'이라 부릅니다. 



당시 벨라루스의 대통령은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Alexander Lukashenko였습니다만... 이렇게 말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겠군요. 2016년 12월 현재, 아직도 그 나라의 대통령은 그 사람이니까요. 즉 루카셴코는 벨라루스의 초대 대통령이자 유일한 대통령이며 현직 대통령입니다. 2015년 대선에서 5선에 성공했습니다. 1994년 7월부터 22년 넘게 집권하고 있습니다. 


루카셴코는 벨라루스 최고위원회를 이끌던 시절 소련에서 독립하는 것에 반대를 했고, 1991년 8월 분리독립 뒤에는 부패에 맞선 투사로 변신했습니다. 스타니슬라프 슈시케비치 Stanislav Shushkevich 벨라루스 소비에트 최고위원장의 과도적인 집권 기간을 거쳐 1994년 독립 뒤 마련된 새 헌법에 따라 치러진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 


루카셴코는 반부패와 민족주의를 내걸고 집권했으나 10년 넘게 권좌에 있으면서 점점 권위주의 통치자가 되어갔습니다. 장미혁명, 오렌지혁명 등에 영향을 받은 시민들이 반발하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루카셴코는 야당 지도자 미하일 마리니치 Mikhail Marinich를 비롯한 시민들을 투옥하고 시위를 진압하면서 강경 대응을 했습니다. 2005년 3월 25일 처음 시작된 거리 시위는 그렇게 진압됐습니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_ Al Jazeera


하지만 어떤 탄압이든 민중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은 반드시 역사에 흔적을 남깁니다. 그 시위 이후 1년이 지난 2006년 3월 19일, 대선이 실시됐습니다. 이 선거에서 루카셴코는 무려 83%의 지지율로 승리했습니다만 시민들은 곳곳에서 부정선거가 저질러졌다며 항의시위에 나섰습니다. 수도 민스크 Minsk의 '10월 광장'에 야당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모여서 부정선거는 무효라며 공정한 재선거와 루카셴코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시위대를 본뜬 깃발을 들고 나왔고, 서방 문화의 상징인 청바지를 입고 시위대가 모여들었다 해서 '청바지 혁명'이라는 말이 생겼지요.


루카셴코는 "우리 나라에서는 핑크도, 오렌지도, 바나나도 없을 것"이라며 주변 나라들의 혁명 흐름을 비난한 적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는 교활하고 똑똑한 통치자였습니다. 3월 25일, 시위대 4만5000명이 경찰과 마주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지 않았습니다. 시민들이 끝내 경찰에게 몰려갔고, 100여명이 체포됐습니다. 당시 시위 지도자였던 알렉산드르 코즐린 Alexander Kozulin은 경찰을 공격한 것이 명백해 체포됐고 징역 5년6개월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어이없게도 이후 시위는 동력을 잃었고 루카셴코는 아직까지 건재합니다. 심지어 루카셴코가 어린 막내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할 것이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의 야경. 이쁘네요... _ Minskflights.org


몰도바에서는 2009년 4월 6일부터 12일까지 잠시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총선 뒤 야당이 부정선거를 주장하면서 공산당에 맞서 시위를 했습니다. 포도밭이 많은 나라라는 점에서 '포도 혁명 Grape Revolution'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일부 있기는 하지만 그런 이름이 정착되지도 않았고, 정권을 바꾸지도 못했습니다.


이제, 우크라이나를 볼 차례입니다. 


면적 60만 제곱킬로미터, 인구 4200만 명. 비옥한 흑토를 가진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곡창지대'였다고 오래 전 학교에서 배웠지요. 러시아와 동유럽의 역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키예프 공국의 탄생지이기도 하고요. 소련에서 분리됐지만 러시아 입장에서는 결코 자기네 역사에서 떼어내고 싶지 않은 것이 우크라이나라고 하더군요.


오랜 역사를 거치며 러시아에 병합된 우크라이나는 1917년 11월 7일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짧은 기간 독립을 했습니다. 하지만 1939년 11월 다시 소련에 합쳐집니다. 1941년 6월 스테판 반데라 Stepan Bandera가 이끄는 우크라이나민족주의자연합 Orhanizatsiya Ukrayins'kykh Natsionalistiv (OUN)이 독립을 선언했으나 무위로 돌아갔지요. 마침내 우크라이나가 독립국가로 재탄생한 것은 소련이 무너진 뒤인 1991년 8월 24일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 당시의 시위 모습. 올해 많이 본 우리 광화문 시위를 떠올리게 하네요. ㅎㅎ _ ukrainetrek.com


그보다 1년 전인 1990년 7월 16일, 새 의회가 '우크라이나 국가 주권'을 선포했습니다. 자기결정권, 민주주의, 독립, 그리고 소비에트 법보다 우크라이나 법이 우위에 있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듬해 8월에 모스크바에서는 군부가 쿠데타를 시도해 고르바초프가 위기를 맞았지요. 하지만 쿠데타는 보리스 옐친 Boris Nikolayevich Yeltsin이 '용감하게 탱크에 맞서' 싸우면서 실패로 돌아갔고, 소련은 끝내 해체됐습니다. 이 와중에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해버렸습니다. 


그 해 12월 1일 국민투표와 함께 첫 대선이 실시됐습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의 90%는 독립을 택했고, 국회의장이던 레오니드 크라프추크 Leonid Kravchuk가 첫 대통령이 됐습니다. 12월 21일, 벨라루스의 브레스트 Brest에서 벨라루스, 러시아,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이 모여 소련이 해체됐음을 공식 인정하고 독립국가연합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CIS)을 결성했습니다. 


독립 이후 10년 동안 우크라이나는 경제위기를 맞았습니다. 우크라이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지요. 러시아도 디폴트(채무불이행)를 겪었으니. 우크라이나의 경우 1991년부터 1999년 사이에 국내총생산(GDP)의 60%가 날아갔다고 합니다. 1996년 도입한 새 화폐 흐리우냐 hryvnia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2000년부터는 연평균 7%대의 성장을 했습니다. 


2015년 타즈님뉴스와 인터뷰하는 빅토르 유셴코. _ Tasnimnews


1996년 새 헌법이 만들어지면서 2대 대통령이 된 사람이 레오니드 쿠치마 Leonid Kuchma입니다. 그러나 그는 늘 부패 문제로 야당의 공격을 받았고, 선거부정 의혹에서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에는 옛 소련의 핵무기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크라이나는 선택을 합니다. 엄청난 정치적, 경제적 비용을 감내한 채 그대로 뒀더라면 우크라이나는 세계 3위의 핵무기 보유국이 됐을 텐데, 모든 전략핵무기를 폐기하기로 한 겁니다. 


우크라이나는 제법 탈냉전 사회에 적응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소련 시절 기계공장에서 일했고 우크라이나 의회 Verkhovna Rada에서 두각을 나타내 정권을 잡았던 쿠치마가 온갖 부패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국민들의 반발이 극심해졌습니다. 2004년 10월 31일 대선 1차 투표가 치러졌고 11월 21일에 결선투표가 실시됐습니다만, 부정이 얼룩진 선거였습니다. 전국에서 불복종과 연좌시위가 벌어졌습니다. 


당시 대선 결선에서 빅토르 유셴코 Viktor Yushchenko가 유력한 야당 주자였고, 쿠치마가 밀어준 후보는 빅토르 야누코비치 Viktor Yanukovych였습니다. 유셴코는 대선 캠페인 기간에 끔찍한 독극물 공격을 받아 얼굴이 흉터 투성이가 되어버렸지요. 대법원은 1차 투표에서 선거부정이 저질러졌음을 인정하고 재투표를 하라고 판결했습니다. 


2006년 12월, 키예프를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회담하는 빅토르 야누코비치 당시 총리. _ Kremlin.ru


국제 선거감시단이 들어가 재투표 과정을 감시했으며, 12월 26일 재투표는 공정하고 자유롭게 치러졌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재투표에서 유셴코는 52%, 야누코비치는 44%를 얻었습니다. 유셴코가 선거의 승자로 공식 발표됐습니다. 취임식은 2005년 1월 23일 열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키예프의 오렌지 혁명 Pomarancheva revolyutsiya은 시민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여기서 이 기나긴 '동유럽 역사 여행'을 끝내고자 합니다만, 우크라이나의 뒷이야기를 적지 않을 수 없겠네요.


역사는 돌고 도는 걸까요. 야누코비치의 이름은 3년 전 다시한번 세계의 뉴스에 등장했습니다. 유셴코는 집권 뒤 오렌지 혁명 동지였던 율리아 티모셴코 Yulia Volodymyrivna Tymoshenko와 경쟁하느라 정국을 안정시키지 못했고, 2010년 대선에서는 결선에 진출하지도 못한 채 1차 투표에서 탈락했습니다. 이 대선에서 우크라이나의 4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한때의 경쟁자였던 야누코비치였습니다.


유로마이단 혁명. _ Euromaidan Press


야누코비치는 애초부터 강경한 친러시아파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권위주의적이었고,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해야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교역은 절반이 러시아, 절반이 유럽연합(EU)과의 사이에서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2013년 11월 21일 우크라이나 정부는 EU와 경제협력 협정을 체결하기로 했던 결정을 바꿔 보류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러시아의 압력에 밀린 것이었습니다. 



젊은 야당 정치인 아르세니 야체뉴크 Arseniy Yatsenyuk는 트위터에 #Euromaidan 이라는 해시태그로 글을 올려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마이단은 '광장'이라는 뜻입니다. 이날 밤 키예프의 네잘레즈노스티(독립) 광장 Maidan Nezalezhnosti에 시민들이 모여들면서 시위가 시작됐습니다. 오렌지 혁명과 비견되는 '마이단 혁명'이 일어난 겁니다.


우크라이나의 서부에는 우크라이나계가 많이 살지만 동부에는 러시아계 인구가 많습니다. 이 구조가 그대로 지역 정서로 연결되면서 야누코비치는 동부의 표에 힘입어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제 키예프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주민들은 우크라이나가 서방과 함께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이단 혁명은 유혈사태로 비화됐습니다. 막판까지 버티던 야누코비치는 2014년 2월 21일 러시아로 탈출했고 우크라이나에는 새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그해 6월 페트로 포로셴코 Petro Poroshenko가 새 대통령이 됐습니다.


우와....크림반도에 있는 얄타의 제비둥지 성 Lastivchyne hnizdo 이랍니다. 멋지네요... _ russia-insider.com


문제는 이 과정에서 3월 18일 러시아가 흑해의 크림반도를 병합해버린 겁니다. 크림반도에는 러시아군의 핵심 병력 중 하나인 흑해함대의 기지가 있는 세바스토폴이 있지요. 동부 도네츠크 Donetsk의 러시아계는 러시아군의 지원 속에 러시아와 합쳐지겠다며 무력 분쟁을 시작했습니다. 마이단 혁명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사태는 '러시아와의 싸움'으로 변질됐습니다. 서방이 크림반도 합병을 이유로 러시아에 경제 제재를 가하면서, '신냉전'이라 불리는 갈등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이 시리즈가 끝을 맺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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