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유럽이라는 곳

오라두르 쉬르 글란, 진정한 ‘사과’ 보여준 독일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

딸기21 2013. 9. 5.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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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두르 쉬르 글란은 프랑스 중서부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곳은 아무도 살지 않는 ‘죽음의 마을’로 남아 있습니다. 


평범한 시골 소읍이던 이 곳에서 참상이 벌어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6월. 당시 유럽 전선의 판세를 바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6월 6일 이뤄졌고, 나흘 뒤인 6월 10일 나치 점령군이 레지스탕스(저항) 운동 세력에게 보복한다며 이 마을에서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로베르 에브라(88)는 당시 19세였습니다. 에브라는 지금도 그 날의 참상을 잊지 못합니다. 


“군인들이 여성들과 아이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문을 잠갔고, 남자들은 따로 끌고가 한 헛간에 밀어넣었다. 독일군은 독가스를 살포하고 불을 질렀으며 기관총으로 주민들을 사살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에브라를 비롯해 단 여섯 명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주민 642명은 모두 나치에 살해됐습니다. 에브라의 어머니와 누이도 희생됐습니다. 


나치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오라두르 쉬르 글란 마을. 프랑스 정부는 나치의 잔혹한 범죄를 기억하기 위해
폐허가 된 이 마을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사진 위키피디아



1950년대 당시 학살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전범재판이 열려 200여명의 학살 가담자 중 60여명이 기소됐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이미 독일이 동서로 갈리어 극심한 냉전에 접어든 때였기 때문에 서독에 체류하던 21명만 법정에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법정에 선 사람들 중 7명의 독일군을 뺀 나머지는 나치 점령하에 있던 알자스 지방 출신들이었습니다. 프랑스 내 ‘알자스 차별 문제’로 불똥이 튀면서 재판은 흐지부지됐고, 학살자 중 일부는 “나치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일”이라며 발뺌을 했습니다. 


독일 통일 직전 동독 장교들이 보관하고 있던 학살 관련 파일들이 공개되면서 독일 내에서 다시 이 사건이 조명됐습니다. 그 덕에 6명이 기소됐으나 학살자들이 이미 고령이어서 제대로 단죄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오랜 조사과정에서 드러났지만, 오라두르 쉬르 글란 사건은 군사적 목적은 전혀 없는 순전한 학살극이었습니다. 당시 나치 무장친위대(SS) 병력이 학살을 저지른 것으로 확인됐지만, 왜 그토록 잔인한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치가 패망하자 훗날 대통령이 된 샤를 드 골 장군은 포고령을 내려, 폐허가 된 이 마을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했습니다. 나치의 잔혹상을 보여주는 증거로 삼고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1999년에는 추모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4일 독일의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이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오라두르 쉬르 글란을 찾았습니다. 1984년 헬무트 콜 당시 독일 총리가 2차 대전 전적지인 베르됭을 방문한 적은 있지만, 독일 국가지도자가 오라두르 쉬르 글란을 찾은 것은 학살 이후 처음이라고 합니다. 두 대통령은 생존자인 에브라와 함께 추모관을 찾아 묵념한 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마을 곳곳을 둘러봤다고 AFP통신 등은 전했습니다. 


오라두르 쉬르 글란 학살 현장을 둘러보는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맨 왼쪽),
학살 생존자 로베르 에브라(가운데),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 AP


가우크 대통령은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화한을 바치고 과거의 범죄를 사과했습니다. 두 정상의 부축을 받으며 학살을 증언한 에브라는 “그 사건 뒤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가득한 채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며 “(독일의 사과가) 더 빨랐어야 했다. 우리는 독일과 화해를 해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3월 취임한 가우크 대통령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마찬가지로 동독 태생입니다. 가우크의 아버지는 옛소련 굴라그(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고 가우크는 동독 공산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했던 투사였습니다. 가우크는 지난해 체코를 방문했을 때에도 프라하 북쪽 리디체에 있는 나치 학살현장을 찾았고, 올초 이탈리아 방문 때에도 역시 나치의 범죄현장이었던 산타나 디 스타체마를 방문해 사과했습니다. 


가우크는 오라두르 쉬르 글란을 방문한 뒤 “나는 73살로, 전쟁 중에 태어났다.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해 이야기하고,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우리가 저지른 짓을 잘 알고 있다’는 걸 얘기해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가우크의 이번 프랑스 방문은 독일과 프랑스 간 우호조약인 엘리제 조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의례적인 행사로 끝날 수 있는 방문이었지만, 올랑드와 함께 학살 현장을 찾아 사과함으로써 ‘과거의 상처를 딛고 진심으로 화해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줬다는 평입니다. 


영국 BBC방송은 이번 방문을 통해서 “지금의 독일은 그들(피해자들)의 기억 속에 악몽처럼 남아 있는 독일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했다”는 가우크의 말을 전하며 그의 사과가 ‘화해의 상징’이 될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 메르켈 총리도 지난달 21일 뮌헨 북쪽 다하우의 나치 강제수용소를 방문해 유대인 피해자들에게 사죄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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