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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차베스 진영 '선거에선 승리, 정치적으론 패배'

딸기21 2013. 4. 15.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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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밤(현지시간) 베네수엘라 대선 결과가 발표되자 야당 후보인 엔리케 카프릴레스는 “선거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를 3000건 이상 갖고 있다”, “여당 후보인 니콜라스 마두로는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에도 정통성이 없었고 이번 대선으로 집권하더라도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고 맹공격했다. 30만표도 안 되는 표차, 2%포인트에 못 미치는 득표율 차이로 패배한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며 불복을 선언한 것이다.


마두로는 사망한 우고 차베스 전대통령이 지난해 직접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한 인물이다. 버스 운전사 출신으로, 차베스 집권 시절 국회의장과 부통령을 지냈으며 암 투병중인 차베스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했다. 지난달 차베스가 사망한 뒤에는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며 선거 정국을 이끌었다. 

카프릴레스는 여러모로 마두로와는 대비된다. 외가가 유대계인 카프릴레스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나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정계에 입문, 베네수엘라의 경제 중심지인 미란다 주지사를 지내며 인기를 얻었다. 지난해 대선에서 한 차례 우고 차베스와 맞붙어 선전했으며 이번이 두번째 대선 출마였다. 


마두로(왼쪽)와 카프릴레스(오른쪽)



현재로선 카프릴레스가 선거 결과를 뒤집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베네수엘라 대선은 전자투표로 이뤄지는데, 만일에 대비해 선거관리위원회는 전자투표용지에 입력된 투표결과를 출력해 보관한다. 카프릴레스는 이 출력본을 전면 수검표로 재개표하자고 요구하지만 선관위는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는 입장이다. 

카프릴레스는 “정부가 공무원들에게 마두로 지지를 강요했다”, “일부 지역에서 투표종료 시간 뒤에도 투표를 허용했다”고 주장했으나 부정선거의 결정적인 증거는 투표 다음날인 15일까지 내놓지 않았다. 마두로를 향해 “당신은 졌다”고 공언해놓고도 자기 지지자들에게 거리로 나와달라 호소하지는 않았다.

 

미국 주요 언론들은 이번 대선을 앞두고도 우고 차베스 시절과 마찬가지로 베네수엘라를 혹평했으나 미국과 유럽의 독립 저널리스트들이 만드는 인터넷 매체 ‘베네수엘라 어낼리시스’는 “대선이 평화롭게 별 사건 없이 진행됐고 투표율도 높았다”고 보도했다. 

또한 베네수엘라 선관위는 안팎에서 독립성과 공정성을 인정받고 있다. 선관위는 차베스 집권 전인 1997년 제정된 주민참여·투표법에 따라 만들어졌는데 시민사회의 추천과 의회 인준으로 임명되는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2011년 미국 비정부기구인 민주주의향상재단은 “베네수엘라의 헌법과 법률은 대단히 혁신적이고 진보적인데다 선거법 또한 공정성과 혁신이 두드러진다”며 “선관위는 자산가들이나 특정 집단의 권력 독점을 예방하고 공정하게 선거를 관리할 법적 권한과 자금 집행력을 가졌다”고 칭찬한 바 있다. 

현 선관위원장인 티비사이 루세나는 미국 유학파에 사회학교수 출신으로, 정치성향은 중립적으로 알려져 있다. 카프릴레스가 마구잡이로 덤비지 못하는 것도 선관위의 권위와 명망 때문이다.

 

그런데 법적으로는 마두로가 승자이지만 정치적으로는 패자다. 마두로를 기점으로 한 차베스 진영의 패배를 부정하기는 힘들다. 차베스 애도 분위기와 집권당 프리미엄을 안고도 마두로는 간신히 이기는 데 그쳤다. 

 

인물 싸움에선 마두로의 완패였다. 카프릴레스는 41세라는 젊은 나이와 역동적인 이미지를 내세웠으며 정책에서도 유연했다. 차베스의 친서민 복지노선을 수용하되, 대외정책에서는 차베스의 중남미 좌파국가 ‘석유 퍼주기’에 반발하는 국민 감정을 비집고 들어갔다. 

차베스는 쿠바를 비롯한 카리브 해 섬나라들에 석유를 직접 지원해주거나 석유를 팔아 번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주변국들을 관리해왔다. 베네수엘라의 자원을 팔아 다른 나라 좌파 정권들을 먹여살리는 이런 노선에 대해서는 국내 반발이 적지 않다. 카프릴레스는 이란·쿠바 등 반미 국가들과 결합해 미국과 불필요한 외교 갈등을 빚은 것을 비판하며 ‘적당한 거리두기’를 주장해왔다.

아직 미혼인 카프릴레스는 오토바이를 타고 슬럼가를 돌아다니며 연예인 못잖은 인기를 얻었다. 카리스마 없이 오로지 ‘차베스의 후계자’라는 것만 내세운 마두로와는 반대였다.

 

마두로는 대통령이 되더라도 국민 절반의 지지를 얻은 카프릴레스에게 휘둘릴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정책’이 아니다. 카프릴레스는 브라질 룰라식 친서민 노선을 주창해왔고, 마두로가 차베스에게서 물려받아 추진할 사회정책들,이른바 ‘미션’들에는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카프릴레스를 밀어준 옛 기득권층, 당파적인 우익 언론들, 차베스의 국유화 때문에 지분을 빼앗겼다 생각하는 자산계급과 외국자본들이 공세를 펼칠 가능성이 높다. 강력하게 사회주의 정책을 밀어붙인 차베스조차도 집권기간 내내 반대파의 반격과 쿠데타 기도 등에 시달렸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마두로가 이런 반격들을 버텨낼 수 있을까. 

 

차베스 진영 내에서도 마두로의 위상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마두로는 차베스에 맹종하며 이견을 묵살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집권 통합사회주의당 내에서 차베스 후계자 자리를 놓고 한때 경쟁했던 디오스다도 카베요 국회의장 등 라이벌들이 존재한다. 

다만 카베요 국회의장은 2008년 미란다 주지사 선거에서 카프릴레스에게 졌던 인물이라, 마두로를 공격할 처지가 못된다는 게 마두로의 위안거리라고 외신들은 전했다.


대미관계는 차베스 시절보다 나아지겠지만 개선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차베스 시절부터 베네수엘라와 가까웠고 에너지부문 투자도 많이 해놓았던 중국과 러시아는 앞장서서 마두로에게 승리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쿠바 공산당 기관지도 “마두로의 승리는 차베스가 남긴 업적의 힘”이라며 축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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