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이웃동네, 일본

집을 짓고 싶으신가요?

딸기21 2013. 1. 20.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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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브랜드 중에 아주아주 좋아하는 무지(MUJI). 일본어 이름은 '無印良品'이지요. 요새는 국내에도 점포가 많이 늘어난 모양이던데. 도쿄 근교 후타코타마가와에 커다란 무지 가게가 있어요. 무려 3층 건물에 1층에는 의류와 문구, 2층에는 가구와 패브릭 등 주거 관련 상품, 3층에는 식기와 식재료, 무지 카페가 있습니다. 


그 가게를 홍보하려는 것은 아니고... (물론 무지를 엄청 좋아하기는 합니다. 페어트레이드 제품 팔고, 유기농 면과 린넨으로 만들어진 좋은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파니까요) 오늘 거기서 재미난 공책을 봤습니다.


가구 코너에 무지 특유의 갱지 표지가 붙은 공책이 놓여있고 '마음대로 가져가세요'라 되어있더군요. 공짜! 무슨 공책인가 해서 열어보니 이런 거였습니다. "집 만들기 응원 노트(家づくり応援ノート)". 집을 짓고 싶은 가족들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땅을 사고 공사를 하고 완공 뒤 생활을 시작하기까지의 과정을 적어넣을 수 있게 만든 공책입니다.


작지만 계단 있고 다락 있는 단독주택에서 사는 것은 일본인들의 로망. 한국에선 아파트로 주거공간이 획일화되어 있지요. 저는 아파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대기업이 의식주의 모든 것을 공급하는 한국형 경제발전의 결과물일 뿐이라는 생각을 합니다만, 어쨌든 '집의 로망'보다는 강남 학군 좋은 곳의 아파트가 모든 일하는 부모들의 꿈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그런데 일본에서는 '집'이라 하면 여전히 아파트(일본식으로는 '만션 mansion')보다는 단독주택입니다. 오랜 침체로 젊은 부부들은 대개 돈들이 없으니 이들에게도 내집 마련, 즉 '내 집 짓기'는 꿈이자 희망이자 상상이자 인생의 목표가 되어가는 듯합니다만... 



맨 아래 오른쪽 커다란 8자가 있는 사진은, 공책에 끼워주는 일종의 광고물입니다. "대호평, 이에즈쿠리(집짓기) 8강." 말하자면 이 공책은, 무지라는 회사에서 하는 '집짓기 강좌'의 내용을 요약해 고객서비스 겸 선전물로 내놓은 물건이네요.

지난해부터 1년 동안 도쿄의 단독주택(무려 3층 짜리!)에서 살고 있는데, 십여년만에 아파트 떠나 주택으로 오니 이것저것 생각하고 궁리하게 되더군요. 자전거로 좀 달리면 시마추라는 가게가 있어요. 일종의 대형마트인데, 한국의 마트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마트 마당에 집 가꾸기에 필요한 물건들을 판다는 것! 여러가지 모양의 울타리, 마당에 까는 돌, 장식용 석재나 목재, 온갖 모종과 씨앗, 원예 도구 등등은 물론이고요. 좁디 좁은 일본 집 '고양이 이마만한 마당'에 적합한 미니 창고, 심지어 주차장까지 팝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내 집을 내 손으로 가꾸고 만들 일이 거의 없지요. 더군다나 전세로 여기저기 전전하다 보면 집은 공들여 가꾸는 내 삶의 공간이 아니게 되죠. 집 장만 뒤에도 그 공간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오직 자산가치... 그런데 도쿄에 와서 보니 삶의 모습이 확연히 다르더군요. 


여기라고 집의 낙원이란 얘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보다 먼저 부동산 버블과 그 붕괴에 시달렸던 나라죠. 그런데 단독주택들이 많고 따라서 골목이 많아 생활이 다르다는 겁니다. 우리보다 '옛날식'이고, 내 손으로 내 집 짓고 꾸미고 가꿀 일이 많고, 내 집이 있는 동네에서 골목골목 돌아다니며 동네 가게에서 물건 사고 옆집뒷집 사람들과 마주치며 지낼 일이 많더라는 얘기입니다. 


옹기종기 모인 집들이 있고 골목이 있다는 게 서울의 아파트 생활과 얼마나 다른지는, 체험해보지 않으면 모를 것 같습니다. 저는 서울토박이치고는 늦게 아파트 생활을 시작한 편인데도 어느 새 '집-골목 생활'을 많이 잊었구나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거의 매일매일이 생활의 발견이었달까요. 더불어, 왜 한국에선 시골마을 논들 사이에조차 고층 아파트를 지어올리는지, 골목이 사라지고 동네가게가 사라지고 대형마트와 대기업 체인점들만 남은 세상이 됐는지, 그것이 우리의 하루하루 일분일초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를 많이 고민하게 되더군요.


다시 공책으로 돌아가서- 집짓기 8강의 제목들을 한번 살펴볼까요?


1. 먼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2. 토지는 어떻게 찾아야 좋을까 

3. 장기우량주택이란 뭘까 

4. 돈은 어느 정도 빌릴 수 있을까 

5. 어떤 집을 지을까 

6. 건물의 구조는 너무 어려워 

7. 남들은 어떤 집에 사나 

8. 어떻게 하면 따뜻한 집을 만들까


몇년 전부터 한국에서도 '땅콩집' 열풍이 불었고 '작지만 귀여운 내 집 짓기'에 관심이 커졌지요. 미디어에 엄청 많이 나왔던 최초의 땅콩집이 저와 가까운 관계인 사람의 집이어서 당연히 그 집에도 가봤고요. 얼마전부터는 제 동생이 '집짓기 강좌'를 들으러 다니더군요. 우리나라에서도 집에 대해 생각해보고 꿈을 꾸는 사람들, 모임들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공책이 없어서 집을 못 짓는 것도 아니고, 공책에 적는다고 집을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제 경우 당분간 이사갈 형편도 아니고 서울의 아파트 생활이 주는 삭막한 편의에 익숙해져 있는지라 뚝딱 집짓는 꿈을 꾸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상상은 자유! 뭐든지 매뉴얼 좋아하고 또 매뉴얼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일본 사람들의 스타일을 그대로 반영한 듯 싶기도 합니다만. 집짓기를 응원해준다는 공책을 두 권 집어오면서 어쩐지 집짓기의 꿈, 아주 작은 한 토막을 살짝 집어오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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