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마크 트웨인, "여성에게 투표를 허하라"

딸기21 2012. 9. 17.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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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 Mark Twain (1835–1910. 본명은 새뮤얼 클레먼스 Samuel Langhorne Clemens). 우리에겐 <톰 소여의 모험 The Adventures of Tom Sawyer>(1876)으로 유명한 미국의 작가. 저는 어릴 적 계몽사 전집에 들어있던 <왕자와 거지 The Prince and the Pauper>(1881)라는 작품이 가장 재미있었습니다만... 뭐 그리 많이 읽어보지도 않았네요. <톰 소여의 모험>은 소년물이어서 그런지 별로 재미 없었던 기억...

오늘은 그 작가, 마크 트웨인의 짧은 연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때는 1901년, 장소는 뉴욕의 한 유대계 여학교. 트웨인은 여성도 아니고 유대인도 아닌데 그 곳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요.

1871년의 트웨인. /위키피디아


19세기 말 이후 가장 뜨겁게 달아올랐던 정치적인 이슈 중의 하나는 여성 참정권(투표권) 문제였습니다. 뉴질랜드가 세계 최초로 1898년 여성들의 투표권을 인정하자 이웃한 호주가 1902년 뒤를 따랐죠. 미국에서 여성들의 투표권 요구가 시작된 것은 ‘모든 인간(men)은 평등하게 만들어졌다’는 표현이 들어가 있던 1차 헌법 초안이 나오고부터였습니다.

마크 트웨인은 <톰 소여의 모험>과 뒤이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 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1884)>, <아서 왕의 궁정에 간 코네티컷 양키 A Connecticut Yankee in King Arthur’'s Court (1889)> 등의 작품을 연달아 발표해서 엄청난 인기를 모았습니다. 그래서 세기가 바뀔 무렵에는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작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작품들이 모두 생전에 고전들로 자리매김했으니, 트웨인은 정말 운 좋은 작가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금전적으로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나 봅니다. 손 댄 사업들이 잇달아 실패한 탓에 트웨인은 작품 활동에 몰두하는 대신 16년 동안 세계 곳곳을 돌며 돈을 벌기 위해 강연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물론 돈 때문만은 아니었을 수도 있지요. 뒤에 가서 설명하겠지만 트웨인은 코미디언이 되었어도 성공했을 법한 유머리스트였고, 동시에 당시로서는 꽤나 급진적인 생각을 가졌던 진보주의자였습니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지 3주가 채 되지 않은 1901년 1월 20일, 트웨인은 뉴욕 히브리 여성 공업학교(Hebrew Technical School for Girls) 연례 모임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잠시 이 학교에 대해 덧붙이자면, 1880년대 러시아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대거 이주해오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유대여성교육센터(Jewish Foundation for Education of Women) 같은 여성 교육을 위한 단체들이 생겨났습니다. 히브리 여성 공업학교는 유대여성교육센터에서 젊은 여성들의 직업훈련을 위해 1885년 세운 학교였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로 가득했던 시기였습니다. 여성 투표권이라는 주제를 놓고 여러 연사들의 강연이 이어진 뒤, 트웨인이 중앙 강단에 올라섰습니다. 익살과 재치로 유명했던 트웨인은 이 예민한 문제에 대해 평범하지만 재치있는 특유의 어법으로 접근했습니다. 이 연설은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충고’와 함께 짧지만 핵심을 찌르는 트웨인의 명연설로 남아 있습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조언일 뿐입니다만, 마음에서 우러나 입을 통해 나오는 그런 조언이랍니다.

인생에서 여성들이 맡고 있는 역할에 대해 얘기하자면, 언제나 여성들이 옳았다고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25년 동안 여성인권을 지지해온 남성입니다. 성성한 백발에 놀라운 지혜를 지니셨던 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한참 전부터도 저는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어머니는 저만큼 많은 걸 알고 계셨죠. 아마 투표에 필요한 지식도 저만큼은 되셨을 겁니다.

이제는 여성들도 법을 만드는 데에 기여하는 때가 오는 걸 보고 싶습니다. 투표용지라는 날카로운 채찍이 여성들의 손에도 들려 있는 걸 보고 싶습니다. 시 정부 입장에서도, 여성들이 투표하는 걸 수치스러운 일로, 수치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제가 앞으로도 25년을 더 산다면, 더 못 살 이유야 없지 않겠습니까마는, 여성들이 투표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만일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있었더라면 이 지역이 이런 상태로 남아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 곳 여성들이 모두 투표를 한다면 다음 선거에서 누가 시장이 될지는 그들 손에 달려있게 됩니다. 여성들은 힘껏 떨쳐 일어나 이곳의 비참한 상태를 바꿔놓을 겁니다.


아쉽게도 트웨인은 생전에 바람이 실현되는 걸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1910년 숨을 거뒀고, 미국에서 여성들에게 투표권이라는 기본권을 부여한 수정헌법이 통과된 것은 1920년의 일이었습니다. 그 사이 세계는 1차 대전이라는 재앙을 겪었지요. 전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 1919)에 따라 국제연맹이 탄생했지만 2차 대전이라는 또 다른 재앙이 인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만일 1917년 미국이 프랑스 전선에 파병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여성 투표권이 보장됐으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상상컨대 트웨인이 얘기했던 대로 여성들이 정부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이 비참한 상태’를 뒤바꿔버리지 않았을까요. ㅎㅎ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 있는 트웨인의 집. 1층이 도서관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위키피디아



트웨인의 어린 시절은 평범한 시골 소년의 생활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설가가 되고 세월을 겪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됐고, 갈수록 급진적인 개혁주의자가 되어갔다고 합니다.

인터내셔널 소셜리스트 리뷰(International Socialist Review)에 2000년 실린 트웨인에 대한 글에서 트웨인의 고백을 한 줄 가져옵니다(위키에서 재인용합니다).

"1871년에 칼라일이 쓴 프랑스혁명사를 읽고 나는 지롱드가 되었다. 그 책을 여러 번 읽었는데 매번 다른 방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내 삶과 주변환경이 그 영향을 받고 변화했다. 그리고 지금 다시 한번 그 책을 읽고 내려놓으면서, 이번엔 내가 상퀼로트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됐다! 아무 색깔 없는 창백한 상퀼로트가 아니라 마라(Marat)가 되었다는 것을." 


(지롱드는 프랑스혁명을 초창기에 이끌었던 부르주아들이죠. 상퀼로트는 그들을 밀어주다가 혁명의 주축으로 부상했던 평민들이고요.)

트웨인은 1900년 뉴욕 헤랄드 신문에 스스로의 정치적 각성과정을 소개하는 글을 싣기도 했습니다. 미국이 아시아에서 스페인을 몰아낸 뒤 필리핀을 차지하려고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였습니다. 미-필리핀 전쟁은 1899년 시작돼 1902년 끝났지요. 이 전쟁의 비극, 미국이 저지른 '인종청소'를 분석하는 글들이 나중에 많이 나왔으며 어떤 이들은 이 전쟁을 '미국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 와중에 실린 트웨인의 글을 잠시 보지요

"(필리핀과의 전쟁을 지켜보던) 나는 열렬한 제국주의자였다. 미국의 독수리가 태평양에서 울부짖기를 바랐다. 필리핀 위에 그 날개를 펼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중략) 


나는 스스로에게 대답했다. 300년 동안 고통받아온 한 민족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우리처럼 자유롭게 만들어줄 수 있다. 우리가 가진 것 같은 정부와 나라를 그들에게 줄 수 있다. 미국 헌법의 축소판이 태평양에서 떠다니게 할 수 있고, 세계의 자유국가들 사이에 (그들의) 새로운 나라가 한 자리 차지하게끔 해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좀더 생각을 해보고, (미-스페인 전쟁 뒤에 체결된) 파리 조약을 주의깊게 읽어보았다. 우리가 필리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려 하는 게 아니라 종속시키려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들을 되살려주는 게 아니라 정복하고자 거기 갔다는 걸 알았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자기들 방식으로 자기들 문제를 풀어가게끔 해주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이자 의무가 되어야 한다. 이제 나는 반 제국주의자다. 나는 (미국이라는) 독수리가 남의 땅 어느 곳에서든 발톱을 펼치는 것에 반대한다."


1940년 발행된 트웨인 기념우표. 필명 대신 본명이 쓰여있네요. /위키피디아


그보다 한참 전인 1860~70년대까지만 해도 실제로 트웨인은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팽창을 지지했다고 합니다. 하와이를 정복하는 걸 찬성하는 글을 쓰기도 했고요. 미국이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스페인과 싸우는 것도 지지했습니다. 심지어 스페인과의 전쟁을 가리켜 그동안 미국이 해왔던 어떤 전쟁보다도 가치있는 싸움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세기가 바뀔 무렵 트웨인의 생각은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유럽을 방문하고 1901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제국주의에 누구보다 반대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후 1910년 숨질 때까지 미국 반제국주의자연맹(American Anti-Imperialist League)의 부회장을 지내면서 미국의 필리핀 점령에 반대하는 팜플렛을 썼습니다.

(하지만 트웨인이 그렇게나 유명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반전 반제 투쟁'에 대해서는 주류 언론들이 그리 부각시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뭐 예상하기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만... 트웨인의 반 제국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글들은 쭉~ 무시당하다가 1992년에야 <마크 트웨인의 풍자라는 무기: 필리핀-미국 전쟁에 대한 반제국주의 저술들 Mark Twain's Weapons of Satire: Anti-Imperialist Writings on the Philippine-American War>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출간됐다고 합니다.)


미국 뿐 아니라 유럽 강국들의 제국주의적인 책동에도 모두 반대했습니다. 트웨인은 남아프리카에 식민지를 만들고 광산 착취에 앞장섰던 영국 제국주의자 세실 로즈('로즈 장학금'이라는 유산으로 유명하지요;;)나 '암흑의 핵심'을 정복한 벨기에의 레오폴트2세 등을 대놓고 비판했습니다. "제국주의의 모든 씨줄들을 증오하고 비난한다"고 선언했고, 오늘날의 콩고민주공화국 땅을 식민지로 삼은 뒤 말도 안 되게 '콩고 자유주(州)'라 이름붙인 레오폴트의 헛소리를 비꼬았습니다.

구미에서 보편적 인권이 싹트기 시작하던 시대에 바로 그 구미 열강에 의해 저질러지던 위선을 비판한 사람이 트웨인이었습니다. 밖에서 미국이 저지르는 제국주의 만행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트웨인은 미국 내에서 보편적 인권을 공고히 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앞서 인용한 여성 투표권 연설은 그런 맥락에 자리하는 것이고요.

트웨인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노예 해방이 "흑인들을 자유롭게 했을 뿐 아니라 백인들 또한 자유롭게 해주었다"고 말합니다. 더불어 여전히 백인이 아닌 이들은 미국 안에서 공정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중국인 이민자들이 부당한 처우를 당하는 것을 고발하기도 했고, 흑인 학생이 예일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등록금을 내주기도 했습니다.

사회주의자였던 헬렌 켈러가 장애를 극복하고 대학 교육을 받고 저술가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 사람도 트웨인이었답니다. 그가 헬렌 켈러에게 쓴 편지도 남아 있어요.


노동운동을 지지하면서 노동자들을 위한 글을 써서 발표했고, 동물 생체해부에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트웨인은 글과 함께 자신의 또 다른 무기인 언변으로 이 모든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앞장서 발언을 했습니다. 작가협회를 비롯한 여러 모임 자리에서 익살 섞인 연설로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1894년 니콜라 테슬라의 실험실을 찾은 마크 트웨인. /위키피디아

여담입니다만... 트웨인에 대한 위키 글을 읽다보니 토머스 에디슨과 시대를 풍미했던 미국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 Nikola Tesla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진이 있네요. 트웨인은 과학기술에도 관심이 많았고 테슬라와 가깝게 지내며 그의 실험실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답니다. 뿐만 아니라 발명특허 3개를 보유한 발명가(?)이기도 했다고...트웨인의 소설<아서 왕의 궁정에 간 코네티컷 양키>는 요즘 유행하는 타임트래블을 다룬 선구적인 작품이라고 하는데, 정말이지 전방위로 안테나가 뻗어 있는 작가였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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