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아서 쾨슬러, '한낮의 어둠'

딸기21 2012. 5. 29.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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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문광훈 옮김. 후마니타스)을 읽었다. 지난해 가을, 마포의 후마니타스 책다방 주차장에서 열린 책 싸게팔기 행사 때 사다놓았던 소설이다. 피아노 위에 아무렇게나 쌓아두고 있다가 일본으로 가져와서는 다시 아무렇게나 쌓아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엊그제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 전에 잠자리에 누워서 책을 보는 짓. 언제부터였을까? 소설이 아닌 책들을 주로 읽게 되면서부터 누워서 책 보는 것을 안 하게 됐다. 누워서 보는 책은 아주 재미있어야 하는데, 내가 보는 책들이 아무리 재미있다 하더라도 대개 밑줄 쳐가며 읽어야 하는 '정보성' 서적들이다보니 버릇이 그렇게 바뀌어버린 것 같다.


엊그제는 꽤 피곤했다. 이틀 동안 하루 너댓시간씩 비포장 도로를 걷는 가벼운 트레킹을 하고 집에 온 터라 빨리 잠들고 싶었지만, 아래층에서 요니가 올라오지 않아 먼저 이 책을 뽑아들고 침대에 누웠다. 별로 잠자는 데에 도움 되는 책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떤 종류의 소설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번역자는 이 책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비견되는 소련 전체주의 비판서라고 소개해놨던데 정말 저 두 책들처럼 유명한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옮긴이는 이 책이 엄청나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 누구에게 어디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설명해주지 않으니 이 것 역시 잘 모르겠다.


굳이 다른 유명한 소설들 이름을 데려오지 않더라도, 책은 묵직했다. 예상대로 어둡고 무거우면서도 희한하게 몹시 재미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흥미진진해서 어젯밤 잠들기 전 다시 손에 잡기까지 낮동안 어서 밤이 오기를 기다리는 심정이 되기까지 했다. 오늘 아침 눈 뜨자마자 마지막 남은 몇 장을 마저 읽었다. 


책은 혁명을 이끌었던 옛 게릴라 지도자이자 전직 인민위원 루바쇼프가 체포되는 데에서 시작한다. 루바쇼프는 '넘버원'에게 밀려나 감옥에 갇힌다. 숙청인 셈이다. 저자 쾨슬러는 1930년대에 이 소설을 썼고, 넘버원은 스탈린으로 추정되지만 책에는 어떤 나라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실존인물이라고는 어릴 적 만화책에서 보았던 냉혈한 생쥐스트와 당통 같은 프랑스 혁명 시대의 이름들 정도. 심지어 사회주의라는 말도, 공산당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혁명'과 혁명에 성공한 '저 너머'라는 나라와 '당', 이런 식으로 적혀 있을 뿐이다.


루바쇼프는 감옥에서의 며칠 동안 과거를 곱씹는다. 자기 때문에(혹은 자기를 통해 구현된 '당의 뜻' 때문에) 더이상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게 된 사람들. 그들을 희생자라고 부른다면 과연 무엇의 희생자일까. 소설 전반을 흐르는 '논쟁' 속에서 누구는 그 희생자들을 역사의 희생양이라 부른다. '역사의 진보' 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수적 피해'일 뿐이라는 뜻이다. 루바쇼프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었지만, 감옥에서 어느 희생양의 '질질 끌려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믿음의 균열을 겪는다. 아니, 이미 혁명 이후 독재체제가 굳어지는 동안 내심으론 알고 있었던 균열이 육화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 뿐이다.


루바쇼프의 기억은 '혁명의 과거' 혹은 '혁명의 뒤안'이다. 책에서 혁명의 '현재'는 루바쇼프에 대한 세 차례 심문이라는 형식으로 드러난다. 루바쇼프의 옛 동지 이바노프와 '새로운 세대'의 상징인 글레트킨 두 사람이 루바쇼프를 심문한다.


이들은 세 부류의 사람들이다. 루바쇼프는 혁명 이후의 사회에 눈 감지 않고 참혹한 현실을 보았다. 그는 눈을 뜬 사람, 성찰하는 사람이다. 이바노프는 눈을 감지는 않았지만 성찰 대신 현실을 택한 냉소주의자다. 글레트킨은 성찰도 의심도 없이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이다. 내 식대로 읽자면 루바쇼프는 과거, 이바노프는 현재, 글레트킨은 미래다. 혁명은 그렇게 과거를 살해하고, 현재를 숙청하고, 맹목적인 미래만 남겼다. 


책의 후반부는 루바쇼프와 이바노프, 루바쇼프와 글레트킨의 대화로 이뤄져 있다. '심문'의 형식을 빌고 있지만 권력의 속성과 혁명의 변질 따위를 둘러싼 정치토론이다. 지금 우리는 알고 있다. 소련의 '미래'가 어떠했는지를. 과거를 살해하고 현재에 눈 감아버린 혁명의 나라는 죽었다. 실상은 스스로의 미래를 살해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남는다. 아니,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혁명은 변질된 것이었나, 아니면 맹목(독재)만을 남겨두고 성찰을 금하는 것은 애당초 권력이 가진 속성이었나? 그것은 권력이 가진 속성이어서 혁명 뒤의 권력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공산주의라는 잘못된 이상이 낳은 잘못된 혁명의 불가피한 경로였을까? 


나의 궁금증은 더 있다. 파시즘에 대한 책을 읽었을 때에도 똑같이 생겼던 의문이다. 우리는 전체주의의 참상을 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아서 쾨슬러가 전해주는 '한낮의 어둠'은 스탈린 시절에 이미 끝나버린 과거의 기억일 뿐인가? 즉 전체주의(한국의 군사독재 시기라도 생각해도 좋다)는 역사의 어느 특정한 한 국면이었을 뿐인가? 아니면 언제라도 우리가 과거의 기억을 잊고 현실에 눈감고 맹목적으로 우르르 달려나갈 때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은 특별한 악인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후자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우리가 눈 똑바로 뜨고 살아야 한다고. 그 말이 맞는 지도 모르겠다. 나치즘이 됐든 스탈린주의가 됐든 제3세계형 독재가 됐든, 모양을 바꿔가며 나타나는 권력의 속성일 뿐인지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역사의 발전'을 믿고 싶다. 쾨슬러는 그놈의 '역사의 발전'이라는 논리가 혁명의 희생자들을 만들어내고 결국은 모두를 희생시켰다고 말하지만, 공산주의의 단선적 진보관이 아니라 이 모든 과정을 포괄하면서 인류는 조금씩 모두를 위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나는 믿고 싶다. 역사가 바로 나같은 사람을 배신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 아무리 1930년대에 쓰인 것이라 하지만, 아서 쾨슬러의 시각은 루바쇼프의 입을 빌어 비판한 전체주의 체제의 문제점에서 그리 크게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한마디로 민주주의나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 책에서 여성은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루바쇼프에게 여성은 '대중'도 '시민'도 아닌, '어둠 속에서 커다란 가슴과 여동생 같은 냄새로 기억되는 존재'일 뿐이다. 


쾨슬러는 앙드레 고르처럼 부인과 함께 자살했는데, 위키피디아를 보니 이미 그 오래전부터 쾨슬러의 사생활과 여러 가지 스캔들, sexual aggressiveness에 대해서는 말이 많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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