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발칸의 전설

딸기21 2009. 4. 23. 23:35
728x90

[대산세계문학총서-49] 발칸의 전설
요르단 욥코프 저
 |  신윤곤 역 | 문학과지성사



원래는 라현이가 벨라루스에 공부하러 갔을 때에 보내주려고 사놓았던 책이다. 동유럽 문학작품은 별로 접해본 일이 없던 차에 ‘불가리아 국민작가’의 소설이라고 해서 내가 꿍쳐두고 야금야금 읽었다.


단편모음인데다, 편당 분량도 적다. 책 두께도 얇다. 하지만 읽는 동안, 읽고 나서, 내내 마음이 묵직하다.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아서다. 이리 쓸리고 저리 얻어맞는 민초들의 이야기는 어쩌면 이렇게 닮았는지.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정국과 빨치산 투쟁에 이르는 시기 우리의 근현대사를 담은 문학작품들이 내내 머리 속에 교차됐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수백 년 간 점령된 발칸의 민중들. 그들을 괴롭힌 것이 어디 제국의 졸개들뿐이랴. 험한 자연과 겨울과 전염병과 산적들, 때로는 사랑도 험난한 시대 힘없는 이들에게는 독이 된다. 작가가 그려내 보이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일그러져 있다. 주제는 ‘사랑’인데, 이야기들은 비극적이다. 사랑, 함정, 비극, 슬픈 전설.
 

백성의 저항은 언제나 멋지고 용감하고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저항은 은근하고, 처연하고, 슬프고, 얼핏 보아서는 드러나지도 않는다. 휩쓸려 다니면서도 자기 것들을 지키고, 때로는 자기들끼리 죽고 죽이고 얻어맞으면서도 자기네 땅의 노래를 잃지 않는, 그런 것이다. 


그것은 ‘저항’이라기보다는 그냥 ‘삶’ 그 자체의 모습처럼 들린다. 슬프면서도 저 깊숙한 곳에 삶의 힘이 느껴지는 짧은 노래들. 욥코프가 들려주는 ‘발칸의 전설’은 그런 느낌으로 다가온다. 책은 그냥 산문이지만, 꼭 노래처럼 들린다. 묘하고 신비스러운, 불가리아식 ‘마술적 사실주의’에 매료됐다. 


“총이 불을 뿜었다. 창문이 드르륵거리고, 집들이 흔들리고, 검은 그림자가 땅을 덮쳤다. 시빌이 멈춰섰다. 염주를 끊었지만, 카네이션은 버리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잠시 기다렸다. 일 초 이 초. 병졸들이 다시 총알을 장전하는 순간, 날카로운 비명이 마을 아래 광장에서 들려왔다. 시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벨리코 케하야의 대문에서 들려오는 또다른 비명. 시빌이 돌아보았다. 라다였다. 그녀는 마치 그를 보호하려는 듯, 양팔을 벌린 채 달려오고 있었고, 그는 마치 그녀를 껴안으려는 듯, 양팔을 벌리고 있었다. 다시 총이 불을 뿜었다. 시빌이 쓰러졌다. 처음에는 얼굴이 땅을 향해 고꾸라지더니, 잠시 후에 하늘을 향하며 바닥에 누웠다. 그 옆으로 라다도 쓰러졌다. 그것으로 사방은 잠잠해졌다. 태양이 포석을 내리쬐고 있었다. 핏자국인 양 카네이션이 두 주검 사이에 떨어져 있었다. 교회 앞 찻집, 창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하얀 수건을 절망적으로 흔들어대고 있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