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딸기의 하루하루

일요일의 상상

딸기21 2000. 11. 12.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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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은 추울까. 
좀전에 잠시 햇빛이 나는가 싶더니, 또다시 하늘이 회색으로 변했다. 비나 눈이 올 것 같은 날씨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행복한 토요일이었던 어제는 아침 9시에 일어나 집 뒤편 가게에 갔다온 것 외에는 하루 종일 집 안에서 뒹굴며 잠을 잤다. 
가게에 갔다오는 길에 보니 보도블럭에 떨어진 물 자국이 미끄러웠다. 설마 저게 얼음이랴 싶었는데, 차들 지나가지 못하게 막아놓은 시뻘건 드럼통 위에 고인 것이 분명히 얼음이었다. 가게 아저씨는 '얼음이 얼었네요' 하는 내 말에 무슨 봉창두드리는 소리냐는 듯이 '오늘 영하잖아요' 라고 했는데, 얼음이 언 것을 보니 그제서야 겨울이 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오늘은 아예 찬 공기 속으로는 콧배기도 내밀어보지 않은채 집안에 틀어박혀 온돌공주 노릇을 하고 있다. 이러다 오늘 첫눈이라도 오게 되면 방바닥 치면서 안타까와하게 생겼다. 나는 아직도 강아지처럼 눈 오는 것을 좋아하는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세수라도 하고 있어볼까. 

뒹굴뒹굴하면서 하루종일 내가 한 것은 컴퓨터를 켜고 오락한 것과, '앰버 연대기' 2권을 읽은 것 뿐이다. 아 참, 어제 해놓은 밥과 반찬을 데워 아침 겸 점심을 먹은 것도 있구나.
인터넷은 '바다'에 비유되곤 하는데, 어째 나에게는 바다는 커녕 샘물이나 될까말까다. 사람은 언제 어느 장소에 가든 자기만의 길을 만들고, 그 폐쇄성을 누리며 즐거워한다. 인터넷은 특히나 넓어 백 사람이면 백 사람 모두 자기만의 길을 만들 수 있으니 그 배타성이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다른 매체보다 앞서는 것 같다. 바다같은 인터넷이라지만 난 늘 내가 다니는 길만 다니니까 나한테는 바다가 아니라 우물인 셈이다.

안방의 침대와 마루의 소파를 왔다갔다하며 뒹굴던 나는 뒤척이는 데에도 지쳐서 모래밭에 나갔다. 모래밭에 누워있는 나만한 불가사리. 분홍색과 주홍색의 중간쯤 되는 색깔을 한 그것은 다섯 개의 갈래가 나 있는데 어느 것이 팔이고 어느 것이 다리인지 모르겠다. 머리 위에 달린 것은 뿔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 몸을 뒤척이는 대신 불가사리를 뒤집고, 비린내가 나는 가운뎃부분에 억지로 주먹을 집어넣어 괴롭혔다. 성가심을 못 참은 그것이 튀어나온 한 개의 팔로 내 손목을 잡으려 할 때 그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워, 꼭 그림 속의 별처럼 일어나버린 불가사리와 함께 놀았다. 찰랑거리는 바닷물 속에 발을 담그고, 주황색 옷을 입고 주황색 샌들을 신은 나랑 주홍빛 불가사리가 같이 뛰어다녔다. 

불가사리와 함께 놀 때에는 나도 바닷속에서 자유롭게 숨을 쉴 수가 있고, 물 위를 뛰어다닐 수도 있다. 나는 불가사리와 마음이 잘 맞아서 누워 있는 조개의 껍질을 억지로 열고 모래를 잔뜩 집어넣고, 파란 색 문어를 만나 여덟개의 다리를 손에 쥐고 세 갈래로 땋아버렸고, 뒤에서 눈을 가리며 '누구게?' 하는 놀이를 하고 놀았다. 불가사리는 나에게 이쁜 비늘 하나를 주었고, 나는 그 답례로 그것에게 손가락을 만들어주었다. 이제 불가사리는 내가 없이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더 재미있게 놀 수 있을 것이다.
해가 꼴딱 저물었을 때에야 모래밭 위로 올라왔는데 하늘은 파란색, 빨간색, 녹색, 보라색, 회색, 분홍색으로 계속 바뀐다. 나는 '앰버 연대기'의 주인공처럼 자동차를 타고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를 여행한다.

오늘도 밖은 추울 것이고, 난 아마 오늘이 다 갈 때까지 집 안에 틀어박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밤이 되면 지나가버린 주말을 아까와할 것이다.  녹차 물을 얹어놓고 마루에 다시 와보니 나보다 더 크고 뚱뚱한 불가사리가 떡볶이와 오뎅의 관계처럼 줄무늬 이불과 뒤죽박죽되어서 책을 읽고 있다. 잠시 뒤면 나도 침대 위의 불가사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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