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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스티글리츠, '세계화와 그 불만'

딸기21 2007. 4. 5.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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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와 그 불만 Globalization and Its Discontents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은이) | 송철복 (옮긴이) | 세종연구원 | 2002-10-15



26세에 예일대 교수가 된 것을 시작으로 프린스턴, 옥스퍼드, 스탠퍼드 등등 미국과 영국의 ‘명문대’ 교수 자리를 돌았던 조지프 스티글리츠. 클린턴 때에는 미국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정말 쟁쟁한 경력이지만, 스티글리츠는 어찌 보면 경제학자로서보다는 ‘IMF(국제통화기금) 비판가’로 더 평판이 높다. 세계은행 부총재 겸 수석 경제학자로서 스티글리츠가 주로 했던 일은 1990년대 말 아시아 금융위기 같은 금융시스템 문제에 대응했던 IMF의 조치를 비판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IMF 모르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세계은행과 함께 이른바 ‘브레튼우즈 체제’를 움직이며 온 세상 힘없는 나라들한테(가끔은 중간 규모로 힘있는 나라들 한테도) 감놔라 배놔라 팔다리 잘라라 창자를 빼놔라 하던 이 무소불위의 권력기관, 참 무서운 조직이다.

세계은행이나 IMF나 그게 그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두 기구는 생겨난 목적이 다르다. 세계은행은 세계 각국 ‘개발’을 돕기 위한 은행이고 IMF는 여러 나라들 재정 안정을 도우려고 급할 때 돈 빌려주는 기금이다. 극도로 단순화시키자면 그래도 세계은행은 남 잘살게 돕는 좋은일 좀 하는 기구이고(조지 W 부시가 미국 말아먹고 나서는 세계은행도 완전히 상놈이 됐지만), IMF는 돈꿔주고 유세 떠는 빚쟁이다.

빚쟁이 중에서도 아주 제일 고약한 빚쟁이가 IMF다. 빚 받아내려는 건 좋은데, 남의 나라 기업들 죽여라 없애라, 사람들 밥줄 잘라라, 시장 열고 미국 물건이니 영화니 받아들여라, 주문이 많아도 이만저만 많은게 아니다.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IMF 겪어봤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다 안다(꼴통 언론들과 시장 찬양론자들 중엔 아직까지 모르는 자들도 있는 것 같다만). 그래서 IMF의 구제금융이라는 것 한번 받아본 나라 사람들에게 이 기구 이름 알파벳 석자는 몬스터급 위력을 가지며, 공포의 상징이 되곤 한다.

세계은행에서 옆집 IMF 하는 짓을 꼼꼼히 들여다본 스티글리츠는 참견쟁이 빚쟁이가 아주 성질 더럽고 남 망하게 하는데 선수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됐다. 이 책은 IMF가 남의 나라 재정 살리겠다고 해대는 짓이 어찌나 어이가 없는지, 어떻게 남의 나라 경제를 오히려 망치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리는지에 대한 관찰 기록이다. 에티오피아, 태국, 인도네시아, 러시아, 라틴아메리카에서 IMF는 그 나라들 재정 튼튼히 해준다며 아주 초토화를 시켜놨다. 정말 필요한 조치는 안 하고, 무리한 요구에 엄한 짓만 해서 개도국 숱한 인민을 도탄에 빠뜨렸다.

왜 그런가. 어느 나라 경제가 불안정해서 대책을 만들고 돈을 풀어 시행을 해야겠다 하는 필요가 있을 때 IMF와 해당국 정부는 진단을 잘 해서 원인을 찾아내고, 고칠 것들 순서를 잘 정하고, 그 나라 사람들 되도록 안 다치고 정치 불안도 안 생기게 차근차근 해야 한다. 그러려면 사람들 정서라든가 성장 동력이라든가 그 동네 사정도 알아야 하고 가장 잘 맞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도 해봐야 한다. 제일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돕는게 상책이고, 자기네들끼리 동력을 잘 찾아가게끔 가장 잘 돕는 방법을 찾아내 그걸 해줘야 한다.

IMF는 그렇지 않았다. 남의 나라 돕는다고 하는데 목적이 좀 불순하다. 내놓고 하는 말과 달리 이 기구 속셈은 미국 부자들, 금융회사들 돕는 쪽에 더 목적이 있는 것 같다. 금융회사들 높은 자리 있는 사람들이 IMF에서 한자리 꿰어 차는 식으로 자리 나눠먹기를 하니, IMF가 월스트리트 큰손들 손아귀에서 놀아나지 않을 수 없다.

머리만 왜곡된 것이 아니라 손발도 왜곡돼 있다. 관료주의다.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나라 일에 주문만 잔뜩 하니까 그 나라 사정과 안 맞고, 일이 제대로 안 된다. 서류 하나 놓고 이리저리 돌리면서 돈 빌어쓰는 나라들에는 “무조건 빨리 하라”고 한다. 뭘? 기업 팔고 사람 자르는 짓 말이다. 기본적으로 IMF의 발상은 ‘시장에 맡기는 게 최고’라는 것에 기대고 있다. 거기다가 오만방자하기까지 하다. 아시아 금융위기 때 일본이 돈 내겠다고 했고 아시아개발은행(ADB)도 나서려고 했는데 IMF가 막았다. 돈 빌려주는 그 막대한 권력을 남들하곤 나누지 않겠다고 하고, 그것을 워싱턴이 밀어주니까 지역에 맞는 해결책 따위는 발 붙일 자리가 없다. 스티글리츠는 자기가 지켜본 것들을 토대로 IMF의 이런저런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IMF 구제금융 받은 나라들이 그렇다고 몽땅 망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한국 경제가 지금 샌드위치니 뭐니 해서 어렵다고 하지만 한국은 구제금융에서 금방 빠져나온 경이적인 복원력을 보여준 나라다. 말레이시아도 마찬가지다. 두 나라가, 아시아 금융위기 겪은 다른 나라들보다 원래 경제가 더 튼튼했다는 것도 있지만, 유독 회복이 빨랐던 것에 대해서도 스티글리츠 나름의 진단이 있다. “IMF가 시키는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장하준이 ‘한국식(박정희식) 국가주도형 경제개발’을 많이 칭찬하는데, 스티글리츠는 ‘한국식(김대중식) 국가주도형 위기극복’을 많이 칭찬한다. 말레이시아도 마찬가지로 마하티르 모하마드라는 고집쟁이가 있었기 때문에 IMF가 시키는대로 안 하고 자기 할 말 다 해가며 경제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고 스티글리츠는 말한다.

박정희인지 김대중인지 우선 제쳐놓고, 장하준 얘기와 스티글리츠 얘기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첫째는 월스트리트와 워싱턴에 휘둘리는 국제기구나 세계화론자들 시키는 대로 하지 말아야 경제가 더 잘 된다는 것, 둘째는 뭐든지 시장에 맡겨놓지 말고 정부가 필요한 만큼 개입과 주도를 해가면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들 몽땅 팔아치우지 않고 공적자금 투입해 살릴 건 살리고 우리나라 기업들끼리 빅딜하게 하고 했던 것이 잘한 거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담이지만 그때 우리나라 언론들은 무엇을 했던가를 돌아보면 우스꽝스럽다. 스티글리츠가 비판한 짓들, IMF가 시키는 짓들 왜 빨리 안 하냐고 무식하게 정부를 ‘조져댄’ 것은 우리나라 언론들이었다. 거기에 대면 우리나라 관료들은 다행히도 기자들보다는 훨씬 똑똑했다)

제프리 삭스의 책을 이미 읽은 뒤라, 비슷한 테마를 가진 책을 또 읽다보니 아무래도 맛이 좀 떨어졌다. 제프리 삭스가 세계 빈곤 문제를 열정을 가지고 들여다보고 도움을 호소한다면, 스티글리츠는 그런 빈곤 문제를 악화시킨 IMF을 훨씬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책 자체는 트집 잡을 구석들이 좀 있다. 번역이 안 좋고 반복이 심하다. 하지만 논지가 명확하고, 한국 사례를 비롯해 동아시아 경제위기 당시 IMF 구제금융 뒷이야기들은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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