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가르시아 마르께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딸기21 2007. 2. 2.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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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 1, 2 El Amor en los Tiempos del Colera (1985)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은이) | 송병선 (옮긴이) | 민음사 | 2004-02-05



다른 것도 다 비슷하겠지만, 책에도 궁합이란 것이 있다. 굳이 궁합을 따지자면 난 라틴아메리카쪽 소설하고는 그야말로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 


지금 다니는 회사의 입사시험을 볼 때 논술 문제 1번이 ‘최근에 읽은 책 서평하기’였다. 나는 뭐든 안 가리고 좀 용감무쌍한 면이 있어서(바꿔 말하면 눈치가 없어서) 감히 보르헤스의 ‘불한당들의 세계사’에 대한 얼토당토 않은 감상을 주절거렸다. 과정은 생략하고, 어쨌든 결과적으로 나는 그 서평을 이쁘게 보아준 어느 분의 권력남용 채점 덕에 입사하게 되었으니 보르헤스에게 감사해야 하려나, 아니면 이런 일;;을 하게 만든 보르헤스를 원망해야 하려나. 

 

어쨌든 보르헤스는 10여년 전 도식적이고 교조적인 생각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20대 초반의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20세기의 모든 사조(思潮)는 보르헤스에게서 나왔다고 하던가. 보르헤스에 열광했던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 ‘바벨의 도서관’이나 ‘아스테리온 집’, ‘알렙’ 같은 신화적 알레고리들에 빠져들고 마음이 허공을 떠돌고 그랬었다. 비록 정도가 좀 약해지긴 했지만 ‘보르헤스적 어휘’들을 대할 때마다 약먹은 듯 어지러워지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보르헤스 말고도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들도 재밌었고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라든가 ‘거미 여인의 키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같은 중남미쪽 책들은 다 재미있었다. 하지만 보르헤스식 판타지를 제외하면, 역시나 압권은 가르시아 마르께스인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식의 이야기놀이가 싫다고 하는데 나는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것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아주 책을 꼭꼭 씹어먹거나 손에 돌돌 말아가지고 다녔으면 싶을 정도다. ‘100년 동안의 고독’은 정말 너무 좋아서 읽는 내내 환상 속을 떠다니는 듯했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사놓은 지 이태가 되도록 손을 못 댔지만, 한번 책장을 넘기게 되면 분명 숨죽이며 읽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대로였다. 굳이 말하자면 ‘100년 동안의 고독’ 같은 종류에 비해선 ‘마술적’ 보다는 ‘사실주의’에 더 방점이 찍혀있는 책이지만 사랑의 온갖 잔인하고 지저분하고 리얼한 단면들을 어쩜 이렇게 칼로 긁듯 묘사할 수가 있는 것인지.


나한테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소설은 언제나 마술이다. ‘콜레라 시대’라니, 이것은 정말 뒤통수를 치는 시대의 표현 아닌가. (콜롬비아로 여겨지는) 어느 항구도시의 냄새나는 거리, 콜레라로 상징되는 한 시대의 스케치는 생생하다 못해 처절하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멋진 소설이었다.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인’ 소설이라 하는데 그 평가에 대해선 뭐라 말하진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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