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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 한권으로 읽는 미국의 역사.

딸기21 2006. 3. 6.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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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 Don't Know Much About History (2003) 

케네스 C. 데이비스 (지은이) | 이순호 (옮긴이) | 책과함께 | 2004-10-15




나는 잠을 자기 위해 리틀록의 한 모텔에 처음으로 차를 세웠다. 굳이 마음속에 그려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 이미지는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연방군이 지켜보는 앞에서 고함을 치고 침을 뱉는 성난 백인들 사이를 지나 학교로 향하는 어린 흑인 학생들의 모습. 미국의 테러.

이튿날 아침, 나는 다시 기나긴 여정길에 올랐다. 미시시피 강을 건너고 멤피스를 가로질렀다. 또 다시 살아나는 마틴 루터 킹의 암살. 미국의 테러.
테네시를 지나치는 내 앞에 미국 도로 역사의 더 많은 부분을 알려주는 표지판, 네이선 베드포드 포레스트 주립공원이 나타났다. 연방군 흑인 병사들에 대한 학살이 자행될 때 남부연합군을 지휘했던 포레스트는 후일 KKK단의 창설에도 일조를 했다. 미국의 테러.
몇 마일을 더 가자 샤일로 격전지라는 또다른 표지판이 나타났다. 이곳은 1862년 4월 이틀간 벌어진 전투에서 남부연합군 1만3천명과 연방군 1만1천명이 목숨을 잃은, 피로 얼룩진 곳이었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발 밑에 시체가 밟히는 유혈낭자한 전투였다. 당시 연방군과 남부연합군 전사자는 독립전쟁, 1812년의 미영 전쟁, 멕시코 전쟁의 전사자를 다 합친 숫자보다도 많았다. 그 학살의 목격자 중 한명은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된 뒤 사랑하는 이들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던 수많은 뉴요커들처럼 군인 남편을 찾아 나선 젊은 여인이었다. 전선의 간호사로 일할 것을 강요받은 이 여인은 의료 텐트에 산더미처럼 쌓여가던 절단된 팔다리들의 끔찍한 모습을 후일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미국의 테러.
내슈빌과 역사책에 나오는 올드 히코리, 즉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고향인 인근의 허미티지. 하지만 인디언들은 그를 예리한 칼이라 불렀고, 그는 수천 명의 인디언들을 그들 조상이 살던 고향에서 내쫓아 처절한 눈물의 행렬로 내몬 인디언 제거 정책의 장본인이었다. 미국의 테러.
녹스빌이 가까워오자 오크리지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과학자들의 숙소로 만들어진 마을치고는 무척이나 목가적인 이름이었다. 그것을 보자 검게 그을린 히로시마와 세계무역센터의 어지럽게 뒤엉킨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미국의 테러.
평지에서 컴버랜드의 언덕으로 힘겹게 올라가 다시 버지니아로 들어서니, 셰난도어 계곡과 남북전쟁의 흔적을 보여주는 더 많은 유적지가 나타났다. 윈체스터로 나아가는 출구가 이곳에 있었다. 길고도 치열했던 남북전쟁 기간 동안 미국인끼리 싸우며 70번 이상이나 주인을 갈아치운 곳이 바로 이 도시였다. 그러고 나서 이제 형제들의 싸움으로 생겨난 웨스트버지니아로 들어서니 하퍼스 페리라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이곳은 광적인 노예제 폐지론자 존 브라운이 자살 공격을 감행하여 화약통에 불을 질렀던 곳이다. 그런 그를 누구는 테러리스트라 불렀고, 누구는 순교자라 불렀다. 메이슨-딕슨 라인을 넘어서 메릴랜드의 해거스타운과 샤프스버그로 들어서면, 하루 동안에 치른 것으로는 미국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앤티탐 격전지를 볼 수 있다. 미국의 테러.
이제 지형은 펜실베이니아로 바뀌었다. 이곳, 한때 굶주린 로버트 리의 남부연합군 병사들을 잡아끌었던 그 풍요로운 들판이 9월의 태양 아래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옥수수밭은 샛노란 호박색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풍요로운 수확을 약속해주는 황금 물결로 일렁거렸다. 게티스버그를 지나려니 1865년 7월의 사흘 동안 일어난 유혈 참극이 머리에 떠올랐다. 미국의 테러.
한때 겁에 질린 미국인들이 로버트 리 장군의 접근을 피해 도망친 해리스버그를 지나 동쪽으로 방향을 트니 뉴욕이 점점 가까워졌다. 우애의 도시로 불리는 미국의 본향 필라델피아 시의 표지판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한때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미국의 애국자였을까? 하지만 의회파들에게 그들은 반역적인 테러리스트였다. 도로 위에서 40시간 이상을 보낸 뒤 마침내 조지 워싱턴 다리에 이르자 대통령이 교회에 있었다. 보아하니 그곳에서는 속죄보다는 복수와 테러 종식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오가는 듯했다. 그 순간 미국은 어둠을 조금밖에 밝히지 못하는 손전등을 들고 아주 길고도 어두운 터널의 입구에 서있는 듯했다.


좀 길게 인용했는데, 책은 유럽인들의 북미 진출에서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미국 역사를 촘촘하게, 그러면서도 재미있게 서술하고 있다. 미국의 역사가 이렇게 길었나, 싶을 정도로 씨줄 날줄을 촘촘히 엮었다.

케네스 데이비스는 미국에서는 ‘Don't know much about~'이라는 시리즈를 내놓아 명성을 얻은 인기 저술가라고 한다. 이 사람이 쓴 ‘우주의 역사’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은 적 있다. 그때는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어쩜 이렇게 쉽고 재미있게, 딱 ‘일반인들’ 용으로 꾸몄나 싶어 감탄했었다. 우주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을 요점정리하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잃지 않았던 저자인데, 미국사에 대해서는 또 어찌 이리 해박할 수 있는 것인지. 진정한 ‘제너럴리스트’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말한 대로 저자는 제너럴리스트일 뿐, 역사학자가 아니다. 이 책은 미국사에 대한 학술서적이 아니며 말 그대로 ‘교양서적’이다. 저자는 미국인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역사에 대해 호기심은커녕 지루함만 느끼고 외면해버리는 ‘반역사적인’ 미국인들에게 역사의 참맛과 역사를 알아야 할 필요성을 깨우쳐주기 위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사료, 주로 여러 종류의 책에서 모은 것들을 요약·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을 놓고 역사논쟁을 벌이기는 힘들 것 같다. 여러 가지를 꿰었는데, 그 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어서 나처럼 미국사에 대해 ㅁ 자도 모르는 사람이 읽기에 딱 알맞다.

교양서적이라고 하지만 내용이 가볍지는 않다. 다소 시니컬하면서 경쾌한 문체인데 읽는 재미 못잖게 던져주는 것들이 많다. 위에 옮겨적은 것은 저자의 후기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저자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희망을 잃지 않으며, 미국이라는 신생국가의 성장 동력을 때론 경외로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저질러온 숱한 범죄들에 대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 눈 감지 않기 위해서야말로 역사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 후기를 쓴 시점은 아마도 2001년 9·11 동시다발 테러 직후였던 것 같다. ‘잔혹한 역사’에 눈감지 않는 저자는, 끔찍한 테러를 겪은 뒤에 오히려 미국의 ‘테러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탁월한 능력이고 엄청난 객관성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괜찮은’ 지식인들이 넉다운되어 ‘반테러 전선’으로 달려갔던 것에 비하면 더더욱 눈에 띈다.

책이 꽤 두꺼운데, 참 재미있게 읽었다. 질문-대답 형식으로 읽은 책이지만 그렇다고 의문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일례로-- 조지 워싱턴은 벚나무와 무슨 사이였나? 워싱턴은 체리파이를 좋아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워싱턴이 어릴적 벚나무를 도끼로 잘라놓고 아버지에게 이실직고했다는 일화;;가 기억난다. 그걸 가지고 ‘정직한 워싱턴’이라고 했었는데,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정직한’ 소리 안 들을 사람이 어디있을까마는... (나야말로 정직의 화신이다, 난 항상 들켰고 들키면 일단 이실직고했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워싱턴의 포토맥 강가에는 벚나무들이 늘어서 있다는데(이건 일본에서 줬다나) 좋은 책 읽고 벚나무에 몰두하면 실없는 사람 되겠지. 암튼 공부해야 할 것들은 많고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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