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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축구의 정치학

딸기21 2005. 3. 17.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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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How Soccer Explains the World: An Unlikely Theory of Globalization 
프랭클린 포어 (지은이) | 안명희 (옮긴이) | 말글빛냄 | 2005-03-11
 

 

“그놈들이 아이의 가슴팍에 불을 붙였죠. 그 괴물 같은 놈들이 아이를 죽였어요.”
“그들의 손에는 쇠몽둥이와 나무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마치 잔디 깎는 기계가 지나간 것처럼 부상자들이 널려 있었다.”

 

책은 옛 유고연방의 수도였던 베오그라드에서 시작된다. 수비에 능한 슬로베니아계, 공격성이 강한 크로아티아계, 날카롭지만 전술적인 예리함이 모자라는 보스니아계와 세르비아계. 지금은 세르비아-몬테네그로 공화국의 수도로 되어있는 베오그라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전쟁은 문자 그대로의 전쟁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문명사회의 치욕’이라 불렀다던 훌리건들의 이야기는, 90년대 베오그라드에선 ‘훌리건의 탈을 쓴 민족분쟁’의 리얼한 전투담으로 돌변한다. 베오그라드를 연고로 둔 두 팀, 레드스타와 파르티잔의 경쟁은 세르비아 민족주의 세력과 크로아티아계의 충돌을 대변하는 대리전 양상으로 진행되다가 결국 진짜 유혈분쟁으로 격화됐다.

 

축구와 정치, 축구와 폭력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사례는 너무나 많다. 실상 유럽과 중남미 명문 축구클럽들의 역사는 축구라는 이름의 전쟁, 축구를 통해 표현된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시사잡지 뉴리퍼블릭의 정치담당 기자인 저자는 세계를 다니며 ‘훌리거니즘’으로 표현되는 축구팬들의 폭력적 행동의 배경을 관찰, 이 책에 담았다.

 

축구팬이라면 대부분 알 법한 유명 클럽들의 뒷얘기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글래스고 레인저스와 종교갈등, 아약스의 친유대주의, 훌리건 난동을 뿌리 뽑으려던 대처의 축구장 시설개선 정책이 역으로 축구클럽들에 대자본을 끌어들이는 계기가 됐던 일, 첼시 훌리건과 신나치즘, 폭력을 예찬하는 훌리건문학에 ‘훌리건활동 컨설턴트’까지.

 

이미 유럽에선 인류학의 연구대상으로까지 떠오른 축구폭력의 실태는 ‘붉은 악마’처럼 얌전한 팬들만 알고 있는 국내 독자들에겐 자못 소름끼칠 정도다. 저자는 “축구의 정치학을 지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세계화”라고 말한다. 축구의 어두운 단면은 세계화의 그늘이고, 대륙을 넘나들며 관중을 열광케 만드는 축구선수들은 우리시대의 유목민들이라고.

 

세계화는 국경 없는 거대 자본의 제국을 만들어냈지만, 실제 경기장에서 작용하는 ‘훌리건 정치’는 세계화의 뒤안길을 보여줄 뿐이다.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 극단적 민족주의가 사라지지 않듯 세계화된 축구 또한 종파주의와 갈등을 완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상업화’는 지역주의와 결합된 훌리건들에게 폭력 충동을 발산할 기회를 만들어 줄 뿐이라는 것이다.

 

세계화된 축구의 이면을 파헤치는 책인 만큼, 같은 주제를 다룬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축구, 그 빛과 그림자’(예림기획)와 비교하면서 읽지 않을 수 없다. 갈레아노는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진보적 지식인이자 소설가인 반면 포어는 온건파 성향의 저널리스트다. ‘비꼬기의 대가’인 갈레아노의 책에는 역설과 해학, 그리고 축구에 대한 애정이 철철 넘쳐나는데 반해 포어의 책은 훨씬 분석적이고 저널리스틱하다.

 

감동으로 따지자면 역시 갈레아노 쪽이 한 수 위겠지만 포어의 책도 유럽 클럽축구 팬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축구에 관심이 많지 않은 독자에게라면 아마도 이 책은 국제정치에 대한 책으로 읽힐 것이다.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책 읽는 동안 내내 생선가시처럼 목에 걸리는 번역의 문제다. 이탈리아 도시 토리노와 피렌체는 영어식으로 ‘투린’과 ‘플로렌스’로 돼 있고, 베오그라드의 축구팀 오빌리치는 ‘오빌리크’로 표기됐다. 유대교 명절인 욤키푸르는 ‘욤키퍼’, 아프리카 국가인 코트디부아르는 ‘코프티부아르’로 해놨다. 축구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영국의 명문클럽 아스날은 ‘아세날’, 이탈리아팀 라치오는 ‘라지오’로 돼 있다.

 

스페인 유명 클럽 FC바르셀로나의 애칭은 ‘바르카’가 아니라 ‘바르샤’이고, 이 클럽의 감독을 했던 ‘루이스 반 갈’은 ‘루이스 판 할’로 읽어야 한다. 영국 클럽 토튼햄 핫스퍼도 ‘토튼엄 호츠퍼’로 돼있다. 명색이 축구에 대한 책이라면 이 정도의 이름들은 제대로 표기됐어야 옳다. 이탈리아의 반부패 개혁운동을 가리키는 ‘마니풀리테’는 고유명사처럼 굳어진 말인데, 원저자가 영어로 ‘클린 핸즈’라 쓴 것을 그대로 한글로 적어놨다. 이탈리아 명문 유벤투스의 구단주 겸 피아트사(社) 소유주를 앞부분엔 ‘아넬리 ’ 뒷부분엔 ‘아그넬’이라고 썼는데 정확한 표기는 '아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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