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나의 유토피아- '멋진 신세계'

딸기21 2004. 12. 18.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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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은이) | 이덕형 (옮긴이) | 문예출판사 | 1998-10-20


어쩌면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라는 멋진 반어법으로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해낸 이 사람은, 사실은 누구보다도 유토피아에 대해 많이 상상해본 사람이 아니었을까.


이건 그냥 나의 상상이다. 어쩌면 올더스라는 사람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소유욕과 폭력적 배타적인 가족제도에 상처를 많이 받았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 자신 유달리 독점욕이 강한 사람이었고, 그의 연인 혹은 아내는 끊임없이 그에게서 ‘해방’되는 것을 마음속으로 꿈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올더스는 자기 내부의 욕망에 스스로 질식해 죽을 것 같았고, ‘짐승같은 본능’이 판치는 세상을 벗어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옥죄어왔던 현실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극심한 불평등과 계급화, 계급간의 격렬한 투쟁, 행복을 모르는 사람들, 끊임없이 ‘위로 올라가려’ 하면서 싸우는 사람들, 그 속에서 올더스는 지옥을 보았던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그는, 자신과 인류의 목을 죄어오는 것 같았던 현실 대신 유토피아를 꿈꾸게 되었는지 모르지. 갈등이 없는 사회,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 사회, 모두가 행복을 만끽하는 사회, 생로병사의 악순환을 극복한 사회, 노쇠 혹은 죽음에 대한 공포 따위는 없는 사회.


지긋지긋한 인간사의 올가미를 벗어나기 위해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에 몰두했던 올더스는, 스스로 머리 속에 ‘창조’해낸 유토피아마저 인간성이 말살된 세상임을 어느 순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을지도 모른다. ‘소설’이라는 시뮬레이션을 통해 그는 유토피아를 창조하려 했는데, 유토피아의 미래는 이미 그의 희망사항을 넘어서버렸다. 어느 순간 그가 발견한 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가 떠나고 싶어했던 현실과 똑같이 숨막힐듯한 디스토피아였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어느 쪽에도 발붙이지 못한 정신적 ‘야만인’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뿐이다.

‘멋진 신세계’라는 소설에 대해 소개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워낙 유명한 책이어서,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이 책이 ‘무엇에 관한’ 소설인지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까. 소설 그 자체로도 이 책은 훌륭하다. 재미있고, 짜임새 있다. 쓰여진 시기를 감안할 때 여러 가지 탁견을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유전공학적 디스토피아에 대한 소설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 이 책에서 그것 이상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내게는 특별한 소득이었다.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소설에 묘사된 ‘포드 기원 600몇년’의 세상에 대한 묘사가 ‘모성(母性)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었다. 헉슬리는 소설의 상당 부분을 ‘사랑에 대한 감정’을 설명하는데에 할애하고 있다. 어찌 보면 ‘유전공학적 디스토피아’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 정도로 보인다 싶을 정도로, 헉슬리는 사랑이라는 문제에 집착한다. 인간이 그것을 정의하는 방식, 받아들이는 방식, 그리고 거부하는 방식. 


‘모성 신화가 사라진 사회’를 디스토피아의 1조로 삼은 것은, 막 꿈틀거리고 있던 페미니즘에 대한 헉슬리 나름의 반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미래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이 책은 분명 ‘헉슬리의 시대’를 담고 있다.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묘사되는 지역은 지금까지도 현실로 존재하는 ‘인디언 보호구역’을 그대로 닮았고, 식민지적 인종관계를 계급관계로 치환시킨 것 또한 그렇다. 남녀차별적 역할구분이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도 헉슬리 시대의 유산일지 모르겠다.


특기할 만한 것은 ‘멋진 신세계’에 대비되는 ‘구세계’, 즉 ‘야만인들의 세계’를 보는 헉슬리의 시각이었다. 유토피아를 가장한 포디즘 세계에 대한 헉슬리적인 경멸감 못잖게, ‘야만인’들을 보는 눈에도 증오가 묻어난다. 물론 여기서의 ‘야만인’들은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주창했던 인종적 ‘야만인’ 개념과는 다른 것이고, 아마도 헉슬리를 둘러싸고 있던 현실 모두를 지칭하는 것일 터이다. 그가 묘사한 이 ‘야만인’들의 세계는 소유욕과 폭력으로 점철된 사회다. 적어도 헉슬리는 과학기술의 우위에 대한 반발로 ‘고상한 야만인’을 동경하는 짓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멋진 신세계’에 들어온 야만인 ‘존’의 운명은 그래서 비극으로 귀결된다.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돌아가는 것도, 신세계에 적응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은, 그리고 스스로 허용하지 않은 야만인 존에게 결론은 자살뿐이었다. 작품해설에서 재미난 얘기를 읽었다. 헉슬리는 이 책을 쓰고 10여년이 지난 뒤에, "지금 다시 쓴다면 존이 다른 곳에 ‘제 3의 세계’를 만드는 것으로 결론을 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책은 물론 ‘멋진 신세계’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하지만 어떨까? 나는 어떤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을까? 나는 과연 저 멋진 신세계를 거부하려 하고 있는가?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머리 속을 잠식했던 것은 이런 의문이었다. 반(反)이상향에 대한 공포 섞인 상상이 과학기술 시대를 만나 ‘기계인간’ 따위의 모티브를 발견하고, 더욱이 전체주의와의 결합이라는 계기를 통해 ‘장르’로서의 매력을 확실하게 갖추게 된 것은 인류 역사에서 극히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 못잖게 오래전부터 디스토피아를 상상해왔는지도 모른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디스토피아 소설류의 첫 번째 작품은 ‘메트로폴리스’였다. 영화 ‘메트로폴리스’를 만든 프리츠 랑 감독의 부인이기도 한 Thea von Harbor의 이 소설은 내게 어찌나 끔찍한 기억을 남겼는지! 국민학교 5학년 때였으니, 그런 류의 책을 읽기엔 아무래도 너무 어렸다. 뒤에 중학교에 들어가 영어를 배울 때 metopolis 란 단어를 보고 우울해졌을 정도였으니. 조지 오웰의 ‘1984년’은 그저 무서웠다, 이런 느낌으로만 남아 있다. 메트로폴리스가 ‘계급’이라는 낯선 문제를 어린 나에게 던져줬다면, 1984년은 ‘독재’ 혹은 ‘전체주의’라는 것에 대한 공포를 심어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어떤가. 나는 어릴적부터 내 나름대로 ‘유토피아’를 꿈꿔왔다(어린아이들 모두가 그런 상상을 해보았겠지만). 나만의 유토피아는, 공상과학만화에서 보는 것처럼 ‘알약 하나만 먹으면 며칠씩 굶어도 되는’ 그런 곳이었다. 먹고 자는 것이라면 물론 나도 좋아하지만-- 먹고 자는 따위의 ‘동물적인’ 일에 시간을 보내기엔 어린 시절의 내게는 재미있는 일들이 너무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나는 어릴 적부터 ‘동물적 본능을 벗어난’ 사회를 맘속으로 꿈꿔왔었다. 


좀더 자라난 뒤, 그리고 어른이 된 지금 유토피아의 목록은 좀더 복잡해졌다. 굳이 말하자면 헉슬리가 묘사한 ‘멋진 신세계’에 좀더 가까워졌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소유하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억압하는 것은 이제 그만했으면,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부작용이 없다면 환각제의 힘을 빌어서 행복을 얻은들 어떠하리... 유전공학 등 과학기술과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폭력도 무시무시하지만 사랑 혹은 가족의 이름을 걸친 일상의 폭력도 그 못잖게 무시무시하다. 그리하여 나는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진 나만의 유토피아를 꿈꾼다. 하지만 내 머릿속 시뮬레이션은 언제나 단순한 희망사항의 나열에 그칠 뿐, 그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한다. 헉슬리가 소설에 표현하지 못한 ‘제3의 세계’는 어떤 곳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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