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조너선 스펜스, '반역의 책'

딸기21 2004. 11. 2.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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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책 Treason by the Book (2001) 

조너선 D. 스펜스 (지은이) | 이준갑 (옮긴이) | 이산 | 2004-07-16 



스펜스의 책이 언제나 그랬듯, 이 책도 역시! 느무느무 재미있었다! 중국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지만 나는 중국의 황제들, 정확히 말하면 강희제와 건륭제에게 관심이 많다. 주제에 무슨 황제들이냐고? 경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최상급 드라마 '황제의 딸'에서 비롯된 관심이라고 설명하면 되려나. 


실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이 드라마는 건륭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건륭제 자신이 꽤 중요한 주연급 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건륭제 역할을 맡았던 배우를 좋아하기도 하고, 드라마에 묘사된 황제의 이미지에 뿅간 측면도 있다. 변방의 북소리...랄까, 조선(특히 임진왜란 이후)에서 유교 근본주의(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_-)가 판친 것과 달리 중국에서 유교의 역할은 조선에서만큼 절대적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저런 류의 중국 드라마들이다. 


건륭제가 누구인가. 중국 청대의 전성기를 장식한 최고의 황제, 청나라를 저~멀리까지 확대한 팽창정책의 실행자 아니던가. 울나라에서 세종대왕의 여자관계와 가족관계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드라마가 나온다면 아마도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명예훼손 소송을 걸고 난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반면 중국(대만이나 홍콩이 아니라 본토) 방송사, 그것도 CCTV가 제작한 '황제의 딸'에 나오는 건륭제는 참으로 인간적이며 호탕하며, 심지어 페미닌 하기까지 하다! 


책 이야기는 잠시 미루고 드라마 이야기를 좀더 하자면-- 홍콩에서 제작된 하류급 드라마 '회옥공주'라는 것도 있었다. 드라마의 질은 형편없었지만 주인공으로 나왔던 홍콩 배우 손요위는 깔쌈하니 멋졌다. 손요위가 극중에서 맡은 인물은? 바로 강희제다. 강희제는 또 누구인가.  순치제의 뒤를 이어 청 왕조를 이어받아 한인들을 제압하고 만주족 군주정의 틀을 마련한 사람 아닌가. 이 인물, 드라마 '회옥공주'에서는 역시 우스워진다. 역할이 코믹해서가 아니라, 황제를 다루는 중국권 드라마들의 방식이 우리나라 사극들과 사뭇 다르기 때문에 생경하면서 재미나게 보이는 것이리라. 


중국권 드라마들은 황제를 우리가 생각해온 '전통적인 방식'으로 다루지만은 않는다. 황제도 인간이므로 우스운 짓도 하고 실수도 하고 군신들과 말싸움을 하기도 한다. 그저 그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중국드라마들은 충분히 재미있었다. 심지어 내 경우는, 드라마들을 통해 역사를 보는, 왕조를 보는 새로운 눈을 얻게 된 것만 같았다. 


강희제를 타이틀롤로 삼은 스펜스의 또다른 저서를 잠시 언급하자면, 이 책은 강희제 스스로 남긴 공식/비공식 기록들을 100% 인용해서 강희제라는 인물과 그 시대를 서술하고 있다. 엄청난 학문적 능력과 문학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책에서 스펜스는 전제군주 강희제의 통치방식과 함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보였다. 


이제 '반역의 책'의 주인공인 옹정제에게로 돌아가자. 옹정제는 강희제와 건륭제 사이에 끼인 황제, 즉 청나라의 세번째 황제였다. 강건한 강희제, 화려한 건륭제의 이미지에 눌려있던 옹정제를 스펜스는 어떻게 다루었을까. 옹정제의 치세에 있었던 일을 굳이 책의 주제로 삼은 까닭은 무엇일까. 옹정제는 어떤 식으로 중국을 통치했으며, 또한 그의 시대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과연 그의 시대에 있었던 일은 다른 곳이 아닌 중국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을까. 


이 질문들에 대답하기 앞서 책의 주인공을 소개하자면-- '반역의 책'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옹정제와 '반역자 쩡징'이라는 인물이다. 또한 그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반역의 책', 즉 '대의각미록'이라는 책이다. 책은 쩡징이라는 인물이 만주족 황제에 맞서 반역을 도모할 것을 제안하는 서신을 '충성심 깊은' 한족 출신의 한 관리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쩡징이라는 인간은 기실 반역이란 것을 할 능력도 없는 인물이었고 그저 시골 몽상가에 불과했다. 쩡징은 체포됐고, 쩡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대로 숱한 사람들이 '반역자'의 대열에 올라 고초를 겪는다. 여기까지는 '예정된 스토리'다. 


우리의 주인공 옹정제는 수차례 벌어진 '한족의 역모'의 복사판으로 보이는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여기에 '역사의 묘미'가 있다. 스펜스의 말을 빌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도 일어나곤 하는 것'이 바로 역사다. 무릇 황제라면 반역자를 능지처참하고 3족을 멸해야 할 것이거늘... 


옹정제는 이 반역자를 '논리적으로 설득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옹정제와 반역자 사이에는 문서를 통한 대화가 시작된다. 한족만이 인간이고 나머지는 금수라는 한족 특유의 중화사상이 어째서 모순인지, 명 말의 혼란을 청조가 어떻게 바로잡았는지, 백성들이 욕한다는 경제제도들이 실제로는 왜 필요하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옹정제 개인에 대한 유언비어들은 어째서 사실이 아닌지를 온갖 자료 총동원해 쩡징에게 보여줌으로써 황제는 논쟁에 승리한다. 


황제는 첫번째 충격적인 결심에 이어, 아예 이 모든 과정을 책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까지 보여주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해서 편찬된 책이 '대의각미록'이다. 황제와 반역자는 이 책의 공동 집필자가 되는 셈이다. 스펜스는 이런 '있을법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진 상세한 과정을 들여다보면서, 옹정제라는 인간의 캐릭터와 청조의 통치구조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 단면은 참으로 낯설고 신기하고 재미있다. 책의 말미에 아주 잠깐 등장하는 건륭제도 주연급 조연에 해당된다. 다름아니라 건륭제는 옹정제가 벌인 저 모든 일들을 '일거에 뒤집는' 반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집요하고 기묘한 발상이 불러온 일들을 수습하는 건륭제의 방식은 그야말로 '전통적'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재미있는 것 아니냐고 스펜스는 말한다.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또 그것을 뒤집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은 중국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일수도 있고(스펜스는 이쪽에 방점을 찍었다), 아니면 역사에서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다. 우리는 역사를 하나의 경향(반역자=능지처참)으로만 해석하는데에 익숙해있지만, 어쩌면 역사는 지금 우리의 눈에 '신기한 일'로 비치는 그런 사건들로 점철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소설보다 드라마틱하고, 드라마보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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