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딸기21 2004. 10. 25.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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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공동체 

베네딕트 앤더슨 (지은이) | 윤형숙 (옮긴이) | 나남출판 | 2003-10-05


어젯밤 잠들기전 앤더슨의 책을 곱씹어보면서, 감히 ‘민족’이라는 큰 주제를 머리속에 떠올렸다. 뇌가 빙글빙글 돌았다. 대체 이것은 무엇이관대 한쪽에서는 허구적인 감정일 뿐이라 하고 한쪽에선 거기에 목숨을 거는가.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버릇을 들인지 꽤 오래됐다. 다만 제목과 저자 이름에 한줄짜리 소감을 붙이는 것일지라도, 독후감을 정리하기로 한 것이 91년이니 독후감이라면 물릴만큼 써봤다(난 쉽게 잘 물리지 않는 편이다 -_-). 그런데도 아직까지 책을 읽고 나서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정리해야할지 난감할 때가 있다. 앤더슨의 이 책이 바로 책이었다. 앤더슨의 주장들, 그리고 ‘한민족’이라는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여러가지 감정들이 머리속에 맴돌면서 두부같은 두부(頭部)는 몹시 복잡해졌다. 어설픈 번역 탓도 있겠고, 앤더슨의 서술 방식 자체가 내 입맛에 안 맞았던 탓도 있겠다.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도저히 이 책을 ‘거부할 수 없어서’였다. 이책 저책, ‘민족’이라는 말이 나오는 부분에 앤더슨의 책은 ‘반드시’라 해도 될 정도로 많이 인용된다. 그냥 넘어가자, 했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사고 말았다. 솔직히 이 책이 무슨 재미가 있으랴 싶기도 했다. 실제로 앤더슨의 문장은 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앤더슨의 생각에는 분명 뭔가가 있었다. 


앤더슨은 ‘민족’을 ‘특정한 시기에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구성되고 의미가 부여된 역사적 공동체’라 정의하고, ‘상상의 공동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떤 특정한 시기? 바로 자본주의 시대다. 나와 우리의 삶을 붙들어매주고 있던 종교와 군주제가 힘을 잃어가기 시작하는 시기. 사람들에게는 귀속본능같은 것이 있어서, ‘뿌리’를 찾고 싶어 한다(이런 귀속본능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앤더슨은 이를 전제하는 듯하다). 


인쇄자본주의의 도래와 때를 같이해 마침 신문이란 것이 등장해 사람들에게 공시성을 선사해줬다. 신문을 통해 얼굴과 이름은 몰라도(전근대적 지역공동체와의 차이점) 나와 같은 시간대를 살고 있는 누군가의 존재를 알게되고, 믿게 되었다는 데에서 앤더슨의 민족 탄생의 열쇠를 찾는다. 


민족 개념의 탄생과 인쇄자본주의의 역할을 연결지은 시각은 흥미롭다. 물론 이 밖에도 앤더슨은 (유럽에서) 라틴어의 퇴조와 지방어의 득세 등등 민족 개념의 탄생을 도왔던 다양한 요인들을 거론한다. 


민족이 인류역사에서 비교적 최근 시기에 고안된 개념이라는 것은 앤더슨만의 고유한 시각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민족의 유구성을 믿는다. 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다른 나라였는데도 우리는 한민족 5000년 역사를 이야기한다. 왜? 민족은 ‘뿌리’와 연결돼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앤더슨의 말을 빌면, 민족이라는 ‘근대적’ 개념은 우리에게 ‘고대성’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집단의 ‘영속성’에 대한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민족이라는 개념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앤더슨의 시각에서 눈에 띄는 것은 민족 개념이 시작된 곳이 아메리카 대륙, 즉 신세계였다는 주장이다. ‘민족’을 기반으로 한(것처럼 보이는) 근대 유럽의 제국주의는 궁지에 몰린 군주들이 식민지의 민족 개념을 받아들여, 즉 ‘모방’해 만든 것이라고 지적한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아메리카에서 탄생한 민족개념-> 유럽으로 건너가고-> 마지막으로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에서 완성됐다는 것. 


정말일까? 그건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나는 민족 개념을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므로. 다만 저런 주장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동남아시아 사회를 가깝게 접할 수 있었던 앤더슨 특유의 통찰력 덕분이었음을 인정해두자. 


아무튼 앤더슨은 저렇게 이야기한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고. ‘상상’이라는 말이 여러가지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겠지만, 앤더슨은 민족이 상상의 산물이라 해서 곧 허구적인 개념인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오히려 그 반대다. 비교적 최근에 어떤 ‘계기’를 만나 개념으로 정립됐음을 지적하는 것일 뿐, 민족이라 부를만한 공동체의 공통된 역사적 언어적 경험(반드시 그 민족의 고유한 언어일 필요는 없지만)을 충분히 인정한다.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민족을 어떻게 볼 것인가. 민족을 허구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어떠한 종류가 됐건 ‘민족 문제’에 답하기 위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하나의 민족에 속하게 되고, 민족의 이름을 걸고 싸우게 된다. 이 이름이 주는 효과는 너무나 크다. 때로 이것은 탄압의 원인이 되고, 때로는 저항의 수단이 된다. 자신들의 존재조건을 아직 채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민족’은 공통된 의식을 불러일으켜주는 기능을 한다. 다만 그것을 앤더슨처럼 자본주의와 때를 같이해 나타난 특별한 ‘문화적 조형물’로 보는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분단조국’에서 살고 있는 별볼일없는 보통사람인 내가, 머리 속에 주사를 놓은 ‘민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해야 하는 까닭은. 이유는 분명하다. 민족이 됐건 무엇이 됐건, 어떤 사람의 태생적 정체성 때문에 차별을 한다거나 핍박을 하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억압하기 위한 논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의 순교 행렬이 계속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필히 경계를 만들어내고, 누군가를 배제하게 되고, 많은 것을 가리우게 된다. 민족이라는 이름을 걸고 저질러지는 일들은 흔히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겪어야하는 고통과 모순을 감추고 있다.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것들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이 개념의 절대적인 무게를 거부할 필요가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불면증에 시달리게 생긴 뇌를 잠시 휴식시켰지만 마음은 여전히 개운치가 않다. 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이 ‘민족’이라는 말에 양면적 혹은 다면적 감정을 느껴야만 하는 것인지. 


(사족- 번역하신 분은 참 재밌는 분인 것 같다. “역자는 1983년에 나온 이 책 1판을 1991년에 완역, 출판하였다. 앤더슨의 개정증보판이 나온 1991년에 역자가 그의 초판본을 번역, 출판하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뭐가 아이러니컬인가. 코미디다. 당연히 개정증보판을 번역했어야지... 하지만 역자해설을 깔끔하게 정리해놓은 것으로 용서해드리지요. 그래도 책 표지의 붉은악마 사진-- 이건 정말 코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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