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무려 '군주론'을 읽다

딸기21 2004. 10. 19.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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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은이) | 강정인 (옮긴이) | 까치글방



10년 가까이 해왔던 일을 접고 조금 긴 방학을 맞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일을 하는 동안에 이런저런 핑계로 접하지 못했던 이른바 '고전'을 좀 읽고 싶었다. 


생각같아선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를 잡아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 기나긴 내용들을 소화하기 힘들것 같고 해서 택한 것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대하소설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누가 뭐래도 고전이다 싶어 손에 들었다. 결과는? 생각보다 짧았고, 생각보다 빨리 읽었고,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이 책의 정치사상사적 의의를 설명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이고,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 또한 내 역할은 아닌 것같으니 그저 '문외한의 독후감' 정도로만 해두자. 정치사상을 다룬 책들 치고 마키아벨리의 저작을 한차례씩 운운하지 않는 책 없지만, 나는 이 저명한 책을 그냥 액면 그대로, '한 사람의 편지' 로 읽었다. 


'군주론'은 백수상태로 나이먹어가던 마키아벨리가 메디치가의 잘나가는(혹은 잘 나갈 것으로 예상되던) '군주'에게 보낸 편지 형태의 저작이다. "위대한 누구누구님, 당신이 더 위대해지기 위해선 저의 충고를 꼭 읽어보셨으면" 어쩌구 하는 서문을 비롯해서 뒤의 에필로그까지, 마키아벨리가 당시 얼마나 찌글찌글한 상태에 놓여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어떻게 해서든 군주국의 고문 자리라도 얻어보려고 애쓰던 마키아벨리였으니, 편지에 그의 진심과 좀 다른 부분들이 보인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이 유명한 '군주론'이라는 제목이 마키아벨리의 이미지에 강권한 내지는 냉혹한 무엇인가를 덧씌울 수도 있겠지만, 기실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였다. 우리가 입사지원서에 회사쪽 구미에 맞는 말들을 집어넣듯이, 마키아벨리는 '훌륭한 군주가 되려면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조언과 함께 메디치 가문에 대한 칭찬도 빼놓지 않았다. 잔인했다는 평가를 받는 로렌초 메디치를 다종다양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운 때문이었다'고 슬금슬쩍 넘어간다든가 하는 부분이 바로 그렇다. 


노년에 갈수록 공화주의자의 면모를 많이 보였다고 하는데, 이 책에서 마키아벨리의 그런 의식은 매우 혼돈스런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군주의 덕과 권위의 필요성을 예찬하면서 동시에 '인민에 기반을 둘 것'을 강조한다든가 하는 것은, 막 떠오르고 있던 공화정의 이데올로기와 마키아벨리 개인의 취직(?)의 필요성이 어설프게 섞여버린 결과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키아벨리 전문가들의 의견은 모르겠고, 아무튼 내 눈에 그랬다는 것이다. 책에서 마키아벨리의 이런저런 모습과 생각을 보는 것은 재미있었다.


동시에, 지금도 적용될 수 있는 관찰, 혹은 냉정한 시선이랄까. 

새로운 형태의 정부 수립을 주도하는 행위가 매우 어렵고 위험하며, 성공하기 힘들다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구질서로부터 이익을 얻던 모든 사람들이 혁신적 인물에게 반대하는 한편, 새로운 질서로부터 이익을 얻게 될 사람들은 기껏해야 미온적인 지지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중략) 인간의 회의적인 속성상 자신들의 눈으로 확고한 결과를 직접 보기 전에는 새로운 제도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변화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혁신자를 공격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온 힘을 다하여 공격하는데 반해서, 그 지지자들은 반신반의하며 행동하는데에 그친다. (제6장 '자신의 무력과 능력에 의해서 획득한 새로운 군주국)

이를 마키아벨리 시대에 국한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개혁의 지지자들은 '가시적인' 성과를 원하면서 변덕스럽게 구는 반면에, 기득권층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사활을 건다. 개혁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경고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마키아벨리는 15-16세기 이탈리아라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인간군상에 대한 묘사와 통찰에도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는 제정 로마와 중근세 이탈리아 공국들의 예를 들면서, 인간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욕심많고 또한 나약한지를 강조한다. 마키아벨리와 한비자를 비교연구한 책이 있다면 한번 읽어보고픈 생각도 드는데, 마키아벨리의 성악설에서 인간의 본성과 이상형 사이의 '반어법'이 느껴진다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아무튼 변화하는 시대와 함께 가는 마키아벨리의 통찰력은 이 책이 왜 고전이 되었는지를 알게 해주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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