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100년 뒤의 나를 흔든 '천안문'

딸기21 2004. 10. 6.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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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조너선 스펜스 (지은이) | 정영무 (옮긴이) | 이산 | 1999-02-27


이제야 이 책을 다 읽었다고 하면, 한 친구가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벌써 몇년 전이던가. 나보다 열 살 어린 그 친구와 “‘천안문’을 다 읽고나서 이야기해보자”는 얘기를 했었다. 친구는 약속대로 책을 읽었고, 나는 그저 책장에 꽂힌 ‘천안문’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조너선 스펜스의 책 중에서 나는 ‘현대 중국을 찾아서’ 1권과 2권을 가장 먼저 읽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빠져든 스펜서의 세계. ‘강희제’와 ‘칸의 제국’, 그리고 아주아주 오랜시간에 걸쳐 읽고야 만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왕여인의 죽음’. 한권 한권 내게는 주옥같고, 추억같은 책들이다. 스펜서의 책 몇권을 ‘찜’해서 알라딘 보관함에 넣어놓고 있고, 그의 모든 저서들을 다 읽어봐야지 하는 꿈까지 꾸고 있다. 스펜서의 책들을 줄줄이 나열하는 이유는? 첫째는 그의 책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강조하기 위해서이고, 두번째는, 그의 책들을 읽을때 내가 빠졌던 함정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스펜스의 책들을 읽으면서 스펜스의 스타일에 흠뻑 빠진 나머지, 정말 우습게도 ‘중국’을 잊고 있었다. 역사를 서술하는 스펜스 특유의 독창적인 방식과 박식함, 유려한 문장에 끌려, 그저 읽어내려왔달까. 그런 면에서 그의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천안문’은 좀 다르게 다가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중국을 생각했다. 유구유구유구한 역사, 그만큼 화려복잡노도같았던 중국의 역사, 그 중에서도 근대와 현대로 이어지는 질풍같은 시기의 중국을. 대학시절 다이호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 연작을 읽은 이래 처음인 것 같다. 소용돌이같은 시기의 인간의 군상을 이렇게 생생하게 접해본 것은.


‘천안문’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이름일 뿐, 책의 배경은 ‘중국 곳곳’이다. 청말-열강의 반(半)점령-내전-공화국-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중국 현대사의 궤적을 따라 자금성에서 난창으로, 창사로, 충칭과 옌안으로 흘러간다. 


스펜스가 이 시기 중국 지식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해내기 위해 선택한 세 사람은 사상가이자 개혁운동가였던 캉유웨이, 작가 루쉰, 또다른 작가 딩링이다. 이들은 생(生)의 한 시기에 겹쳐지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지만, 사상적 시기적으로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캉유웨이가 주로 청 말기, 왕조의 멸망을 회한어린 눈으로 바라본 개혁사상가였다면 루쉰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공산주의의 발흥을 지켜본 지식인이었다. 봉건제의 모순에 맞섰던 여성 작가 딩링은 공산당 치하에서 영욕을 잇따라 맛봐야 했던 인물이다. 


저자는 이 세 명을 ‘축’으로 삼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지만 책에는 이들과 교차되는 수많은 인물들이 나온다. 중국의 현대 지식인 지도(地圖)라 해도 될 정도로. 생각이 다르고, 이름붙여진 주의(主義)가 다르고, 인생역정이 다르지만 모두들 시대에 부딪치거나, 혹은 치이거나 했던 사람들이다. 스치고 엮이는 인물들 사이로 당대의 중국 풍경이 밀도있게 그려진다. 픽션처럼 생생하되 사서(史書) 답게 정교한 스펜스 특유의 방식은 역시나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혁명’이라는 이름의 봉기와 처형 장면이 당대 지식인의 글을 통해 ‘담담하게’ 전해질 때 나는 인간이 가진 폭력성에 전율했고, 혁명가 취추바이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때 그만 눈물을 뚝뚝 떨구고 말았으며, 늙은 딩링과 작가 라오서가 홍위병들에게 모멸을 당할 때에는 우습게도 혼자 분개하고 있었다. 


역사는 사람을 작게도 만들고, 크게도 만든다. 역사는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진실이면서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같기도 하다. 역사 속에 제 갈 길을 걸어간, 혹은 제 갈 길을 원하는대로 걸어가지 못한 인간들의 모습은 후대 사람의 마음까지 뒤흔들어 놓는다. ‘천안문’을 통해 나는 또다시 흔들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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