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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북아프리카의 현실과 재스민 혁명의 의미 -1강

딸기21 2011. 4. 6.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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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후기]중동 북아프리카의 현실과 재스민 혁명의 의미
중동 북아프리카 민주화 혁명의 오늘과 내일


참여연대는 4월 한 달 동안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의 민주화 혁명에 대해서 강좌를 엽니다. 최근 중동의 반정부 시위는 튀니지에서 청년의 분신으로 시작해 이집트, 리비아,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으로 퍼져가고 있습니다. 이 강의는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지역과도 같았던 중동 아프리카 지역의 변화양상과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강의는 중동 현장의 경험이 많은 구정은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가 맡았습니다. 4월5일, 첫 강의에서는 중동 북아프리카의 현실과 재스민 혁명의 의미에 대해 짚어봤습니다.


리비아 사태에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바람으로: 사회자 주은경 

이 강의를 기획한 것은 이집트 혁명이 승리를 이루면서 중동지역의 ‘프랑스 혁명’이 되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있어서였다. 구정은 기자는 문화일보의 국제부 거쳐 지금은 경향신문 국제부기자로 있다. 교수보다 오히려 현장에 강한 강사라 좋은 시간이 될 것 같다. 중동 북아프리카의 혁명을 배움으로써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방법이나 한국인이 국제사태에 갖고 있는 감수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강의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리비아 사태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강좌의 시작: 구정은 기자

나는 중동 북아프리카의 역사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살아본 것도 아니다. 단지 10년 동안 일하다보니 이 지역 뉴스를 남보다 관심을 갖고 살펴보게 됐다. 지금은 이 지역에 많은 애정과 문화적 매력을 느끼고 있다. 비록 민주화에서 뒤쳐져 있지만 아픔을 최소화하면서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크다. 이 지역 상황은 지금도 진행형이어서 강의가 끝나는 4월 말이면 어떤 상황이 될지 모른다. 진행되는 걸 보면서 같이 공부한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일단은 중동 아프리카의 지리를 머릿속에 넣어두는 것이 필요하다. 보통 중동 북아프리카라고 하면 터키와 이란은 빼고 생각한다. 오늘은 북아프리카 쪽에 초점을 두겠다. 앞으로 이어지는 2,3강은 걸프 지역에 초점을 둘 것이다. 최근은 리비아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리비아는 이집트 옆에 위치한다. 리비아는 민주화 시위가 지속되어 지금은 내전상황이다.

1. 튀니지는 민주화 혁명이 아닌 시민혁명, 그리고 SNS(소셜네트워크)

일단 튀니지 혁명에 대해 알아보겠다. 이것을 민주화 혁명이라고 볼 것인지 시민혁명으로 볼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민주화라는 결과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람들은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지금까지 이런 혁명을 볼 수 없었다’라는 말을 하는데, 여기에는 중동사회가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이라 저항적이지 않다고 보는 서구적인 사고가 들어가 있다. 중동 북아프리카가 민주화에서 후진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나 아랍의 문화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나 이곳은 지금 역사적인 혁명의 시기를 겪고 있다.

‘튀니지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의 SNS 혁명'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또한 '알자지라'가 시위현장을 마치 CCTV처럼 생중계했다. 아랍어를 쓰는 국가 모두가 이 방송을 보기 때문에 이번 혁명 과정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기존에 존재하던 분노와 억압의 강도가 셌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므로 시민의 분노와 SNS의 역할이 합쳐져 촉발됐다고 볼 수 있다.

2. 무바라크 시절 이집트와 중동 지역의 혁명

이 지역은 공통점이 있다. 

1) 종교는 이슬람교이고, 언어는 아랍어라는 점 2) 근대 이전까지 아랍지역이었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영토로 한 나라였던 점, 즉 광범위한 공통의 역사 3) 30-40년간의 독재정권을 겪으며 형성된 계층갈등의 심화 그리고 4) 산업 성장 기반이 없고, 외부 의존적이라는 점 이다. 

이집트는 이 지역에서 중요한 나라이다. 이집트에서는 아랍연맹사무총장, 노벨상 수상자, 유엔총장 등이 나와 국제적으로 힘이 있는 국가이지만, 팔레스타인을 누르고 자국민을 억압하면서 버텨 왔다. 통계는 없지만 1/3이 유형, 무형의 미국원조로 살아간다. 독재가 지속되다 보니까 미국에도 무바라크 정권이 짐스러운 시점이었고, 시민의 힘이 압도적으로 드러나자 무바라크는 미국이 버리는 카드가 됐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미국에 달렸다’는 건 믿을 말이 못된다. 오히려 시민의 손에 달렸다. 그것이 진정한 권력 투쟁이고 이집트는 지금으로선 시민이 이긴 상태다.

지금 중동은 2차대전이 끝난 것보다 더 큰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 손으로 혁명을 만들어 가고 있다. 프랑스 혁명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이번 혁명은 시대를 앞서 가는게 아니라 마무리하는 혁명이라는 큰 의미가 있다. 20년 전 냉전시대가 끝나면서 사라졌어야 할 미국의 패권을 등에 업은 독재정권이 중동이라는 특수성과 석유의 이익 때문에 지속되어 온 것이다. 지금 카다피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적 패러다임으로 봤을 때 이미 끝났다는 의미이다.

3. 리비아의 시민혁명

카다피가 어떻게 정권을 잡게 되었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상황이 진행될 가능성이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카다피는 20대 때 쿠데타로 집권한 후 42년간 권좌에 있었다. 그는 카다파 족이어서 카다피가 됐다고 한다. 그는 60-70년대 이집트 나세르의 영향을 많이 받아 아랍사회주의와 부족주의 성격을 띄는 범아랍주의 성향이 강하다. 

리비아는 이슬람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국영으로 운영되는 영역이 많다. 또한 리비아는 70년 대 대의민주주의가 아닌 ‘자마리아’ 즉 인민공화국이라고 선언한 바가 있다. 독특한 점은 카다피와 그의 측근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다피는 직책이 없다는 점이다. 이때까지 카다피는 권력을 잡은 후 시민에게 고문, 감금은 했지만 처음 집권과정에서 사람을 많이 죽이진 않았다. 미국도 카다피를 두고 막무가내이지만 실용주의라고 인정했다. 또한 그는 석유자원을 팔아서 아랍권을 통합하려 했고 역내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런 기반을 통해 그는 40년간 정권을 이어 올 수 있었다. 그는 석유를 팔아 번 돈으로 대외정치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계속 보여왔지만 이집트만큼 국제정치에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웠다.

카다피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내세우면서 반미제국주의 투쟁을 진행해 왔다. 미국과의 관계가 최악일 때는 레이건 대통령 때였다. 이란의 팔레비왕조가 무너지면서 미국의 중동전략에 혼란이 왔다. 미국이 이라크를 시켜서 이란을 침공하게 만들 때 카다피는 이란을 지지했다. 이것 때문에 레이건 때 양국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카다피를 ‘중동의 미친개’라고 불렀다. 그 때부터 카다피 전복공작을 시작하게 됐다. 사실 이런 사건들이 없었다면 크게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테러사건의 배후였다는 이유로 트리폴리가 공습당하면서 그의 수양딸이 죽었고 90년대 말에는 중동에서는 영향력이 없어서 아프리카주의로 전환했다.

그는 정서적으로 문제가 생긴게 아니가 싶을 정도로 돌출행동을 많이 했다. 아프리카 왕같은 옷을 입고 나오기도 하고, 아프리카연합의 의장국을 맡으면서 부족장을 모아놓고 자신을 왕중왕으로 일컫거나, 외국에 순방가면서 천막을 지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카다피와 서방과의 관계를 보면 그는 영국의 전 총리인 블레어와는 친하게 지냈다. 3년 전 총리직 그만두기 전에 리비아 유전개발권을 따 줄 정도로 친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과도 가까웠다. 리비아에서 카다피가 잘못한 게 있다면 이번에 혁명이 발발한 후 전투기까지 띄워서 사람을 죽인 것이다. 미국이 석유 이익 때문에 편을 들어 주고 싶어도 국내에서 표가 깎여서 그렇게 못하는 상황이다. ‘앞으로 리비아는 어디로 갈 것인가?’는 국민의 힘에 달렸다.

이집트는 인구의 97%가 국토의 3%에 모여 살고 있다. 반면 리비아는 전체가 사막이고, 사람들이 흩어져 살기 때문에 결집된 시민의 힘이 없다. 지금 리비아는 카다피가 있는 상태에서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으면 카다피를 축출할 방법이 없다. 가장 좋은 방향은 인명피해가 최소화 되는 선에서 카다피가 멈추는 것이며, 리비아인의 힘으로 민주적인 새로운 정부를 꾸리는 것이다. 반군은 전력이 큰 게릴라군이 아니기 때문에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지상군 투입은 못 하기 때문에 현 상황이 유지될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카다피가 장악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4. 인도적 개입, 해야 한다 vs 말아야 한다

인도적 개입을 두고 국제적으로 논란이 많다. 왜냐하면 군사행동이 목숨을 빼앗는 전례들이 많기 때문이다. 옳으냐 그르냐는 결과를 중심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코소보는 인구가 밀집된 도시였다. 공습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서 누가 학살자인지 학살받는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됐고 악천후까지 겹쳐 실패했다. 코소보 사태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대해 좌파지식인은 개입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90년대 시에라리온이 절망의 땅이 되어버렸을 때 영국군이 개입했고 이는 성공적이었다. 군벌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했고 학살의 주범인 라이베라 대통령을 잡아서 국제전범재판에 붙였다. 그 후 라이베리아에서는 여성대통령이 당선되었고 결과도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인도적 개입이 성공하지 못한 다른 케이스들이 더 많이 있다. 90년 대 이라크는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10년 간 엠바고를 실시했는데, 이라크의 어린이와 병든 사람들이 죽는 결과를 낳았다. 지금도 죄를 저지른 당사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징벌을 주는 집단징벌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유엔의 금수조치 책임자였던 사무차장이 금수조치를 반대하는 일까지 생겼다. 90년대 르완다는 300만명이 학살됐는데도 국제사회가 개입하지 않았다. 왜 그런지 알 수 없다. 또한 90년대 아프간 내전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인도적 개입’이라는 명분으로 이행됐다. 이라크에는 알카에다도 없었고 대량살상무기도 없었는데 인도적 개입이라고 용어를 붙여, 결국 인도적 개입이라는 말만 오염시켜 놨다.



Q & A: 구정은 기자와 수강생과의 대화

Q. 혁명 후는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나? 시민의 힘이라고 하는 데 시민의 힘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을까?

A. 한국의 386 세대가 시민의 힘을 의심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 동시에 그들은 미국의 힘을 믿는다. 이라크 전이 개시되기 전 몇 달 전부터 세계 곳곳에서는 반전시위를 비롯한 움직임이 많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명한 교수나 학자,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반대해 봤자지’ 하는 회의론이 대세였다. 시민들의 움직임이 미국이 일으킨 전쟁을 막지는 못했지만, 건전한 시민들의 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이라크의 사상자를 줄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국제사회가 반대하는 이라크전쟁을 했고, 이 과정에서 미군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많았지만, 만약 모두가 전쟁에 무관심했다면 더 심하게 사상자를 냈을 것이다. 미군 측에서 오폭 사고를 내면 시민들이 민간인학살이라고 크게 반발하면서 공습자체를 많이 바꿨다. 그것이 바로 시민의 힘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시민의 힘은 작용을 한다.
 
지난 30년 동안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 이집트의 경우, 부시 전 대통령은 중동민주화를 원했는데 오바마는 무바라크를 끌어안았지만 이집트 국민의 힘에 밀려 무바라크를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시민의 힘은 결정적인 순간에 보이는 것 같다. 중동에 있는 사람들은 이집트를 싫어한다. 매춘부, 사기꾼 등이 이집트를 묘사하는 단어이다. 이집트인들은 부패한 정권 밑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시민들 뼈 속 깊이 부패했기 때문이다. 지금 시민혁명 이후 집권한 이집트 총리는 1년 간 교통부장관을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주변에는 노벨화학상을 받은 저명한 물리학자와 나사에서 근무한 과학자 지식인 그룹이 그 주변에 있다. 이집트에서는 시민사회가 축적한 힘이 현 상황에서도 이집트가 아수라장이 되지 않게 하고 있으며, 군부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Q. 과연 인도적 개입이라는 명분하에 타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옳은가?

A. 인도적 개입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원론적이라는 문제가 있지만 원칙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죽여도 되는 정권은 없다. 인권을 넘어서는 주권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실제적인 군사행동은 또 다른 인명피해를 가져오는 것이다.

리비아의 경우는 군사시설에만 폭격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북한정권에도 인도적 개입을 해야 하나? 평양 같이 인구가 밀집한 곳은 일반인들이 수 천명, 수 만명이 죽는 것이 뻔한 사실이다. 사건 하나하나에 따라 달라 ‘옳다 그르다’하기 어렵다. 지금까지는 리비아에 대해서는 군사개입을 했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평가가 많다. 벵가지 공습 함락 때 카다피 군에 타격을 주면서 민간인 거주구역이 아닌 곳에 폭격하는 것은 합당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점은 국제법을 연구하는 분들도 혼란스러워한다. 

Q. 중동 지역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십 수년 전에 국제부에 갔을 때 막내였고 선배들이 미국과 유럽을 담당했다. 국제부에서 일하다가 사회부로 옮겼다가 다시 2001년 다시 국제부로 갔을 때 9.11이 터졌고 역시 막내였다. 그때 또 중동을 맡아서 공부를 하면서 출간된 책을 섭력하였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실크로드 그런 것들을 좋아했고 문화적 매력도 느꼈다. 막내라서 중동 아프리카 지역을 맡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느새 인생의 중심이 되었고, 국제정세 역시 지금에 와서는 유럽은 어떤 영향도 없고 변수도 아닌 상황이 되었다. 

2001년 후반 9.11 이후부터는 날마다 집에 가면서 이라크 가는 생각을 했다. 요르단에 한국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는데 어느 날 비자가 나왔다. 사담후세인이 국민투표를 한 적 있는데 이 때 해외기자초청을 하면서 바로 다음날 요르단으로 갔다. 이라크에 들어가 있다가 최후통첩 때 요르단으로 나와서 이라크전을 보았다. 나야 달랑 나오면 그만이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죽을 수도 있었다. 인생에 가장 마음이 아픈 부분이었다. 그 다음에는 관심사가 아프리카로까지 넘어갔다. 

Q. 중동 아프리카 지역에서 미국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A. 그들은 미국을 굉장히 싫어한다. 이 지역은 미국의 위선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독재정권인 무바라크 정권을 밀어주었고, 이라크 전쟁을 통해서 미국의 위선은 극명하게 드러났다. 역사가 7000년이나 된 세계 최초의 국가이자 문명이 중첩된 국가인 이라크에 대해 미국은 오만하기까지 했다. 미국은 한국 전쟁 때 남한을 지원했고 한국은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벌기도 하는 가까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중동에게는 그렇지 않다. 필요성을 인정하는 정도이지 미국을 옹호하는 것은 중동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다.

첫 강좌를 듣고서: 국제연대위원회 인턴 장유진

우연히 몇 해 전 세바스티앙 살가도 사진전을 보게 됐습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미국중심의 동북아 정세만 공부하던 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우리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지구 반대편에서 고통 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했고, 참여연대의 중동 북아프리카의 강의를 듣는 계기가 됐습니다. 구정은 기자의 생생한 강의는 이 지역의 상황을 ‘학문적 성찰의 눈’이 아닌 ‘기자의 예리한 눈’으로 현장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받았습니다. 특히 체험담과 그 지역사람들의 시각에 대한 설명은 책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어서 값졌습니다. 지도자의 성향이나 국민성 등 체험한 사람에게만 나오는 소소한 일화들이 많아 흥미로웠습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왜’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됐습니다. 좀 더 깊이 있는 내용으로 이어질 두 번째 강의가 기대됩니다. 


강좌 기록 및 후기: 국제연대위원회 인턴 장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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