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스크랩] 마르코폴로와 쿠빌라이칸의 대화

딸기21 2002. 4. 13.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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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한사코 말하지 않는 도시가 아직 하나 있다"
마르코 폴로는 고개를 숙였다.
"베네치아." 칸이 말했다.
마르코는 미소를 지었다. "제가 지금까지 폐하께 말씀드린게 베네치아 말고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황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네가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걸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그러자 폴로가 말했다. "저는 다른 도시를 설명할 때마다 항상 베네치아에 대해 무언가를 말씀드리고 있었습니다......"
호수의 수면에 잔물결이 일었다. 송나라 때 지은 오래된 왕궁의 구릿빛 물그림자가 산산이 부서져 물에 떠다니는 나뭇잎처럼 반짝거렸다.
"기억 속의 이미지란 것은 일단 말 속에 붙박이면 지워지는 법입니다."
폴로가 말했다. "베네치아에 대해 이야기하면 베네치아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아니, 어쩌면 다른 도시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미 베네치아를 조금씩 잃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마르코는 생각했다. 드넓은 바다와 산맥을 가득 뒤덮는 안개를. 안개가 흩어지면 대기가 건조하고 투명해져서, 멀리 떨어진 도시들이 드러난다. 그의 시야가 닿고 싶어한 곳은 그 변덕스러운 장막 너머였다. 사물의 형태는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더 잘 분간할 수 있다.

(마침내 두 남자의 마음 속에는 의심이 싹트기 시작한다. 이런 대화가 도대체 가능한 것일까. 그들은 정말로 지금 이 특정한 시간에 이 특정한 정원에 앉아서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쿠빌라이는 먼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고, 폴로는 먼 나라의 시장에서 후추를 흥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심중을 쿠빌라이가 내비친다)


 

"우리가 나누는 이 대화는 어쩌면 쿠빌라이 칸과 마르코 폴로라는 별명을 가진 두 걸인 사이에 오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쓰레기 더미를 뒤져서 녹슨 잡동사니와 넝마를 모으고 있지만 싸구려 술 몇모금에 거나하게 취해서 주위의 모든 것이 동양사원의 보물처럼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자 폴로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쩌면 이 세상에 남아있는 것은 쓰레기 더미에 뒤덮인 황무지와 폐하의 궁전에 있는 공중정원 뿐인지도 모릅니다. 황무지와 공중정원을 구별하는 것은 우리의 눈꺼풀이지만, 어느 것이 안쪽이고 어느 것이 바깥쪽인지는 우리도 알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통치자와 여행자-은 칸이 발견한 지도책 주위에 모인다. 지도책에서 그들은 칸이 살았던 캄발루 같은 도시들을 본다. 폴로가 기억하고 있는 예루살렘이나 사마르칸트같은 도시들을 본다.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찾아갈 수는 없는 도시들-그라나다, 파리, 팀부크투-을 본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다시피 하고, 아직은 어떤 서양인도 발견하지 못한 도시들-쿠스코, 노브고로드-을 본다. 멸망하여 모래나 흙 속으로 사라진 도시들-트로이, 우르, 카르타고-을 본다. 새로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도시들-로스 앤젤레스, 오사카-은 모양조차 없는 새롭고 생소한 그물을 사방으로 펼치고 있다. 그들은 아직 지도에 적혀있지 않은 약속의 땅-유토피아, 뉴라나크, 태양의 도시-을 이름만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악몽 속에서 그들을 위협하는 도시들-에녹, 야후랜드, 멋진 신세계-을 본다)

"모두 쓸데없는 짓이야." 칸이 말했다. "마지막 상륙지가 지옥같은 도시일 수 밖에 없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런데 우리를 둘러싸고 소용돌이치는 조류가 점점 물살을 좁히면서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는 곳은 바로 그런 도시일세."
그러자 폴로가 말했다. "살아있는 사람의 지옥은 미래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 지옥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이 곳에 존재하는 겁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있음으로써 지옥을 만들어냅니다."

(상호화해가 이루어진 순간, 그리하여 두 사람이 공통된 현실에 잠깐 뿌리를 내린 순간, 칸은 애정어린 눈길로 마르코 폴로를 돌아본다.)

쿠빌라이는 베네치아 상인에게 묻는다. "서양으로 돌아가면 나한테 들려준 이야기를 네 동족한테도 그대로 되풀이해 주겠느냐?"
"제가 아무리 말해도, 듣는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밖에는 머리에 담아두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자비롭게 경청해 주신 세상 이야기, 제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날 우리집 바깥 거리에서 부두 노동자와 곤돌라 사공들 사이에 퍼질 이야기, 그리고 제가 말년에 제노바 해적의 포로가 되어 어느 모험소설 작가와 같은 감방에 갇히게 되면 구술할지도 모르는 이야기, 이 세 가지는 모두 별개입니다. 이야기를 지배하는 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귀랍니다."


오리엔트와 옥시덴트의 만남, 군주와 상인의 만남. 물론 픽션입니다. 동방견문록의 패러디 버전-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대목들인데, 괄호 안에 넣은 것은 조너선 스펜스가 <칸의 제국>에서 그 소설을 인용하면서 집어넣은 설명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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