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먼 저편 - 체 게바라 시집

딸기21 2002. 12. 19.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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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저편 - 체 게바라 시집 
체 게바라 (지은이), 이산하 (옮긴이) | 문화산책


요새 돈이 없어서 통 책을 사지 못했다. 후배가 건네주는 <읽다 남은> 책들을 전해받아 읽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어제 교보문고에 들러 이 책을 발견했다. 먼 저편, 그리고 체 게바라의 이름. 그러고보니 신문 서평에서 본 것도 같다. <체 게바라 마니아>를 자처하는 이산하 시인이 체 게바라의 글들을 시집 형태로 묶어냈다는 것, "체 게바라의 찢어진 군화를 꿰매고 구겨진 전투복을 다리미질하는 마음으로 엮었다"던 시인의 고백.


진열대에 놓인 책을 본 순간 불현듯 너무너무 읽고 싶어져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른 사들고(실은 덩달아 몇권의 책을 더 사기까지 했다) 미리 약속돼있던 친구들과의 모임에 갔는데 내내 "집에 가서 책을 읽어야지"하는 생각이 마음이 근질거렸다. 그리고 오늘, 모처럼 휴가를 내어 집에서 쉬면서 두근거림을 내리누르며 책장을 펼쳤다.

언제였더라. 내가 처음으로 체 게바라의 사진을 보며 "멋있다"고 생각했던 때가, 그를 소개한 글을 읽으면서 <혁명가의 삶>에 도취되었던 때가, 가능하다면 나도 저런 혁명가가 되고 싶다면서 동경하고 꿈꾸었던 때가. 그리고 또 언제부터였을까. 이제는 <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면서 하나둘 포기하고 지우고 생각조차 안 하기 시작한 것이, 나는 <정치 냉소주의자>라고 잘났다는 듯 서슴없이 선언하기 시작했던 것이. 생각해보면 아주 오래된 일 같고, 또 다시 생각해보면 아주 최근의 일 같기도 하다.

겨울이 되어서일까. "Though we never thought that we could lose, there's no regret" 다시 떠오른 아바의 <Fernando>, 그 노래가사가 자꾸 생각이 난다. 노랫말처럼 체 게바라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고.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과테말라에서 혁명가가 되고 쿠바에서 싸우다가 볼리비아에서 죽은" 이 사내, 흑백사진 속에서 별 달린 베레모를 쓰고 왼 손에 시가를 들고 멋지게 웃고 있는 이 사람, 죽고 나서는 손목까지 잘려나갔다는 전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이산하의 편집 덕분이 아니더라도 그 자체로 한편의 시이고, 역사의 한 장면이다.

나는 체 게바라의 시에 포스트잍을 잘라 붙였다. 무려 17개의 노란 딱지들이 책갈피 사이사이에 끼어들어갔고, <마른 우물처럼> 말라붙어있던 내 감정도 책장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나이 열다섯에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를 놓고 고민했다"는 고백을 들으면서 오래전 읽었던 다미야 다카마로의 글(무엇을 할 것인가를 놓고 일주일 동안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고민했다는)을 다시금 떠올렸다. 


"인간은 모든 것들의 기준이다"라는 선언, 아바나로 떠나면서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 한 구절, 총구에서 총알이 하나씩 빠져나갈 때마다 "내 안의 파쇼도 하나씩 빠져나가리라"는 그 말, <진정한 혁명의 시작>을 뒤로한 채 또다른 혁명을 꿈꾸며 쿠바를 떠날 때 했던 고백, 그 모든 것들이 가슴을 울린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먼 저편에서 별빛이 나를 부른다"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 무언가가 나를 부른다고 얘기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부름을 좇아 떨쳐일어날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어쩌면 나는 평생을 살아도 "별빛이 나를 부른다"는 말은 할 수 없을지도 몰라. 그래서 체 게바라의 시들이 이렇게 마음을 흔드는 거지. 결국 내 마음을 두드리고 흔드는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가 걸었던 <삶> 그 자체일 터이니까.

"내가 이루고 싶었던/그 많은 희망들 중에서/가장/순수한 희망만을 남겨놓고/나는 떠납니다". 

<감동>이라는 흐릿한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으로 울면서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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