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미-소 이어준 소녀 서맨사 스미스

딸기21 2010. 7. 6.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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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미스터 안드로포프. 제 이름은 서맨사 스미스이고, 나이는 10살입니다. 새로운 일을 맡게 되신 걸 축하드려요. 저는 러시아와 미국이 핵전쟁을 할까봐 무서워요. 혹시 전쟁을 할 것인지를 놓고 투표를 하실 생각인가요? 그런 게 아니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일을 하실 생각인지 제게 얘기해 주세요. 꼭 대답하셔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왜 이 세상을, 최소한 우리 나라를 정복하려고 하는 건지 알고 싶어요. 신은 우리가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살라고 이 세상을 만드셨거든요.”

1982년 11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숨지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미국인 소녀의 편지가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에 실렸다. 물론 안드로포프의 답신은 없었다. 하지만 프라우다에 편지가 실렸다는 사실에 힘을 얻은 스미스는 미국 주재 소련 대사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안드로포프 서기장이 답장을 보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83년 4월 26일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친애하는 서맨사, 편지는 잘 받았다. <톰 소여>의 친구 베키처럼 용감하고 정직한 아이로구나. 마크 트웨인의 그 책은 우리 나라 아이들도 아주 좋아한단다. 핵전쟁이 일어날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 진지하고 정직하게 대답해보마. 소련은 지구상에 그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하고 있단다.” 


스미스를 담은옛소련의 기념우표

스미스의 책 표지



‘Y. 안드로포프’라는 서명이 담긴, 안드로포프의 답장이었다. 안드로포프가 권력을 물려받았을 당시 미국 언론들에 실린 그에 관한 기사는 ‘서방에 더 큰 위협이 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내용이 주를 이뤘다. 안드로포프는 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부다페스트 주재 소련대사로 있으면서 민중혁명을 짓밟게 만든 인물이었다. 모스크바 복귀 뒤에는 KGB의 수장을 맡아 반체제 세력을 억압하며 권력을 강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인권 투쟁이라는 것은 소련의 근간을 흔들려는 광범위한 제국주의자들의 책동의 일환일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집권한 것과 때를 같이 해 미국에서는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해 ‘스타워즈’로 알려진 군비경쟁에 불을 붙였다. 미-소 냉전이 위기로 치달을수록 핵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반전반핵 분위기에도 힘이 실렸다.

스미스는 캐나다와 가까운 메인 주의 홀튼에서 태어나, 어릴 적 맨체스터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강사였고, 어머니는 공무원이었다. 

시사주간지 타임의 커버스토리로 다뤄진 안드로포프 취임 기사를 읽은 뒤 “이 사람이 그렇게 무서우면 편지를 써서 전쟁을 할 건지 말 건지 물어보면 되잖아요”라 물었다 한다. “네가 해보지 그러니(Why don‘t you)”라는 어머니의 대답이 소녀의 삶을 바꿨다. 냉전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소녀의 편지는 두 수퍼파워를 잇는 다리가 됐다. 미국은 물론, 유럽과 소련의 미디어들은 ‘어린 친선대사’로 떠오른 소녀에게 열광했다.

스미스는 마침내 83년 7월 7일 안드로포프의 초대를 받아 부모와 함께 소련 땅을 밟았다. 2주 동안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스부르크), 크림반도 등을 둘러본 스미스는 미국에 돌아가서 “그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다는 걸 알았다”며 소련인들의 환대를 알렸다. 정작 모스크바에서 안드로포프와 만나지는 못했고, 전화 통화만 했다고 한다.

스미스는 미국 미디어의 유명인사가 됐다. 84년은 대선이 있는 해였다. 디즈니 채널에 ‘서맨서 스미스 워싱턴에 가다’라는 어린이 코너가 만들어지는 등, 스미스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분위기도 커졌다. 

그러나 소녀의 인생은 길지 못했다. 85년 8월 스미스는 영화에 출연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13년의 짧은 삶을 살다간 스미스의 죽음에 미국은 물론 소련인들도 함께 슬퍼했다. 소련의 마지막 대통령이 된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레이건 미 대통령도 애도 서한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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