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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디부아르]시골 진료소에서

딸기21 2010. 4. 2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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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나무 밑 작은 테이블에 항생제와 붕대를 올려 놓은 간이 진료소. 통나무 의자에 걸터앉은 코피 셀레스텐(11)이 흰 가운을 입은 남성에게 왼쪽 팔을 내민다. 상처에 엉겨붙은 붕대를 물에 축여 떼어내니 피부조직이 사라져 벌건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피 냄새를 맡은 파리떼가 코피의 상처로 순식간에 몰려든다. 피가 줄줄 흐르는 팔뚝을 항생제로 닦아내고 다시 붕대를 감는 동안, 소년은 끔찍한 고통을 참아낸다. 울지도 않고 소리도 내지 않는다.


꽈꾸꽈꾸 미카엘(15)은 발바닥 쪽에 비슷한 상처가 나있다. 이미 피부와 근육이 손상돼 걸을 수 없는 발을 절룩거리며 끌고 다닌다. 다시 파리떼가 날아든다. 상처가 아물더라도 저대로 둘 수는 없고, 수술을 해서 발목을 절단한 뒤 의족을 달아야 한다.

서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는 해안을 따라 아비장 등 도시들이 발달해있고, 북쪽의 내륙으로 올라갈수록 저개발지역이다. 코피가 앓고 있는 것은 중부 내륙도시 부아케 부근 시골마을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부룰리 궤양이다. 오염된 물에 사는 물벼룩등을 통해 미코박테리아라는 병균에 감염되면서 생기는 질병이다.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에 소속돼 현지인들을 위한 의료봉사활동을 하고있는 박프란체스카(49) 수녀와 함께 이달초 부아케 주변 마을들의 부룰리 궤양 치료소들을 찾았다. 너무나도 가난하고 너무나도 소탈한, 너무 아프고 너무 고통스러운 삶의 모습들이 그 곳에 있었다.

타바코 마을의 간이진료소. 아직 건물이 없어 망고나무 아래에 저렇게 아침마다 진료소를 차린다.


부아케에서 북쪽 국경너머 부르키나파소로 이어지는 포장도로를 따라 자동차로 30분 가량 달리면 알라크로 마을이 나온다. 가로등이 설치된 큰길에서 한 걸음만 덤불로 들어서면 전기도 수도도 없는 시골마을이다. 주민들은 망고를 따다 길 옆에서 팔거나 농사를 지어 먹고 산다. 수입은 거의 없다. 사실상 시장경제에서 벗어나 있는 곳이다. 


망고나무 밑 진료소에 찾아온 꽈꿀루시(12)는 오른쪽 발에서 허벅지까지 부종과 상처로 덮여 있고, 아물어가는 부분은 흰 근육이 드러나 있다. 상처가 낫는다 해도 피부조직은 재생되지 않기 때문에 흰 근육 상태로 굳는다. 보호막이 없는 근육은 햇빛을 받으면 암에 걸리기 쉽다. “몇달 동안 항생제 치료를 받고 근처 소도시 사카수에서 피부이식수술까지 받게 했는데 병이 다시 도졌다”며 박수녀님이 한숨을 짓는다. 어린 환자 7~8명이 제각각 팔다리에 상처를 안고 꽈꿀루시가 치료받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순서를 기다린다.

아래 사진들은 약간의 시각적 충격이 있어서... 접어놓습니다 


(팔이 부어오른 상태에서 피부가 사라져 시뻘건 근육이 드러나있다. 얼마나 끔찍한 고통일까. 그런데 저 아이가 울지를 않는다. 저기다가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으려니... 이게 이 곳에서였으니까 가능한 거지, 다른 곳에서 사진찍는다 했으면 몰매맞았을 것이다. 인권침해가 될 수도 있고.
이모저모로 참 마음이 아팠다. 처음엔 도저히 들여다볼 수가 없어서 '나는 의사는 못 되었겠구나' 했다. 수녀님이 존경스럽기도 했고. 그런데 한나절 동안 3개 마을 다니면서 상처들 들여다보고 있자니 금세 또 눈이 익숙해졌다. 사람이란... 어찌 보면, 그래서 사람은 잔인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치료받을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들. 붕대가 모자라, 자기가 쓴 것은 빨아가지고 와야 한다.

피부가 재생되지 않아, 상처는 아물어가지만 근육이 그대로 노출돼 있다.
빨리 피부이식수술을 받지 않으면 피부암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박수녀가 이곳에 처음 온 것은 2003년. 마을마다 끔찍한 상처에 시달리는 이들 천지였다. 주민들은 나뭇잎에 기름을 발라 상처에 대어보고 낫지 않으면 “마귀가 들렸다”며 환자들을 내다버렸다. 박테리아가 피부 밑으로 들어가 피하지방을 파먹고 근육과 뼈까지 파고들어가는 궤양이었다. 

종양이 생겼을 때 초기에 치료하면 되지만 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상처를 방치하거나 ‘전통 요법’으로 오히려 악화시켰다. 환자들은 상처가 팔다리로 퍼지면서 근육이 수축되고 결국에는 마비되는 고통 속에 죽어갔다. 박수녀는 프랑스로 가 1년 동안 부룰리 궤양을 비롯한 열대성 질병들에 대한 기본적인 처치법을 배운 뒤 2005년 부아케로 돌아왔다.

주민들을 돕는 것은 힘들었다. 프랑스 구호단체 라클레(LAFLEF)와 수녀회에서 지원해주는 돈으로 리팜피신, 스트렙토마이신 등의 항생제를 사 알라크로를 비롯한 마을들을 돌아다녔다. 사람들의 삶은 척박했다. 6개월은 비가 쏟아지고 6개월은 가뭄이 드는 곳이라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사람들이었다. 선교사들이 과거에 펌프를 놓아준 곳은 그래도 낫지만, 펌프도 우물도 없는 곳에선 여자들이 3~4㎞를 걸어 늪의 물을 떠다가 흙을 가라앉히고 그걸 마신다. 주민들은 지금도 대개 하루 한 끼만 먹고 산다.

박수녀님과 의료 봉사자들.


코나크로 마을의 진료소 앞에서. 여긴 진료소가 아주 번듯하다. 마을 크기도 크고.
하지만 이런 진료소가 생기기까지, 특히 이 마을에서 수녀님 고생이 몹시 심했다고 한다.
봉사자를 뽑아놓으면 '하겠다' 해놓고 다음날이면 안 오고, 그러기를 몇번을 하다가 비로소 사람을 구했다고.


서양 선교사들이나 구호기관들이 ‘거저 주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관행을 고치려고 치료비 100세파(250원)씩을 내라고 했다. 그러자 아무도 박수녀에게 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이 사람들은 그 돈도 없는 거예요. 수입이라는 게 아예 없는 거지요.” 


장기간 처방이 필요한 부룰리 궤양 치료는 무료로 바꾸고 마을 사람들을 설득했다. 마귀가 아니라 병균 때문이라고, 몇년 동안을 설명하고 다녔다.


주민들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지만 박수녀 혼자 힘으로는 마을마다 몇십명에 이르는 환자들을 다 다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을 별로 2명씩, 7개 마을에 총 14명을 뽑아 사카수와 아비장의 병원으로 보내 교육을 시켰다. ‘영양’ 개념을 가르치고 아이들에게 먹여야 할 것들을 일러주었다. 처음에는 ㎎ 등의 단위와 기초적인 수학부터 가르쳐야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나온 사람들로 골랐는데도 ‘100㎎의 약을 하루 세 번 나눠먹이려면 얼마씩 줘야할까’ 이런 것들까지 모두 일러줘야 했어요.” 

다행히 봉사자들은 열성적이었다. 

“여기 사람들 게으르고 약속 안 지킨다는 선입견이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현장 진료는 거의 이 사람들이 다 맡아요.” 

봉사자들은 다달이 활동비와 자전거 수리비 1만 세파를 받으며 일하고 있다.

알라크로 마을의 봉사자 코네 마크(45)는 2005년부터 박수녀와 함께 일해왔다. 그는 “6~7㎞ 떨어진 마을에서도 부룰리 궤양 치료를 받으러 환자들이 이리로 온다”고 전했다. 이제는 마을 어귀에 제법 번듯한 방 2칸짜리 진료소 건물도 지었다. 수도가 없어 간이 물탱크를 천정에 붙여놓고 샤워기를 달아 밑으로 물이 흐르게 했다. 박수녀가 고안한 물 공급 장치다. 

봉사자들은 항생제 치료를 하고, 이식수술이 필요한 환자들을 가려내 도시의 병원으로 보낸다. 코네는 매일 아침 5시 반 마을 환자들을 진료한 뒤 자기 밭으로 일하러 나가는 게 일과다. 멀리 떨어진 마을들로 약을 싸들고 왕진을 나가기도 한다. 박수녀는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이 사람들”이라며 코네와 봉사자들을 가리켰다. 한국에서 공수해온 초코파이는 그날 박수녀가 알라크로의 봉사자들에게 건넨 선물이었다.

이웃한 타바코 마을에도 망고나무 그늘에 진료소가 차려져 있었다. 아직 약을 둘 창고가 없어 봉사자인 씨쎄무사(43)의 흙집에 보관해두고 있다. 무슬림 마을인 타바코의 입구에는 조그만 하늘색 모스크가 세워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마을엔 펌프가 있어서 깨끗한 마실 물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봉사자들이 아직 주사 놓는 것에 익숙지 않아 마을 산파가 돕고 있었다. 

여기서 흙길로 6.5㎞를 더 가면 주민 1000명이 넘는 큰 마을 코나크로다. 근처에 저수지가 있어 궤양이 유독 심한 곳이다. 자네트(42)는 12년째 상처를 안고 산다. 좀 낫는가 싶으면 다시 나빠지길 몇번째. 오른쪽 무릎 아래가 움푹 패인 채로 날마다 밭일을 나간다. 

“아무리 치료해도 상처가 낫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요. 병원에 보내보면 십중팔구는 에이즈로 나옵니다.” 

이 곳 사람들은 에이즈를 프랑스어 식으로 ‘시다(SIDA)’라 부르는데, 정작 이 병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다.

야오드니(10)는 이 나라 최대도시인 아비장의 병원에 1년간 입원해 부룰리 궤양을 잘라내고 피부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상처가 다시 도졌다. 그 사이 부모가 숨져 할머니와 사는데, 먹을 게 모자라 늘 영양실조 상태이니 낫지를 않는다. 에페(22)는 5세 아들을 둔 젊은 엄마다. 항생제 치료 도중 둘째 임신사실을 알았다. 

이미 뱃속의 아이는 항생제 때문에 기형아가 됐을 수 있다. 중절을 하고 엄마의 병치료부터 해야 하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절대로 못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치료를 중단했다. 또 다른 젊은 엄마가 뭔지 모를 병에 걸려 배가 볼록 나온 돌배기 사내아이를 안고 진료소에 왔다. 흑인이 아닌 사람을 처음 본 아기는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반대로 서너살 이상된 꼬맹이들은 외국인이 오니 주변으로 몰려들어 가닥가닥 땋은 머리들을 흔들며 웃었다.

코피 셀레스텐이 치료를 받은 뒤 진료소 건물 앞에 앉아 있다.
이 애는 7km나 떨어진 마을에 살고 있었지만, 치료를 받기 위해 알라크로 마을에 와서 할머니 집에 머물고 있다.

코나크로에서 만난 아기. 흑인 아닌 사람을 처음 보고 어찌나 우는지.
내가 다른 곳을 보면 살짝 나를 쳐다보다가, 내가 다시 고개를 돌리면 앙앙앙.
엄마도 아기도 귀엽다. 엄마래봤자 이제 스물 넘었을까.

 

타바코 마을의 산파 할머니. 포스가 장난 아니다. "나도 주사 놓는데 왜 가운 안 주냐"며 수녀님에게 조른다.

코나크로를 방문한 날 박수녀에겐 5년간의 봉사활동에서 가장 기쁘고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비장의 정유공장에 다니는 이 마을 출신 청년 2명이 치료에 써달라며 붕대와 핀셋, 소독기구, 약을 사가지고 와 ‘기증’한 것이다. 청년들은 지속적으로 진료소를 도울 방법을 마을 사람들과 의논해보겠다고 했다. 붕대가 모자라 환자들이 각기 자기 붕대를 빨아서 다시 써야 하는 상황이니,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박수녀에게 청년들의 마음이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언제나 바라고 받기만 하던 ‘아프리카식 문화’가 바뀌고 있다는 증거 같아서다. 

박수녀는 지난해 큰 일을 벌였다. 부아케에 부룰리 전문병원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수녀회 창립자 이름을 따 ‘아베 장-밥트스테 바텔로 의료센터’라 이름지은 병원 공사가 한창이었다. 수녀회 본부가 있는 룩셈부르크 정부와 수녀회 측에서 비용을 대고 운영비용은 라클레 등 구호단체들이 도와주기로 했다. 병원 마당엔 바나나와 망고나무 묘목을 심었다. 올 10월 완공될 병원과 함께 자라날 나무들이다.

“서양 수녀님들은 ‘고기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 만큼 이해하지 못해요. 그냥 돈으로 주려고 하지요. 그렇게 해서는, 이 사람들이 옛날 가난했던 우리처럼 자립을 할 수 있게 해줄 수가 없어요.”

경북 상주 시골마을 출신인 박수녀는 칠곡의 나환자촌에서도 일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인지 가난한 이 곳 시골사람들과 마음이 잘 통한다. 순박한 주민들이 병 치료해줘서 고맙다며 닭이나 염소 따위를 갖다주면 그냥 그 마을에 풀어놓고 키운다. 박수녀는 “여기 동네마다 내 염소, 내 닭, 내 양들 많아요”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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