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유럽이라는 곳

폴란드의 저력, 핵심은 '민주주의'

딸기21 2010. 4. 13.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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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스몰렌스크 항공기 참사원인에 대한 조사가 본격화되는 가운데, 대통령과 군 참모총장·중앙은행 총재 등 국가 수뇌부를 잃은 폴란드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수도 바르샤바를 비롯한 전국이 여전히 슬픔에 잠겨있지만 법에 따라 수습을 위한 정치 절차들이 진행되기 시작했고 국민들의 관심도 차츰 앞으로의 정국으로 이동해가고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인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하원의장은 12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참사로 숨진 외무·국방·문화부 차관 등 내각 공백을 채웠다고 발표했다. 실권자인 도널드 투스크 총리가 이미 한 주 전 각료들과 러시아 카틴 숲 추모행사에 다녀왔기 때문에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이 탔던 사고기에는 장관급 인사들은 타지 않아 행정부 손실이 적었다. 


코모로프스키 권한대행은 “군 수뇌부와 국가보안국 국장 등의 사망으로 안보에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조직 재정비를 하고 있다”면서 “공석이 된 중앙은행 총재도 조만간 임명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중앙은행은 이날 긴급회의를 열고 표트르 비숄렉 부총재가 총재 권한을 대행하도록 결정했다. 중앙은행은 변동환율제를 시행한지 10년만에 처음으로 항공기 참사 전날 폴란드 통화 즐로티를 매각, 환율시장에 개입하는 정책을 쓴 바 있다. 당국은 이번 참사가 경제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려 애쓰고 있다. 즐로티는 12일 곧바로 안정을 찾았고, 바르샤바 증시는 오히려 1% 올랐다. 의원 14명의 사망으로 큰 충격에 빠졌던 세임(하원)도 13일 숨진 의원들의 자리를 메우기 위한 보궐선거 논의에 드러갔다.

유례없는 참사에도 큰 흔들림이 없는 폴란드의 저력은 ‘민주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옛 소련의 간섭과 공산당 억압통치 하에서 폴란드인들은 꾸준히 민주화투쟁을 벌였고, 공산권이 무너진 이후 지난 20년 동안 레흐 바웬사 등 민주투사 출신 정치인들의 지휘 아래 민주주의를 진전시켰다. 


여전히 독재와 소요에 시달리는 중앙아시아 옛소련권 국가들이나 극심한 내전을 겪었던 옛 유고권과 달리 폴란드는 체코·헝가리 등과 함께 동유럽 민주주의의 모범생으로 자리매김했다. 재무관료 레섹 발체로비츠의 ‘충격요법’으로 1990년대 초반 조기에 시장경제로 선회한 뒤 짧은 슬럼프를 거쳐 경제도 안정을 찾았다. 95년 옛 공산권 국가들 중 처음으로 소련 붕괴 이전의 국내총생산(GDP) 수준을 회복했으며 2004년 유럽연합(EU) ‘동유럽 빅뱅’ 때 서유럽 경제권에 통합됐다.

국민 90% 이상이 가톨릭으로 묶여 있고, 좌·우를 막론한 엘리트들이 모두 민주화 투쟁이라는 동질한 정치적 경험을 가진 것이 민주주의가 자리잡는 데에 도움이 됐다는 평이다. 최근 몇년 새 카친스키 대통령과 사이가 나빴던 레흐 바웬사 전 대통령은 항공기 참사 뒤 옛 동지의 죽음을 애도했다. 카친스키의 비행기엔 공산정권 시절 ‘연대노조’ 투쟁을 함께 한 노동운동 대모도 함께 타고 있었다. 


미국 하버드대 국제정치학자 스티븐 월트는 12일 포린폴리시 기고에서 “폴란드가 특정이나 유일정당의 권위에 의지해온 사회가 아니라는 점이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대선 유력후보 코모로프스키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폴란드 대통령 권한대행(왼쪽)이 11일 바르샤바의 의회 앞에서 촛불을 들고 있다. /AP


오는 10월로 예정됐던 폴란드 대선은 이미 조기실시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대통령 권한대행(58·사진)이 주요 정당들과 대선 일정을 논의하기 시작했으며 이르면 6월, 늦어도 7월 초에는 치러질 것으로 보인다고 바르샤바 보이스 등 현지 언론들이 13일 전했다.

폴란드인들의 관심은 차기 대통령 유력후보로 부상한 코모로프스키에게 쏠려 있다. 코모로프스키는 세임(하원) 의장으로서 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 입법·행정부의 사고 수습을 진두지휘하고 있는데다 유력 대선후보로서 정국의 중심에 서있다. 당초 올 대선에는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과 예르치 스마이진스키 하원 부의장, 코모로프스키가 3파전을 벌일 것으로 예상됐으나 다른 두 사람이 참사로 숨지는 바람에 코모로프스키가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됐다.

중부 슐라스키예 출신인 코모로프스키는 벨기에의 마틸데 여왕과 친척뻘이 되는 명문가 출신으로, 바르샤바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뒤 공산정권 시절 지하언론을 주도하며 민주화 투쟁에 참가했다. 2000~01년 국방장관을 지낸 뒤 2007년 하원의장이 됐다. 도널드 투스크 총리의 시민강령(PO)과 연대한 좌파 정당 ‘시민플랫폼’을 이끌고 있다. 

사망한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과는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서있다는 평이다. 우파정당 ‘법과 정의’ 소속이던 카친스키는 ‘강한 폴란드’를 내세워 유럽과 거리를 둔 반면 코모로프스키와 투스크는 유럽연합과의 거리감을 좁히자는 쪽이며 사회이슈들에 대해서도 개방적,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코모로프스키가 대선에서 승리하면 좌(총리)-우(대통령) 세력이 억지 동거를 해온 폴란드는 2005년 이래 5년만에 좌파 정부로 가게 된다. 하지만 ‘시민플랫폼’의 정치기반이 탄탄치 않은데다 ‘법과 정의’ 지지자들이 “카친스키의 유지를 계승해야 한다”며 반발하고 있어 선거 결과를 단정짓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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