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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오늘/ 혁명가 투생 루베르튀르의 죽음

딸기21 2010. 4. 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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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도미니크 투생 루베르튀르는 1743년 카리브해 히스파니올라섬의 생도밍그 근처에 있는 프랑스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태어났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농장에서 말을 몰고 훈련시키는 일을 했었다고 한다. 

그의 주인은 루베르튀르가 33세였을 때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주었고, 루베르튀르는 수잔이라는 여성과 혼인을 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루베르튀르는 자유로운 신분이 된 뒤 생도밍그의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790년 플렝 뒤 플로웨라에서 노예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루베르튀르는 해방노예 신분으로서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여러 집단으로 구성된 노예들의 봉기를 이끌었다. 1792년 프랑스 식민의회는 흑인과 뮬라토(히스패닉계와 아프리카계 사이의 혼혈)을 노예의 족쇄에서 풀어주고 완전한 시민권을 보장해주는 법안을 채택했다. 

프랑스 본국 정부는 히스파니올라 섬 백인 이주민들의 반발을 내리누르고 노예해방을 지지했다. 하지만 1년 뒤 루이16세가 처형되고 프랑스는 소요와 전쟁에 휘말리게 됐으며, 머나먼 섬의 일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루베르튀르는 남부와 북부의 주민들을 규합, 노예제 폐지에 앞장섰으나 영국군이 쳐들어오면서 다시 위기를 맞았다.


1794년 루베르튀르는 4000명의 아프리카계 해방노예로 게릴라 부대를 결성했다. 영국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그 해 2월 프랑스 본국 정부로부터 노예제의 영원한 폐지를 확답받았으나, 그 다음에는 스페인 침략자들에 맞서 다시 싸움을 벌여야 했다.

정식 군사훈련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루베르튀르는 타고난 지도자이자 군사전략가였다. 루베르튀르는 장-자크 드살린과 앙리 크리스토프라는 뛰어난 두 부관을 데리고 유럽 열강의 군대들과 잇달아 싸워 이겼다. 루베르튀르의 투쟁 소식에 영향을 입은 파리의 자코뱅 혁명정부는 프랑스의 모든 영토에서 노예제를 폐지시켰다. 

전략가인 루베르튀르는 그 때부터 지략을 발휘, 프랑스와 손을 잡고 여전히 노예제를 포기하지 않고 있던 스페인·영국에 맞서기로 했다. 그는 스스로를 ‘공화주의자’로 선언한 뒤 생도밍그 프랑스인 주지사 휘하의 장군이 되어 영국군을 몰아냈다. 뒤이어 프랑스 세력을 쫓아냈고, 1801년에는 스페인군도 축출했다. 그 해 7월 루베르튀르는 히스파니올라 섬의 통일을 선언하고 자치정부의 수반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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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2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반동 정부는 쟈코뱅 정부의 약속을 뒤집어 매제 샤를 레클레르크를 시켜 해군 선단을 이끌고 히스파니올라를 공격하게 했다. 루베르튀르는 노예제로의 복귀를 허용치않는 조건으로 레클레르크와 강화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레클레르크는 다시 약속을 깨고 루베르튀르를 체포해 프랑스로 이송, 포르데주 교도소에 잡아넣었다. 프랑스로 압송돼 가면서 그는 “나를 쓰러뜨림으로써 생 도밍그의 자유의 나무는 밑둥이 잘릴지 모르지만 뿌리에서부터 다시 솟아오를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서반구 최초의 흑인 혁명가’ 루베르튀르는 옥중에서 폐렴에 걸려 1803년 4월 7일 숨을 거뒀다. 그러나 그가 씨앗을 뿌린 히스파니올라 흑인들의 해방과 독립의 꿈은 결실을 거뒀다. 이듬해 1월 1일 생도밍그의 해방노예들은 아이티라는 나라의 건국을 선언했다. 10만명의 흑인 노예들과 2만4000명의 백인 이주자들이 목숨을 잃은 뒤 피로 일궈낸 독립이었다. 

그 후 루베르튀르에게서 영감을 받은 수많은 유색인 혁명가들이 중남미 곳곳에서 식민제국과의 싸움을 벌였다. 역설적이지만 파리의 판테온에는 루베르튀르를 기리는 부조가 새겨져 있다.

현대의 노예들을 다룬 벤저민 스키너의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아이티의 노예들 얘기가 나온다. 루베르튀르의 꿈은 결코 이뤄지지 않았다. 200여년 전 루베르튀르가 노예해방 투쟁을 벌일 때보다, 지금, 21세기에 아이티에는 더 많은 노예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역사는 참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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