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어제의 오늘/ 세기의 체스 대결

딸기21 2010. 2. 9.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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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와 K는 모두 체스의 달인이었다. 1996년 2월 10일 미국 뉴욕 에퀴터블 센터에서 세계의 관심을 모은 둘이 체스 맞대결이 펼쳐졌다.
미국 태생인 D는 2m 키의 장신에, 왕년의 미국 체스 챔피언 조엘 벤저민 등에게서 체스를 배웠다. D는 고지식해서 상대방의 눈치를 본다든가 약점을 간파하는 재주 따위는 없었지만 그 대신 치밀하고 행마를 계산하는 데에 능했고, 지칠 줄을 몰랐다.
러시아에서 태어난 K의 무기는 그동안 쌓아올린 실전 경험과 끈질긴 승부근성이었다. 하지만 대전시간이 길어질수록 지쳐갔고, 갈증과 함께 집중력이 떨어졌다. 순간순간 작전을 바꿔가며 D를 공략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D의 승리였다. K는 결과가 몹시 아쉬웠겠지만, 정작 D는 기쁨도 보람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게 이 게임은 흥미진진한 모험이 아닌 하나의 연산에 불과했으니까.

K는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체스 스타 가리 카스파로프이고, D는 미국 IBM이 탄생시킨 수퍼컴퓨터 ‘딥블루(Deep Blue)’다. ‘인간 두뇌와 인공 두뇌의 대결’로 관심을 끌었던 이 대전의 승자는 딥블루였다.




대결 결과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한낱 기계 따위에 졌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들도 있었고,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지능의 진화가 가져올 가공할 미래세계를 미리 점치는 이들도 있었다. 어차피 인간의 손으로 만든 작품인 딥블루의 성공을 인간의 또다른 개가로 보는 기술낙관론자들도 적지 않았다.

높이 2m, 무게 1.4t의 딥블루는 IBM 연구소가 조엘 벤저민과 합작해 10년간의 연구 끝에 탄생시킨 역작이었다. 딥블루의 전신은 85년 카네기멜론대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슈펑슝의 칩테스트(ChipTest)였다. 학위를 따고 IBM 연구소에 들어간 슈는 93년 초당 2000~3000개의 행마를 판단하는 딥소트(Deep Thought)를 만들었다.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하면서 96년에는 1초에 2억 가지 수를 비교, 최적치를 선택하는 놀라운 연산능력을 가진 딥블루가 탄생했다.
세계 체스챔피언인 카스파로프가 1초에 읽을 수 있는 행마가 3~5가지라고 하니, 수치만 놓고 보면 둘의 대결은 게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뉴욕 대전은 딥블루의 승리 뒤에 숨은 인공지능의 한계 또한 보여줬다. 카스파로프는 경기가 끝난 뒤 “딥블루가 살아있는 사람처럼 지능적, 창의적으로 움직였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감정의 흐름을 비롯한 복잡한 상황을 포착하고 판단하는 데에서 딥블루는 명확한 한계를 보여줬다.

체스용으로 고안된 하드웨어였던 딥블루는 몇차례 게임 뒤 사라졌고, 인공지능은 하드웨어 시대에서 컴퓨터프로그램이라는 소프트웨어 쪽으로 둥지를 바꿨다. 리브카, 딥프리츠, 딥주니어 같은 유사프로그램들이 줄줄이 선을 보였다. 2006년 블라디미르 크람니크와 딥프리츠의 대전 때에는 1.4t짜리 컴퓨터 대신 인텔 컴퓨터칩 2개가 필요했다.




현재의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태어나(아버지는 아르메니아계고 어머니는 유대계인데 바쿠에서 태어났네;;) 어릴적부터 체스 신동으로 관심을 모았고 딥블루와 세기의 대결을 펼쳤던 카스파로프는 2000년대 들어 러시아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투신,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에 맞서 야당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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