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아메리카vs아메리카

아이티와 미국

딸기21 2010. 1. 14. 19:13
728x90

미국이 지진 참사를 당한 아이티 지원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습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아이티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항공모함과 병력을 보냈고,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오세아니아 순방길에 나섰다가 일정을 미루고 워싱턴으로 다시 방향을 틀었습니다. 미국이 이처럼 발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국제사회의 지원으로 힘겹게 세워진 아이티의 취약한 민주정부가 이번 사태로 무너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죠. 난민 사태를 막는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고요.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들은 지진 발생 이후로 오바마 대통령의 일정이 ‘아이티 사태’에 맞춰 돌아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오바마는 메릴랜드주를 방문하기로 했던 일정을 미루고 12일 밤 백악관 상황실에서 대책회의를 열었습니다.
13일 아침에는 참모들과 다시 회의를 한 뒤 조 바이든 부통령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초기 대응이 중요하다”면서 신속한 지원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오바마는 대외원조를 주관하는 국제개발처(USAID) 라지브 샤흐 처장을 ‘아이티 재난구호 통합조정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미 해병대 파병, 육군 여단병력 비상대기

백악관 뿐 아니라 미 정부 전체가 아이티 지원에 발을 맞췄습니다. 호주·뉴질랜드·파푸아뉴기니 순방차 워싱턴을 떠나 하와이에 기착했던 클린턴 장관은 백악관과 통화한 뒤 13일 일정을 취소하고 우선 아이티 사태에 집중키로 했습니다.
클린턴은 5년 전 인도양 쓰나미 사태를 언급하며 “이번에도 인명 피해가 클 것 같다”고 우려했습니다
(사실 클린턴은 이 문제와 인연(?)이 있지요. 아시아 쓰나미 사태 때 누구보다 앞장서서 구호기금 모았던 것이 남편인 빌 클린턴이고, 또한 빌 클린턴은 유엔 아이티 특사이기도 하니까요).

국방부는 13일 공병대·통신전문가·구호전문가를 C130 수송기에 태워 선발대로 보냈고 선박과 수송기, 헬리콥터와 해병대 병력 2000명도 아이티로 파견했습니다. 14일에는 항공모함 칼빈슨호가 아이티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중남미 지역을 담당하는 미군 남부사령부 더글러스 프레이저 사령관은 “육군 3500명 규모의 여단 병력이 비상대기 상태에 들어갔다”고 밝혔습니다.
미군이 나선 것은 아이티의 치안 불안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아이티에서는 정부 기능이 마비돼 거리 약탈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유엔 평화유지 병력도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현지 치안을 장악할만한 물리력을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미국 뿐이겠지요. 아이티에는 현재 4만5000명이나 되는 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어,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도 깔려 있습니다.

백인 독립공화국과 흑인 독립공화국

 

하지만 두 나라의 관계가 그리 담백(?)하지만은 않습니다.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은 카리브해의 최빈국 아이티와 얼키고 설킨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아이티는 흑인 노예출신 혁명가들의 투쟁으로 1804년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독립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자국 내 흑인노예들이 자극받을까 우려, 독립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고 합니다. 여하튼 미국과 아이티는 ‘서반구에서 가장 오래된 두 독립공화국’이 되었는데요. 차이는 명백합니다.

 

영국과 싸워 미국을 세운 사람들은 백인 엘리트층이었고, 프랑스와 싸워 아이티를 세운 사람들은 흑인 해방노예들이었습니다. 아이티 건국의 아버지인 프랑수아-도미니크 투생 루베르튀르 Francois-Dominique Toussaint L‘ouverture‘검은 스파르타쿠스’라 불렸던 사람입니다. 노엄 촘스키의 <507, 정복은 계속된다>에 나온 구절을 인용해봅니다.

오늘날까지도 아이티 학생이라면 누구나 루베르튀르가 프랑스로 끌려가면서 남긴 마지막 말을 암송한다. "내가 무너진다면 생도밍그의 단 하나뿐인 자유의 나무는 쓰러지고 말리라. 그래도 자유의 나무는 다시 살아나 땅 속 깊이 수많은 새로운 뿌리들을 내리리니."


여기서 말한 생도밍그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현재의 아이티를 가리킵니다. 도미니카공화국(아이티와 붙어있죠)의 수도는 그 이름을 따서 '산토도밍고'가 됐지요. 루베르튀르는 그렇게 싸워, 피로써 아이티라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아이티 '민주화' 이후 재건 지원

지진 얘기하다가 너무 멀리 와버렸는데요, 다시 미국과 아이티의 관계로 돌아가보죠.

미국은 1915~34년 아이티를 무력점령하기도 했습니다. 50년대 이후 뒤발리에 독재정권이 아이티를 장악한 뒤에는 쿠바의 영향력을 차단하려고 지원을 해줬지요. 73년 이래 미국은 아이티의 최대 원조국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86년 ‘베이베독’ 뒤발리에가 쫓겨나고 90년대 아이티 민주화투쟁이 세계에 부각되자 미국은 이 나라를 중미의 ‘민주주의 모범생’으로 만드는 쪽으로 정책을 바꿨습니다.

 

95년부터 지금까지 미국은 아이티에 15억달러(약1조7000억원) 가량을 원조했습니다. 또 미국은 국제사회의 아이티 지원을 조직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미주기구(OAS)를 통한 지원은 물론이고, 캐나다·프랑스·베네수엘라·칠레·아르헨티나와 함께 유엔 산하 ‘아이티의 벗들’이라는 그룹을 만들어 도왔습니다. 2001년부터는 이 그룹에 카리브공동체(CARICOM·카리콤)와 유럽국들도 끌어들였습니다.

 

물론 미국이 아이티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데에는 난민 문제도 걸려 있습니다. 1991~94년 아이티에 군사쿠데타 정권이 들어서자 난민 6만7000명이 미국으로 도망쳤습니다. 바하마 등 주변국들도 모두 난민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국제사회가 엄청난 노력과 돈을 들여 간신히 세워놓은 아이티의 르네 프레발 정부가 지진 여파로 쫓겨나면 공든탑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 난민사태가 다시 발생할 우려가 큽니다.

정정불안 조짐은 벌써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이티 인터넷미디어 ‘아이티액션넷’은 13일 프레발 정부에게 정적인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전대통령의 귀국을 즉각 허용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해방신학자 출신인 아리스티드는 2004년 미국이 지원하는 프레발에 밀려 아이티를 떠났습니다. 이후 아리스티드는 유럽을 돌면서 “미국이 사실상 쿠데타를 일으켜 나를 내쫓았다, 나는 미국에 의해 납치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닙니다. 진실은 누가 알겠습니까마는...

728x90